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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처음 '오페라의 유령'을 접한 것은 다름 아닌 TV에서였다. 아마도 <주말의 명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페라 극장에서 벌어진 아주 기괴한 분위기의 스릴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 미국을 배경(응?)으로, 성악가 지망생 크리스틴이 오디션에 참가하는데 그 주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납치당한다는 이야기였다. 오페라와 살인이라는 흔치 않은 주제를 이토록 재미있게 버무린 것에 깜짝 놀라 그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목은 <오페라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게 아니라, 할리우드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보면 모르겠지만.
몇 년 후, 음반가게에서 독특한 재킷의 음반을 발견했다. 하얀 마스크에 빨간 장미가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성음사에서 발매한 <오페라의 유령> OST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타이틀을 보고 바로 몇 년 전에 TV에서 봤던 영화를 떠올리며, 이 음반이 그 영화의 OST인줄 알고 덜컥 사버렸다. 영화도 재미있었지만, 음악도 괜찮았었기에 천천히 감상할 요량이었다. 근데 이 음반이 바로 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바로 그 유명한 뮤지컬이었을 줄이야...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스피커를 꽉 채우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을 뒤흔드는 선율들. 정말 굉장했었다.
2002년 영국에 갔을 때, 그 살인적인 가격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티켓을 끊었다. 4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자리는 왼쪽 제일 꼭대기 층이었던가. 무대와 내가 앉은 곳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망원경이 필요할 지경이었다(좌석 앞에 50P를 내고 망원경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투덜거림도 뮤지컬이 시작되자 조용해졌다. 화려한 음악과 마술과도 같은 진행은 나도 모르게 3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줄은 알 수 없었지만,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를 (보는 입장에서는) 재미있게 비튼 미녀와 야수 이야기랄까? 암튼,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을 때, 일부러 보러 가지를 않았다. 그 때 받은 감동이 희석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2004년에 제작된 <오페라의 유령>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중학교 때 봤던 <오페라 유령>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페라의 유령>을 검색해보니, 관련 영화가 7편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다(TV영화나 모티프를 차용한 작품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목록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최근에 제작된 것이야 뮤지컬 때문이라고 쳐도, 1925년부터 1998년까지 6편이나 주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면, 원래의 이야기가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게 내가 가스통 루르의 원작을 들게 된 이유다(물론 동생이 샀던 책이 집에 있었기도 했지만).
간단하게 총평을 해보자면, 가스통 루르의 『오페라의 유령』 '지루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좋은 이야기부터.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진짜 유령 같이 신출귀몰하는 '오페라의 유령' 에릭은 그가 정말 사람인지 유령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크리스틴과 라울 백작, 그리고 에릭의 삼각관계는 충분히 애간장을 태우며, 오페라 극장의 지하의 묘사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지하세계 모리아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굉장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살인과 음모 그리고 주술과도 같은 미신의 맹신 등은 이 소설을 굉장히 특별하게 만든다.
이번엔 따끔한 이야기. 구슬은 서 말이나 있었는데 제대로 꿰질 못했다. 미스터리를 쌓아가는 과정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나 안일하다고나 할까. 독자와 머리싸움을 하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잔재미를 무시한 채 가스통 루르는 너무 쉽게 자신의 패를 드러냈다. 미스터리의 해결은 등장인물의 고백에서 설명되며, 정말로 궁금했던 초현실적인 미스터리는 그냥 두루 뭉실 지나친다. 게다가 절정부분은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시점이 바뀐다. 물론 소설이 '오페라의 유령' 사건에 대한 진술 모음집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런 시각이 존재할 수 있지만, 좀 뜨악하게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이 난삽한 이야기는 글로 장황한 설명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와 소리로 보는 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이 이야기는 영화와 뮤지컬로 다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책이 지루했던 다른 이유는, 번역의 고색창연함도 한몫했다. 성귀수 씨의 번역은, 원작의 문체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책으로 연극 대본을 만든다면, 배우들이 이 대사를 어떻게 육화시킬지 굉장히 궁금할 정도로, 좀 뜨악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원작의 배경이 보헤미안들이 예술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롭게 활동했던 시기인 것을 보면, 그 정도의 고색창연함은 감안해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뮤즈가 떠난 창작자의 최후는 어떨까? 그는 뮤즈의 도움으로 불멸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원할까 아니면 뮤즈의 사랑을 원할까? 『오페라의 유령』은 바로 이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읽는 이로서 감히 평가하자면, 소설로서의 매력은 떨어지지만,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출중한 작품이다. 이걸 '프랑스 소설의 어떤 경향'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