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겁이 많다. 그래서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편이다. 그런데도 공포라는 감정이 원초적인 무의식을 자극하는지, 그렇게 무서워하고 잠을 설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공포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을 보면...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부나방 같다고나 할까. 내가 생각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내 숙면을 방해한 공포영화는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무서웠던 영화는 시미즈 다카시(清水崇) 감독의 <주온(呪怨)> 시리즈였다. <링(リング)> 시리즈는 TV만 치우면 됐었지만, 이 <주온>시리즈는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잠을 자다 눈을 떴을 때 불현 듯 눈에 들어오는 살짝 열린 방문, 가구와 가구 사이의 틈은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장이라도 가야코가 꺽~꺽~ 소리를 내면서 기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뜨지 못하고 억지로 잠을 청한 적도 부지기수다. 하다못해 이불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불 속에서 가야코가 미리 기다리고 있을까봐.   

 

그 밖에도 <주온>은 여러 이유로 불현 듯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한 밤중에 벽 속에서 쿵 하고 울리는 소리며(당시 내가 살던 단독주택이어서 벽이 울릴 일이 없었다) 잘 듣던 라디오가 갑자기 수신 불량으로 잡음이 들릴 때, 샤워할 때 누가 내 머리를 감겨주는 게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 때, 시끌벅적하던 공공장소에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있는 것을 발견할 때 그야말로 난 공포에 속수무책 떨었다. 그건 바로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추고 우리의 상상력으로 공포를 느끼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공포는 <주온> 시리즈가 최고인 것 같다.   

 

<주온>은 후지 TV에서 방송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일반 드라마처럼 방송용 ENG카메라로 촬영됐다. 그런데 내부 시사 후, "너무 무섭다(!)"는 이유로 방송이 취소되었다. 시미즈 감독은 출시사의 요청으로 이 영화를 비디오 영화로 재편집해 두 편의 비디오로 내놓았다(때문에 이 영화는 1편의 결말과 2편이 시작부가 30분가량 서로 겹친다). 이 비디오 영화의 엄청난 성공으로 시미즈 감독은 극장판 <주온>을 두 편 만들고, 할리우드의 요청으로 <그루지(The Grudge)>란 제목으로 두 편을 더 만든다. 이 6편의 영화들은 (어떤 평가를 받았건 간에) 흥행에 성공했다.  

주온(呪怨)이란 뜻은 "억울한 원혼이 업이 되어 저주를 내리는 것"이라고 영화에서 설명된다. 억울하게 살해된 가야코, 토시오 모자(母子)는 자신들이 살해된 집에 들어오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다. 동아시아의 귀신들이 원한과 복수의 관계가 명확했던 것에 비해 <주온>의 가야코, 토시오 모자의 행위는 불특정 다수를 노린 테러로 보일 정도다. <링> 시리즈의 사다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저주는 비디오테이프라는 매체를 통해 전염된다. 그녀는 귀신이라기보다는 전염병에 가깝다. 이런 전통은 동아시아 적이라기보다는 서양의 귀신들에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이다. 땅속 깊이 잠들어 있는 악마를 깨워 그 대가를 받는 인간들의 이야기. <이블 데드(The Evil Dead)>에서 이런 악마이야기를 다룬 샘 레이미가 이런 기막힌 소재를 그냥 둘리가 없다.  

같은 감독이 같은 장소에서, 단지 주연 배우들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주온>과 <그루지>는 너무나 다르다. 원본과 리메이크라는 익숙함과 익숙하지 않음의 차이가 아니라, 그 공포를 다루는 방법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이는) 서양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이한 일들을 서양은 원인 혹은 실체를 찾아낸다. 찾아내지 못하면 뒤집어씌우기라도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하다못해 마녀사냥 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양은 눈에 보이는 실체를 만들어낸다. 자연을 보더라도, 서양은 자연을 극복, 아니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동양은? '스스로 그러하다(自然)'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대로 둘 뿐이다. 꽉꽉 채운 프레스코 벽화와, 여백을 아름다움이라 칭하는 수묵화. 같은 세상에 살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일까? 너무나 무서웠던 <주온>의 세계가 서양인들의 시선이 개입되자, 그저 그런 시시한 세계로 전락한 것은.  

<주온>이 무서웠던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가야코가 그렇게 나타나서 사람들을 해코지하는지 모른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되지 못한 잉여 부분은 그 자체로 공포가 된다. 하지만 <그루지>는 다르다. <그루지>는 이 규정할 수 없는 공포를 '귀신들린 집'이야기로 다룬다. 그 자신도 훌륭한 공포영화를 만들어 온 샘 레이미 감독은 <주온>의 공포가 단순히 기괴한 이미지에서 온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논리 정연한 이유를 대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기질일까?   

