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부터 독서카드를 정리해왔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여지껏 연말결산은 해본 적이 없다. 책을 '결산'한다는 웃기고 재미난 아이디어가 여지껏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연말결산을 해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알라딘 서재질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연말 독서결산을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난 좋아보이는 게 있으면 무조건 따라해본다. 그래서 지금 연말결산을 따라해보기로 했다.


지금 나의 처지가 처지이니만큼 올해 읽은 것들 중엔 일본에 대한 책들이 많았던 듯 싶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으로 시작해서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그리고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도쿄이야기', 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후지따 쇼오조오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코모리 요우이치 외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가와무라 신지 '후쿠자와 유키치',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아사오 나오히로 '새로쓴 일본사', 비즐리 '일본근현대사'를 읽었다.

그 중에서 인상적 내지는 감동적이었던 것을 꼽자면, 역시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이 될 것이다. 어째서 마루야마가 일본 학계의 '텐노(천황)'라 불렸는지를 알게 해주는 저작, 1940년대 말 일본에는 이미 이런 수준의 '전후 분석'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으로 와닿았던 책.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은 '일본을 알자'라는 맥락에서 읽은 책은 아니고, 일본을 소개하는 책도 아니지만 끊임없이 비판하고 회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채찍같은' 책이었다. '도쿄이야기'와 '화려한 군주'는 각각 '근대 도쿄', '일본 근대의례의 발명'이라는 한정된 주제를 밀도깊게 다뤄서 맘에 들었던 책들이었다. 이밖에 (일본을 주제로 한 것은 아니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 몇권, '화려한 군주'에서 가지를 뻗쳐 에릭 홉스봄 등의 '만들어진 전통'도 펼쳐봤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도 올초에 읽은 몇권의 책 중 하나다.

굳이 구분하자면 '사회과학'이 되려나? 인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 분야에서 좋았던 책들을 꼽자면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이 아주아주 재미있었다. 하버마스-데리다 '테러시대의 철학'도 괜찮았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엮은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도 누구에게든 추천하고픈 책이었다. 반다나 시바의 책 두 권(물전쟁/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은 그것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장하준의 책들(개혁의 덫/사다리 걷어차기)도 제법 재미있었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들뢰즈 '의미의 논리', 윌리엄 모리스 '에코토피아 뉴스'는 빚독촉 받는 심정으로 읽었다고 할까. 군주론은 재미있었고, 나머지는 재미없었다. (좋은 책들의 가치를 '재미'라는 기준으로 잘라버리기가 뭣하긴 하지만 어쨌든 기준은 '나'이니까)

반면에 중동-이슬람에 대한 책들은 아무래도 업무를 떠나있다 보니 많이 읽지를 못했다. 그대신 그동안 통 안 읽었던 역사책들에는 재미가 좀 붙었는지, 조너선 스펜스의 책 왕창, 그리고 중국에 대한 책을 몇권 읽었다. 또하나의 수확이라면 프란츠 파농의 책들을 읽은 것.

과학분야도 좀 소홀히 했었는데;; 재밌었던 책이라면-- 단연 '엘레건트 유니버스'. 매트 리들리 '본성과 양육', 파인만의 '일반인을 위한 QED강의', 그리고 올해의 책으로 꼽은 '총,균,쇠'가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노는! 만큼, 평소 안 읽던 책들을 좀 읽어보자 하는 생각에서 손을 댔던 것들도 꽤 있다. 조셉 캠벨 '신화의 힘'은 단순한 '신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올해 나의 독서행태를 되돌아볼때 또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 단편집 몇권을 읽었지만 아주 재미있는 것은 없었고, 기억에 남는 소설이 있다면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서평을 못 올리고 있다 ^^;;

앗차차, 까먹을뻔 했다. 소설 분야에서는-- '반지제왕' 다 읽었다. 어언 몇년 만이냐... (폼을 한껏 잡고, 옆구리에 한손 올리고) "영어로 읽었또요~"

올해의 마지막 책은 아마도 '반투 스티브 비코' 혹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년의 첫 책도 그 둘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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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3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나두 결산 따라해야지, 했는데...역시..흐흐. 91년부터 쌓아온 독서카드는 정말 대단해...2000년이었던가? 덕분에 독후감 정리하는 습성을 배운거, 많이 많이 고맙게 생각해.

딸기 2004-12-3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바람구두님이나 마냐님은 책을 많이 읽으니깐 결산하면 폼이 나는데 나는 별로 읽지도 않아놓고선 결산을 해놨더니 폼이 안 나... 적자야 적자... ㅠ.ㅠ

바람구두 2004-12-30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마왕.... 짱! 동방박사는 지금은 구하지 못할 듯 싶은데요. 음, 딸기님의 연말 결산 책들 가운데 뜨끔해지는 몇몇 대목들이 있어서 물론 엘리건트 유니버스 같은 책은 제가 아직 못 봤고, 딸기님이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역시 (그거 과학책이지?). 후쿠자와 유키치 말인데... 저는 지식산업사 것으로 예전에 읽었는데, 조금 아쉬워서 그런데 가와무라 신지는 어땠는지... 궁금궁금... 가라타니 고진부터 마루야마 마사오 부분에 이르는 대목은 거의 겹치고, 도쿄 이야기, 화려한 군주에 대한 평가는 저랑 흡사한 듯... 화려한 군주는 만들어진 전통이랑 함께 읽어보면 재미있을 듯 싶더군요. 상상의 공동체는 읽어 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놓았는데... 그래서 뜨끔하다는 말인데, 읽었거나 읽어보려고 하는 책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겹친다는... 하여간 소설 읽는다니 어째 두렵소. 흐흐.

urblue 2004-12-3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자 아니에요. 폼도 많이 나요. 어려운 책들이 많아서...^^;;

딸기 2004-12-3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뭔가 안내가 되었다니 기쁘네요. 운빈현님 '마왕'을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다른 곳에서도 들었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구두님, 엘레건트 유니버스는, 과학 분야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만하지만 '누구에게든 강추' 뭐 이런 책은 사실 아닙니다. 과학책 읽다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라는 것 뿐이지요.

후쿠자와 유키치,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기업 사외보' 같은 느낌. 후쿠자와의 영향력을 좀 부풀려 놓은 점(칭찬 일색 위인전의 특징), 하지만 그래도 후쿠자와라는 인물이 일본 근대의 일단을 담고 있긴 하니깐. 아무튼 추천할만한 책은 전혀 아닙니다.

저는 '만들어진 전통'보다 '화려한 군주' 쪽에 더 점수를 주고 싶어요. 구두님 결산글에도 '만들어진 전통'이 들어가있는 거 봤어요. 근데 만들어진 전통, 그렇게 밀도 있는 책은 아니었거든요. 홉스봄의 '총론'과 전체적인 주제는 맘에 드는데 각론 하나하나가 역시나 '영국식'이어서요. '상상의 공동체'는, 구두님의 리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근데 내가 소설 읽는다는데 왜 두려워요. 흐흐.

딸기 2004-12-3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새 유어블루님이 오셨다!

블루님, 저도 폼 나나요? 아이 좋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