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재생지로 된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 내용은 크고 넓다.
제목이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책은 미국 출신 사회운동가 겸 저술가 더글러스 러미스가 일본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보자, 하고 지적하고 제안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일본어 문체로 돼 있어서 거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다소 생소한 말투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적하는 내용과 제안도 일본적이지만, 우리 또한 새겨들어야만 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아니, 사실은 “개같이 벌으렸다, 돈만 벌어라”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일로매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이 일본은 물론 미국도 제치고 1등할 것 같다. 그러니까 '20대 80' 중 잘나가는 20 말고 못난이 80이라도 그럭저럭 먹고살 여지가 있는 일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 등등, 이와 같은 상투적은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제목을 선택하였다. 경제발전론=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이 사회의 상식이 되어있는 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밖의 다른 테마에 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7쪽)


러미스가 사람들의 경계와 각성을 끌어내고자 애쓰는 부분은, “경제의 파이를 키우자”라는 성장 일변도의 생각에 관한 것이다. 파이를 키우자, 그러니까 파이가 커질 때까지는 파업도 말고 인권 환경 여성 인권 노동 복지 문화 이런 거 떠들지 말고, 배 채울 때까지 일단 기다려라, 그런 논리 말이다. 성장이 되면 우리는 저절로 인권 환경 여성 노동 복지 우선국가가 될까? 성장이 안 되면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소리’는 신경 써서는 안 될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다종다양한 목소리와 가치관을 ‘배부른 자들의 소리’로 치부해온 탓에 여지껏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언제나 배가 고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원론적으로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게 다 배부른 소리야”라는 말로 맞받아쳐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순환논법에 빠지게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말은 맞지만 어떻게 할수 있나”고 체념한다. 러미스는 그런 식의 논리구조에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타이타닉호처럼 ‘전진하지 않으면 가라앉는 체제’로 보고 있다고, 오늘날의 현실주의는 ‘멈추거나 늦추면 가라앉고야 만다는 논리에 입각한 타이타닉 현실주의’(17쪽)라고.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은 생각을 바꾸자는 것, 그리고 체제를 바꾸자는 것이다. ‘발전’(development)은 어원으로 따져보면 가려진 것, 감춰진 것을 풀어 꺼낸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쪽(저개발 세계)을 까뒤집어 속도전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개발된 세계)을 다시 좀 오므리고 늦춰서 가치관 바로잡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사람들이 일 중독과 소비 중독, 두 가지 중독에 빠져 있는데 인간을 다시 보통 인간으로 돌아오게 해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되찾게 만드는 일(107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대항발전’이라 이름붙였다. 좀 추상적이고 몽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맞아 맞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세상이 숨통이 트이고,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이 많아지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10-0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도착한 책이에요. 이번에도 당장 볼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꼭 볼거야요^^;;;

딸기 2007-10-01 21:35   좋아요 0 | URL
분량이 많지 않고 내용도 비교적 명확해서,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거야.
어쩌면 나보다는 마노아가 더 좋아할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P
 
진보와 야만 - 20세기의 역사
클라이브 폰팅 지음, 김현구 옮김 / 돌베개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벌써 한 10년은 된 것 같은데,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COLLAPSE)’ 같은 책들보다 훨씬 선구자적으로 역사를 환경적 관점에서 설명한 저술로 기억하고 있다. 폰팅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도 무려 ‘진보와 야만- 20세기의 역사’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다.

각설하고, 기대에 부응해주는 책이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밑줄을 쳐가며 읽고,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기록해둬야겠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책장 귀퉁이를 접어 표시를 해놨다가 뒤에 독서카드를 정리하면서 옮겨 적고 인터넷 홈페이지나 알라딘 서재에도 타이프해 놓는다. 670쪽에 이르는 이 책에는 그런데 책장 귀퉁이가 접혀진 곳이 하나도 없다. 인상 깊은 구절이 하나도 없어서가 아니라, 책의 내용과 분위기,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전반을 기억에 새길 일이지 어느 한 구절을 딱히 꼽아낼 만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체제론에 근거해 세계를 ▲중심부 국가들과 ▲주변부 국가들 ▲그리고 그 사이 반(半) 주변부 국가들(20세기 상당기간 반주변부에 해당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와 남유럽, 동유럽 국가들이었다)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20세기라는 기간의 세계를 설명하는데에 유효한 틀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심부와 반주변부, 주변부 국가들은 서로 다른, 그러나 서로 연결돼있는 시간의 흐름을 겪어왔다.

저자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기술적인 틀이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라는 시스템이라면, 20세기라는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진보와 야만 사이의 투쟁’이다.
20세기는 분명 진보의 시대였고, 특히 중심부 국가들에겐 설명이 필요 없는 역사적 발전의 시대였다. 동시에 20세기는 공산주의(스탈린 체제)나 나치즘, 식민주의 같은 야만을 창조해냈다. 중심부의 진보와 주변부의 야만, 중심부의 진보와 중심부의 야만, 주변부의 진보와 주변부의 야만. 진보와 야만은 20세기 내내 DNA 나선기둥의 두 축처럼 엮여 있었다. 진보와 야만 그리고 그 둘 사이의 투쟁은 20세기 세계 체제의 본질이자 동력이자 결과였던 셈이다.