 

<그루지>에서 느꼈던 공포는 소통의 부재였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에서 이유도 없이 쫓아다니는 귀신과,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루지>의 인물들은 철저히 혼자다. 그들은 혼자서 이 엄청난 공포에 맞서야한다. 공포영화의 잔인한 점 중 하나는 이런 잔인한 운명에 빠진 인물들을 즐기면서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점이다. 장르의 쾌감이라 변명하긴 하지만, 죄의식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내가 그토록 공포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나만의 (소박한)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덧붙임:  

1. 어쩌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그루지>를 보고 영감을 받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  

2. <그루지>는 <주온>의 지루한 반복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 이 장면 이후로 버스 창가에 함부로 기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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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7-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어지간한 공포영화는 껌처럼 씹어버리지만...'주온' 만큼은 예외입니다.

Tomek 2010-08-02 07:56   좋아요 0 | URL
저는 다른 시시한 공포영화에도 겁을 먹습니다. <주온>은 그 중 가장 최고의 자리에 있어요. ㅠㅠ

다락방 2010-08-0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마지막에 올리신 사진은 보지 말걸 그랬어요. ㅠㅠ 무서워요. ㅠㅠ

저는 귀신영화를 잘 못보는데요(정말 무섭잖아요!) 저를 그렇게 만든건 [엑소시스트 무삭제판]이었어요. 위에 말씀하신 것 처럼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후유증을 계속 안겨준 영화가 저는 [엑소시스트] 였죠. 그걸 극장에서 봤었는데 극장을 나오면서도 심장이 막 벌렁벌렁 거렸어요. 아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사탄의 얼굴을 보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그 뒤로 며칠간 세수를 하려고 할 때마다 물 위로 사탄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고, 가슴도 두근두근.

저는 [주온]을 보지 않았는데 그건 [링]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어요. 공포영화를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제게는 [링]도 어찌나 무섭던지. [링]을 보면서 '사람이 공포만으로도 죽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귀신이 우물에서 나올때는 정말. 어휴 ㅜㅜ

Tomek 2010-08-02 08:02   좋아요 0 | URL
<엑소시스트>는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그 영화를 보면, 무신론자라하더라도 세상에 하나님과 악마가 분명히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예전에 리뷰를 읽었을 때, 미국 신학대학에서 매년 신입생들을 위해 상영하는 영화가 <엑소시스트>라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역설의 역설이랄까.

<링>은 공포영화의 <시민 케인>이라 평가받을 게 분명합니다. 이 영화 이후로 아시아 공포영화가 다 바뀌었으니까요. 소설과 영화 속 현실이 진짜 현실이 된 무서운 경우인 것 같아요.

pjy 2010-08-02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온을 본건 아닙니다..다만 워낙 소개가 많이 되서요~
엘리베이터 바깥에서 아이가 계속 보이는 그 유명한 장면 있잖아요~~~

정말 아무생각없이!
영화를 찍을때 예산을 줄이려면~ 저 아이는 뛰는건가? 하는 소박한 의문을 입밖으로 내고 보니 문득 코메디로 다가오더군요ㅋ

Tomek 2010-08-03 09:12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에 "닮은 애들 한 4명 데려온건가?" 했어요.
제가 더 코미디인 듯. :D

Mephistopheles 2010-08-04 09:26   좋아요 1 | URL
가장 압권인 장면은 이불속에 숨어있는 여자귀신....이었다는...

pjy 2010-08-04 11:44   좋아요 1 | URL
아, 그 장면, 전 영화를 안봐서 앞뒤가 얼마나 공포스럽고 놀라운지 모르잖아요^^ 기냥, 참 더운데 힘들겠다~ 공포영화 여배우는 땀나는 체질은 안되겠구나~했어요ㅋ

iamtext 2011-09-0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공포영화 무서워서 못봤었는데,,, 새끼들을 키우다보면, 공포영화 쯤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더랍니다. 둘째 막달에 호러영화 페이퍼를 쓰기도 했었죠. 은행이 무섭고, 검사결과가가 나오는 병원이 무섭고, 뭐 그렇게 되더랍니다. 링 귀신보고, '대구리 좀 묶고 다녀! 답답해'소리치게 되어요.

Tomek 2011-09-01 15:54   좋아요 1 | URL
:D
아직까진 현실의 공포보다 상상속의 공포가 더 무서운 나이인가 봅니다.
애가 생기면 정말 달라질까요?

iamtext 2011-09-02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재 정문 사진 보니까, 미모에 아직 많이 젊으신데요, 뭘, 벌서 아기엄마 되실 생각을...

2011-09-0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