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독감 확산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서 치료제 확보가 각국의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조류독감 치료효과가 확인된 약은 스위스의 로슈사(社)가 특허권을 갖고 있는 타미플루 하나 뿐이다. 국제의료단체들은 조류독감과 같이 광범한 피해를 미칠 수 있는 질병의 치료제에 대해서는 세계무역기구(WTO)가 특허권 행사를 제한해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류독감을 계기로 의약특허권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타미플루 공급, WTO가 나서라"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의료단체 `국경없는 의사회'는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필수의약품에 대해 지적재산권 행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26일(현지시간) 홈페이지에서 밝혔다. 이 단체는 조류독감이 확산될 가능성에 대비해 WTO가 빨리 치료제 생산규정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TO는 2001년 카타르 도하 회의 때 지적재산권 행사의 예외규정을 만들어 필수 의약품의 경우 기업의 특허권 행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규정에 따라 각국 정부는 강제실시권을 발동, 제네릭 약품을 생산할 수 있게 돼 있다. 제네릭약품은 특정 약품의 특허 기간이 끝난 뒤 다른 제약사가 같은 효능을 갖게끔 만들어낸 약으로, 보통 `카피약'이라 불린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타미플루처럼 특허기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대규모 수요가 발생하거나 비싼 특허료 때문에 무단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약품들. 각국 정부는 강제실시권 행사 전에 우선 특허권자와 보상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협상 이전에라도 생산을 할 수 있으나, 규정이 까다롭기 때문에 실제로는 카피약 생산을 금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많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이달 안에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인 WTO 지적재산권위원회 회의에서 관련조항을 수정, 환자들이 필수의약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의 제약회사 시플라 등은 이미 타미플루의 제네릭 제품을 생산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특허냐 생명이냐
카피약 생산은 에이즈치료제를 계기로 몇년 전부터 뜨거운 이슈가 돼왔다. 2001년4월 남아공 정부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에 맞서 자국기업들이 특허 없이도 에이즈 치료제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며 법원에 소송을 내 승소했다.
브라질과 인도, 중국, 태국 등이 뒤따라 카피약 생산을 선언하고 나오면서 세계적인 `카피약 논란'이 일어났다. 에이즈치료제 특허권을 갖고 있는 머크,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 로슈홀딩 등 거대 제약회사들은 국제 여론에 부딪쳐 결국 `제3세계 공급분'에 한해 약값을 인하했다. 노바티스가 생산하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을 놓고서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국에서 제작사측과 사용자들 간 싸움이 벌어진 바 있다.
의료-인권단체들과 제3세계 국가들은 에이즈나 조류독감처럼 대규모 피해를 내고 있거나 낼 수 있는 질병의 치료제 생산에서는 기업의 `돈 벌 권리'를 제한하고 인간의 `살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거대기업이 만든 원제품 대신 아프리카나 중남미 현지기업들이 만든 카피약을 보급하면 에이즈 같은 질병의 치료비용은 크게 낮아진다. `필수의약품 접근권 확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카림 라우브디아 박사는 "여전히 제3세계 사람들은 비싼 약값 때문에 꼭 필요한 치료제를 얻지 못하고 있다"면서 WTO 등 국제기구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