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봄은 숨어 있던 운명의 모습들을 가차없이 드러내보이고, 거기에 마음이 부대끼는 사람들은 봄빛 속에서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이 춘수(春瘦)다. 

 

- 김훈 『자전거 여행』「꽃피는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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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4-18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 겠어요. 제가 좀전 보고 온 꽃이 매화였군요.

Seong 2010-04-19 08:23   좋아요 0 | URL
저도 꽃구경 좀 해야 하는데... 책으로만 꽃구경을 하고 있어요..
ㅠㅠ

L.SHIN 2010-04-1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 아! 눈물처럼 후드득이라니, 그렇다면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질까요?
상상을 하니 왠지 애달픕니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 며칠 전에 친구 따라 아침에 산을 갔다가 저 산수유를 보았습니다.
표현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말들을 그 꽃들 앞에서 읊으면 그야말로
풍월을 읊는 선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반해버렸습니다.(웃음)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 맞아요. 청초하게 도도하게 피었던 목련은 늘 끝이 이쁘지 않죠.
그러나 이 표현을 보고나자, 아- 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어찌 이렇게 표현력이 옛날 선비 같나 했더니 작가가 김훈이군요.
나는 그의 소설 [칼]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도 안 읽었는데. 이 책, 담고 맙니다.

Seong 2010-04-19 08:27   좋아요 0 | URL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목련이 떠올라서 이 책을 다시 열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땐 지난한 사유와 문체에 질려 정말 힘겹게 읽었는데, 이런 글이 쉽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계절을 타는 게 분명합니다. 가을보단 덜 하겠지만. ^.^;

L.SHIN 2010-04-19 09:00   좋아요 0 | URL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인데,
우리가 봄이나 가을을 타는 것은..
생명이 다시 피어오르는 봄에, 우리 인체의 세포들이 그 자연의 역동적인
흐름과 조화를 이루고 싶어 들썩들썩 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생명이 다시 조용히 땅으로 들어가는 가을에는, 우리 영혼이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갈 때의 그 서운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만의 깨달음은 늘, 예상치 못 했던 순간에 찾아오곤 하죠(웃음)
토메님 덕분입니다.^^

Seong 2010-04-19 11:43   좋아요 0 | URL
캬~ 우문현답입니다. ^.^;

카스피 2010-04-1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름다운 봄꽃들이네요.근데 올해 제가 본 봄꽃은 목련,개나리,벚꽃 뿐이더군요^^

Seong 2010-04-21 08: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정도 본 것 같아요. 아니, 더 많은 꽃을 본 것 같은데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이름 조차 모르고 스쳐지나간 사람들, 꽃들을 얼마일지 잠시 생각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