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구판절판


진정 필요한 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이라는 것을 원래의 '고유한 시간대'로 원위치시켜놓는 일이다. 고유한 시간대란 8만여명의 원주민이 인구 50명당 한 명 꼴로 살육당하던 그 시기를 의미한다. 그 꿈의 고유한 공간성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유한 공간성이란 400만 주민들이 살던 섬의로의 공간성을 의미한다-130쪽

백인 세계 내의 유색인들은 자신의 신체 발달 과정에서도 장애를 겪는다. 몸의 의식이 유일한 부정의 기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제3자의 의식이기도 하다.-141쪽

나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 세계는 나를 끊임없이 밀어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합리성의 측면에서 이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고로 나는 비합리성에 내 몸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나보다 더 불합리한 백인 때문이었다.-156쪽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한 주체가 아니다. 의미는 이미 그 곳에 있었다. 내 이전에 이미 그곳에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며 말이다. 내가 세상을 태워버릴 횃불을 만들 구상을 하는건 내 열악한 검은 불행, 내 사악한 검은 이빨, 내 한심한 검은 궁기 때문이 아니다. 횃불이 이미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반전을 기다리면서 말이다.-169쪽

흑인의 과거가 없이는, 흑인의 미래가 없이는 내가 내 자신의 흑인성을 살아내는 것, 그건 불가능하다. 완전한 백인도 아닌, 그렇다고 철저한 흑인도 아닌 나는 저주받은 인간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망각하고 있었다. 흑인의 신체는 백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백인과 나를 연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초월뿐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항상성을 나는 소실했다. 내 자신을 내가 절대적 시각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그리튀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그 기자재를 조립했다. 산산조각난 그것을 다시 부축여 세웠다. 칡뿌리같은 내 양손의 직감에 따라 그것을 다시 구성했다.-173쪽

태평양 전쟁에서 부상당한 한 절름발이 고참병사가 내 동료들에게 이렇게 고한다. "내가 내 의족에 익숙해진 것처럼 그대들도 그대들의 피부색에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익숙해져 보라구. 우린 어차피 모두 피해자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이 절단된 불구성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하나의 영혼이란 세계 만큼이나 무한한 것이므로. 또한 흐르는 강물처럼 깊은 것이므로. 그러므로 나의 가슴은 무한정 팽창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절름발이의 겸양을 수용하라고 닥달한다. 어제, 세상의 아침을 향해 깨쳐 일어나면서 나는 하늘이 처러하고 완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똑바로 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장이 다 드러난 침묵이 내게로 무너져 왔다. 날개가 마비된 채. 책임감도 없이 한 발로는 無, 다른 한 발로는 무한을 떡 버티고 선 채 나는 긴 울음을 울었다.-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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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다가. 문득 마주친 문장에서, 머리 속에 잠시 어떤 생각들이 뒤섞여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원래의 문장이다. 파농은 흑인이었고, 저것은 그가 맞부딪쳐야 했던 현실이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에 맞부딪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네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건 어떤가. 다시 파농의 글.

항상 흑인 선생이고 흑인 의사고 그렇다. 점점 더 상처를 받으면서 나는 사소한 구실에도 치를 떨었다. 예컨대 한 (흑인) 의사가 단순한 의료사고라도 내면, 그것은 그 의사 한 개인의 종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흑인) 의사 지망생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래, 흑인 의사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니?

저 문장에서도 '흑인'을 '여성(여자)'로 바꾸면 그것은 그대로 나의 이야기이다. 파농을 여성의 관점에서 읽으려고 애당초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야기이고, 파농은 흑인의 관점에서 제국주의라는 적과 탈식민주의(해방)라는 과제를 바라본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파농 또한 남자이기 때문에 파농의 분석에서 예시되는 사례들은 극히 남성적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여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관점에서 성차별/가부장적 차별이라는 적과 양성평등(인류해방)의 과제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해석 내지는 지나친 상상이라고 비웃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같은 책에 나오는 파농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한 가지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와 다른 한 가지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 사이에서 우열을 가려내려는 것은 매우 유토피아적인 망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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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2-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선생님이시군요. 그런 일이 어디 한두번이라야 말이지요. 그쵸? ^^

바람구두 2004-12-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가끔 남성인데도 불구하고 아줌마스럽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딸기 2004-12-0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서는(남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남성성이 좀 있는 여성이랑, 여성성이 좀 있는 남성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이미지의 삶과 죽음
레지스 드브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시각과언어 / 1994년 11월
평점 :
품절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레지스 드브레, 라는 이름때문에 책을 골랐다. 아마도 프랑스어 원문이 꽤나 현란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드는 화려한 문장들, 정신없는 반어법들. 비단 미술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고(그 자신은 '매개론'이라 부르지만) 서양문화를 종횡무진하는 화려한 생각의 편력. 그럼에도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인용해놓은 저 문장,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라는 문장 때문에 결국 다 읽었다. 언제 어느 부분에서 드브레의 통찰력과 맞닥뜨리게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리한 독서의 와중에도 기대는 끝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저 문장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아버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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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 뒤지고 있구나"
"연장전도 생각하고 있어야겠네"
"패배는?"
"그게 뭔데?"


지나가던 수영부원, 너무 좋다...


덕택에, 당분간 다른 책은 거의 못 읽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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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리뷰의달인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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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2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헤 ^^

마냐 2004-11-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아직 아니었어?ㅋㅋ

딸기 2004-11-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엣, 뭐야! 달인의 길이 얼마나 멀고도 험했는데!

숨은아이 2004-11-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