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마지막 날, 흔히 <서유쌍기>라 불리는 <서유기 월광보합>과 <서유기 선리기연>을 씨너스 이수에서 연달아 감상했습니다. 처음엔 이 영화를 극장에서 굳이 봐야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평균 2년에 한 번 꼴로 주기적으로 여러 번 감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시 스크린의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비록 여러 번 감상했지만,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저는 다시 한 번 손오공의 시간여행에 기꺼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두 편의 <서유기>가 15년이라는 세월을 견디는 동안, 웃음의 정서가 많이 휘발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재미있고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막힌 패러디와 인용의 연속이지만, 의외성에서 비롯되는 웃음(혹은 공포)은 익숙해지면, 더 이상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성치폐인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폐인이라면 모를까...)
대신 눈물의 정서는 15년의 세월을 견디었습니다. 두 편의 서유기가 지금까지 시간의 무게를 견딘 것은 <선리기연>의 멜로 정서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의 패러디(혹은 인용)로 소박하게 시작했으나, 결말부에서는 원본에서 느낀 감정의 진폭과 맞먹는(혹은 뛰어 넘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50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결국엔 엇갈리고 포기하는 애절한 사랑, 그리고 고전 『서유기』를 훼손하지 않는 영리한 구성 또한 이 영화를 견디게 한 이유입니다.
전 이 영화를 1997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에 골방에 틀어박혀 친구와 함께 봤습니다. <월광보합>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굴러대고 후속편인 <선리기연>을 보며 기어이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을 때, 전 이 영화가 감정의 진폭이 너무 크다고 느꼈습니다. 분명히 웃기는 장면이 넘쳐나는데, 저는 울고 있기 때문이죠. <선리기연> 같이 웃음과 눈물의 정서를 극단적으로 오간 작품은 나카시마 테즈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드라마로는 노도철 PD의 <소울메이트>가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정말 웃다 울다 정신 못 차리게 하죠. 단, <선리기연>과 차이가 있다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소울메이트>는 관객들이 웃음과 울음의 경계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반면, <선리기연>은 다소 모호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극장에서 <선리기연>을 보면서 놀랐던 점은, 이 영화를 끝까지 코미디로만 인정하려는 관객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 <선리기연>의 후반부는 애절함과 비통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일부 관객들은 그 장면조차도 코미디로 받아들였습니다. 잔혹한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장면에서조차도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주성치라는 배우를 코미디라는 장르에 머물게 하려는 팬들의 의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혹시 모르죠. 정말 새로운 관객이 도착했는지도.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은 컬트와 고전의 경계에 선 작품입니다. 15년 만의 개봉으로 우리는 이 영화가 소수의 숭배를 받는 컬트에서 벗어나 고전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솔직히 주성치의 영화를 보고 컬트니 고전이니, 웃음이니 눈물이니 하는 선긋기는 별 의미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우리를 위로해주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