저자는 중심부 뿐 아니라 주변부와 반주변부의 역사도 소홀히 다루지 않으려 애쓰고, 진보의 낙관론과 야만의 비관론을 어느 한쪽 배제하지 않고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사료의 한계와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간과할 수 없는 요인 때문에 중심부에 더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은 사실이지만,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론을 제외하면, 전체를 경제사와 사회사/국제사/국내사로 나눈 뒤 다시 환경, 지구화, 제국, 탈식민지, 민족, 전쟁, 파시즘, 독재, 혁명, 억압, 차별, 제노사이드 같은 식으로 테마를 잡아서 설명하는데 짜임새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세계체제론의 틀에 충실하다보니 테마에 따라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의 스토리가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 강하고, 2차 사료들 중심이다 보니 여기저기 역사책들에서 주워들은 내용이 겹쳐진다는 단점도 없진 않았다.
시기적으로 지난 100년 안팎을 다루고 있지만 워낙 광범위한 세계(전세계!)를 다루는지라 항목에 따라서는 주마간산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20세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피박의 대담 - 인도 캘커타에서 찍힌 소인 디알로고스총서 4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새러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 갈무리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피박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와서 무모한 용기를 내어 주문했고, 꾸역꾸역 읽어치우긴 했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도 같다가, 너무 어려운 소리들만 해서 또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다 싶기도 하다가... 번역도 너무 직역이어서 문장이 아주 꼬여있어서 나하고는 영 안 맞는 스타일의 책이었다.
그래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은 좀 있었다.
나는 외국에 가서 ‘제3세계 여성 지식인’이 돼본 경험은 없지만 유추를 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내가 마이너리티적인 요인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여성’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너무나 압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요인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각을 피해갈 수가 없다.
이 책에서 스피박이 얘기하는 어려운 말들을 이해하고 그런 개념어들을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글을 읽을 때) 누구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의 언어로 쓰인,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가. 뒤집어서, 내가 이야기할 때, 나는 누구의 시각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자신있어보이면서도 고뇌어린 듯한 스피박의 얼굴, 짧게 자른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almas 2008-07-23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좋은 입문서인데, 번역이 문제가 많은 것 같더군요. -_-;;
언제 한번 번역비평을 써봐야 할 듯 ;;;

딸기 2008-07-23 10:41   좋아요 0 | URL
번역은 아주아주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전문용어(?) 문제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읽느라 힘들었어요 ㅠ.ㅠ
 
버냉키 파워 - 세계의 경제 대통령
가토 이즈루.야마히로 츠네오 지음, 우성주 옮김 / 달과소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사에 굴러다니는 것을 집어서 읽었는데, 의외로 아주아주 많이 도움이 됐다!
버냉키가 FRB 새 의장이 되니깐 거기 맞춰서 좀 억지로 짜맞춘 느낌도 없지는 않다. FRB의 의사 결정 구조와 역사 등 전반적인 것에 대한 설명이 더 많고 알차고 도움도 되는데 제목에 ‘버냉키’를 넣으려 애쓴 듯한 인상. 버냉키에 대해서는 이런 사람이다 어떻게 갈 것이다 확정적으로 말하기 힘든 상황에서 쓴 것이라 너무 추상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FRB 전반에 관한 충실한 설명, 저널리스트로서 느낀 현장감과 축적된 데이터들을 잘 결합시켜 ‘FRB 참고서’로 훌륭하다는 점에 별 네 개.

▶연방준비법이 FRB에 부과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은 고용 최대화와 물가안정이다.

FRB는 ①페더럴펀드 금리를 일정 수준으로 유도한다 ②그것이 장래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토크’에 의해 시장이 예상하도록 해 국채금리에 영향을 준다 ③국채금리는 모기지, 회사채, 은행대출, 소비자대출 등에 영향을 주므로 나중에는 인플레이션율, 성장률, 실업률 등 실물경제로 효과가 파급돼 간다.

 
▶페더럴펀드 시장은 한마디로 자금도매시장(한국의 콜시장)이다. 도매시장이므로 시장 참가자들은 금융기관(은행)으로 한정돼 있다. 브로커를 통한 최근 관행상 최저거래금액은 2억 달러다. 이를 밑도는 금액은 금리조건이 나빠진다.
이 시장은 텔레폰 마켓이며 증권거래소처럼 한 곳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초단기자금 대차가 주류이며 오버나이트 거래(다음날 아침까지의 초단기 자금 대차)가 중심이다. 보통은 이 오버나이트 금리를 페더럴펀드 금리라 부른다. 

