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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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염 - Red Bear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71648153573008.jpg)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항상 '인간'을 다뤘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은 항상 서로 속이고 기만하고 질투하며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가 그리는 인간군상을 보고 있자면, 정말 세상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탄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신뢰와 사랑이 무너진, 지극히 염세적인 세상.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볼 때면, 항상 먹먹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65년 작(作) <붉은 수염(赤ひげ)>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여전히 염세적인 세상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을 그리지만,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를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야스모토 노보루(가야마 유조)는 나가사키에서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입니다. 그는 막부의 의료원에서 의사 생활을 할 야심을 갖고 있는데, 아버지의 강권으로 하층민들이 진료를 받는 시골의 진료소에서 인턴 생활을 합니다. 붉은 수염이라 불리우는 이곳의 원장 니이데 쿄조(미후네 도시로)는 강건하고 불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환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합니다. 이 진료소를 벗어나려는 생각에 야스모토는 엉망으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야스모토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요약한 줄거리로만 본다면, 너무나 뻔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이 뻔한 이야기를 전인미답의 경지로 찍었습니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야스모토의 성장담입니다. 그는 이 진료소에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진정한 의사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야스모토는 여러 환자를 맡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종종 환자의 이야기로 빠져듭니다. 중구난방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는 야스모토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처음에 표면적으로 등장합니다. 성교 후 남자들을 죽여서 진료소에 갇힌 미친 여자, 12살의 나이에 유곽에서 손님을 받아야하는 어린 소녀 오토요, 진료소에 몰래 들어와 환자들 죽을 훔쳐가는 7살 꼬마 쵸보는 너무나 전형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왜 이런 삶을 살아가는지, 왜 이들이 경계를 풀지 않고 항상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안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을 너무 표면적으로 단정 짓고 산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이들은 의사들의 치료를 받을 뿐 아니라, 의사들(더 소급하자면 야스모토)의 비뚤어진 삶마저 치유합니다. 의사니까 병을 고치고, 환자니까 진료를 받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먼저 다가가고 서로 소통하면서, 인간들 사이를 둘러싼 오해의 껍질을 벗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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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이런 형이상학적 주제는 보통 인물들 간의 대화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위대한 점은, 절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진득하게 보여줍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온갖 영화적 기교를 동원해가며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감독의 진심을 느낍니다. 그것은 구로사와 감독이 영화를 보는 우리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교훈을 주는 영화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배움을 얻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배움에는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 영화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덧붙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인 미후네 도시로는 이 영화를 끝으로 구로사와 감독과 결별했으며, 20세기 폭스에서 제작한 진주만 공습 영화 <도라 도라 도라>는 미국의 베트남전과 일본의 반미감정으로 인해 취소됩니다(이 영화는 후에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과 후쿠사쿠 긴지 감독의 공동 연출로 제작됩니다). 심기일전하여 1970년 처음으로 칼라로 찍은 <도데스카덴(どですかでん)>은 처음으로 흥행 참패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자살미수... 이후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다시는 따뜻한 세상을 그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