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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전 이 영화에 대해서 길게 말할 게제가 못됩니다. 영화 중반, 정경철(최민식)이 간호사를 강간하려는 장면에서 전 가방을 들고 영화관을 나가려고 했었습니다. 만약 수현(이병헌)이 그 자리에 조금만 늦게 나타났더라면, 전 미련 없이 극장을 나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합니다. 물론 바꿔 말하면, (힘들지만)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영악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제가 느낀) <악마를 보았다>는 종교 수난극입니다. 국정원 요원인 수현의 애인은 잔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수현은 "널 이렇게 만든 놈에게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순간 신(神)이 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국정원 요원이라 얻을 수 있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함을 이용해 연쇄살인마 정경철을 찾아냅니다. 영화 초반, 그는 정경철을 처단할 수 있었지만 유예합니다. 그리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이용해 정경철이 악한 짓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 자리에 나타나 정경철에게 벌을 내립니다. 그의 복수는 일반인들이 피해자가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니까요. 그는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는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럿 넘기고, 자신의 나약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반면 정경철은 그 자체로 악마입니다. 그는 모든 연쇄살인범의 공식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성적인 이유도 아니고,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냥 여자를 잡아서 죽이고 삽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가족을 만났을 때도 그는 전혀 다른 이유로 광분합니다. 그에게 인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악마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면 혹은 악마가 되려면, 인간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윤리와 시스템은 물론이고 인성마저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신과 악마는 우리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말 그대로 악마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일까요? 악마는 되기 쉬워도 신은 될 수 없는.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쩌면 하늘에서 추락한 천사장들(Fallen Angels)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현이 통곡하는 모습은, 결국 그걸 깨달은 자의 절망의 눈물입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뜰 때, "악마를 보았다" 뒤에 쉼표(,)가 있습니다. 어쩌면 진짜 제목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봅니다. <악마를 보았다,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수많은 악마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2010년의 대한민국을 거의 절망의 시선으로 망연자실 쳐다보는 영화입니다. 자포자기의 절망. 카타르시스 없는 장르 영화. 통한의 눈물. 그러나 차마 다시 돌아볼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