▶ FOMC의 정례회의는 연간 8회 열린다. 연초 회의와 중간 회의는 의회에 제출하는 경제전망을 작성하기 위해 열리며 회기는 보통 이틀이다. 다른 회의의 회기는 하루이다. 경제정세가 급변하면 의장이 긴급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IT 주식 버블붕괴와 9·11 테러에 휩싸인 2001년도에는 정례회의가 8회, 긴급회의가 3회 열려서 11회 연속 금리인하가 결정되었다. 

▶그린북: FRB 조사통계국이 제출하는 전미 경제현황과 전망. 그린북에 게재돼 있는 경제전망은 종종 FOMC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에 시장 참가자들도 항상 주시하고 있다. 그린북은 비공개(5년 후 의사록 전문과 함께 공개)이지만 회의 3주 후에 발표되는 의사록(요지)에 ‘조사 스태프의 예측...’이라는 형태로 개요가 소개되므로 FRB의 최신 조사내용을 알수 있다.

▶또 12개 지역연방준비은행은 FOMC 회의에 앞서 관할지역 기업들에게 청취조사를 실시한다. 12개 은행의 조사결과를 1곳의 은행이 보고서로 정리해 FOMC 회의에 제출한다. 이 베이지북은 FOMC 정례회의 전에 공표되기 때문에 회의의 향방을 점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FOMC 회의에서는 FRB 금융정책국장이 금융정책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 리포트는 블루북(그린북과 마찬가지로 전문 공개는 5년 후)으로 불린다. 블루북은 특정 정책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금리인상, 금리인하, 금리동결이라는 세 가지 선택에 대해 그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다. 또 FOMC 성명에서 금융정책의 전망을 시사하는 가이던스가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에, 블루북에 그 표현의 선택방향도 게재하게 되었다. 블루북은 FOMC 회의 1주일 정도 전에 멤버들에게 회람된다. 

▶FOMC 의사록(요지)에서 ‘멤버’로 기술되는 것은 FRB 멤버 7명과 투표권을 가진 5명의 지역연방준비은행 총재들을 가리킨다. ‘회의 참가자(Meeting participant)’는 투표권을 갖지 않는 지역연방준비은행 총재 7명을 더한 19명 전원을 가리킨다. 

▶의사록에서는 발언자 수를 최대 ‘전원(all)’에서 서서히 적은 ‘대부분(most)’, ‘많은(many)’, ‘몇명(several)’, ‘소수(few)’, ‘한명(one)’과 같은 식으로 표기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다수의견인지 소수의견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경제통계 중에서도 고용통계가 특히 중시되는 것은 커버 범위가 넓고 발표일이 주요 통계 중에서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고용통계는 매달 12일을 포함한 주에 조사하며, 그 다음달 첫째주 금요일에 발표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2-06-30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야간비행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64
생 텍쥐페리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한 밤중에 하늘을 날면 어떤 기분일까.

속으론 생 텍쥐페리를 좋아하는데 정작 이 책을 읽지를 못해서 겉으론 그런 말을 못했다. 어느분이 이 책을 선물해줘서 읽었는데, 마음이 어딘가 좀... 마음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찌르는 것 같지는 않고 막 주물럭주물럭하는 것 같지도 않고 간질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뭐랄까, 마음을 손가락으로 살짝 툭 건드리거나 아주 잠깐 살살 문지르거나 하는 것 같은 기분.
작가는 승리와 패배라는 단어를 끄집어내는데 승자와 패자는 분명하지 않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냉정한 항공 관리책임자는 승자인 것 같기도 하고, 패자인 것 같기도 하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내 상태가, 이것은 승리다 저것은 패배다, 매사 이렇게 딱딱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어진 상태여서 그런지 그냥 마음이 흔들리면서 잘 모르겠다.

[책 속에서]

언젠가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 현장에서 부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한 기사가 리비에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면서까지 이 다리를 건설할 가치가 있는 걸까요?” 이 길을 이용하는 농부들 중에서 다른 다리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얼굴을 이렇게 끔찍하게 만들어도 좋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사람들은 다리를 세운다면서 그 기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공익은 사익들이 모여 이뤄지는 것이니까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리비에르는 나중에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비록 사람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뭔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진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 (87쪽)

고대 민족의 지도자는 아마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막에 묻혀버릴 종족의 소멸에 대해서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그 지도자는 사막에 묻혀버리지 못할 돌기둥이나마 세우고자 백성을 끌고 산상으로 갔던 것이다. (89쪽)


애국심, 발전, 민족, 종교, 대의, 신념, 이데올로기, 규율, 원칙... 이런 것들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대우를 받는데,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세상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의 모자이크로 이뤄져 있고 그 속에 가끔씩 숭고함이랄까 그런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다. 두 가지가 종이 한 장 차이일 때가 많다. 희한한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09-18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한한 일이에요^^

딸기 2007-09-18 12:59   좋아요 0 | URL
그치?

마노아, 사진 이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