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하지만 아름다운, 기쁜 우리 젊은날
젊은날의 초상 (HD텔레시네) - [할인행사]
곽지균 감독, 이혜숙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0. 들어가며 

   곽지균 감독의 <젊은날의 초상>을 2010년에 본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개봉한 1991년에 보는 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이문열 작가의 원작소설은 1981년에 출간됐지만, 이야기의 시대는 (정확히 지칭하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해보면) 1960년대 말이다. 동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버린 시절을 회한에 차 이야기한다. 그에 반해 영화는 80년대를 이야기한다. 1991년은 80년대를 '추억'하기에는 너무 빨랐고, 아직 그 부채도 청산하지 못한 시기였다. 오히려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1. 소설  

   소설 『젊은날의 초상』은 총 3부로 나뉘어 있으며 소설은 주인공의 심적 상태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1부「하구(河口)」에서 '나'는 철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주변인물들을 관찰한다. 강진(江盡)이라는 지명처럼, 이곳은 낙동강 하류와 남해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강에 머무르지도 못하고 바다에 나아가지도 못하는 이도저도 못한 인생. '나'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하고, 검정고시와 대학입학은 그에게 하나의 목적이자 목표가 된다. 

   2부「우리 기쁜 젊은날」에서 '나'는 그토록 그리던 대학싱이 됐으나, 대학 역시 자신의 이상과 합치하지 못함을 느낀다. 문학에의 열정, 이성과의 연애, 치기어린 토론과 술자리 등 그 모든 것에 열정적으로 쏟아부었으나 내부에 자리잡은 허무함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문학서클에서의 제적과 혜연과의 이별, 같이 다니던 동기 김형(金兄)의 사고사와 과 학우들과의 '악의 서린' 논쟁으로 '나'는 학교를 떠난다. 학교는 내 신분을 높이는 도구였을 뿐이지, 내 허무를 채워줄 목표는 되지 않았다.

   3부「그 해 겨울」에서 '나'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 시골 객주집 방우(머슴) 생활을 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과 지내다가 '나'는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객주집을 나온다. 바다로 가는 도중 수상한 칼갈이 사내를 마주치지만, 별일 없이 지나간다. 우연히 먼 친척뻘되는 정님 누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하루밤을 지낸다. 추운 겨울, 동사할 뻔한 '나'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유언장을 쓴다. 그러다 다시 칼갈이 사내를 만나는데, 그는 누군가를 죽이러 바다에 간다고 했다. 바다에 도착하자 이 모든 방황은 내안에서 벌어지는 모순임을 깨닫고, '나'는 이 모든 방황을 멈추기로 결심한다. 내 옆에는 칼갈이 사내가 있었고, 사내 또한 복수를 포기하고 칼을 바다로 던진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늦겨울의 날씨는 풀리고 있었고, 곧 봄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는 '젊음'의 방황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영화 

   영화는 주인공 영훈(소설에서도 '영훈'이 주인공 이름이지만,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번 불리고 나머지는 '이형[李兄]'으로 불린다)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과정을 제외한 프롤로그를 제외하면(약 5분정도의 길이로 그 사이에 크레딧이 올라온다) 크게 4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영훈의 대학 시절을 그리고 있고, 2부는 영훈의 고향 먼친척의 장례식, 3부는 영훈의 객주집 방우 생활, 4부는 겨울 여행을 그리고 있다. 소설과 서사를 비교해보자면, 「우리 가쁜 젊은날」과 「그 해 겨울」부분만을 다루고 있다.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소설에서는 가볍게 지나갔던 여자들과의 관계를 영화에서는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80년대의 시대상황과 관찰자로만 머무는 영훈의 괴로움과 고뇌를 그리고 있다. 그의 고뇌와 방황은 현실도피처럼 보이지만, 곽지균 감독은 영훈의 방황을 '첫사랑에 대한 슬픔'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2-1. 대학 

   <대학>파트에서 영훈(정보석)은 동기인 하가(조재현)와 김형(이희도)과 늘 거의 같이 지낸다. 김형은 대학에 들어와서 짱돌을 들고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그의 부모가 그를 억지로 군대에 보낸 후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그의 부모는 그의 유학을 준비하고 약혼자까지 "미리 준비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기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주변인의 삶을 걷는다. 그에 반해 하가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와 영훈이 속해있는 문학 서클 또한, 투쟁과 민중에 귀속되어 있다. 영훈은 문학이 도구가 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 서클을 나온다. 어느날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영훈이 한 여학생에게 돈을 빌린다. 그녀의 이름은 혜연(옥소리)이고 영훈과 혜연은 서로 사귀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훈과 혜연은 서로 다른 계급과 가치관으로 서로 어긋나게 되고, 결국 헤어지고 만다. 삶의 허무를 견디지 못해 김 형은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시위에 앞장섰던 하가는 전경에 쫓기다가 김 형이 뛰어내린 그곳에서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말을 하고 떨어져 죽는다. 그일이 있고 학교엔 휴교령이 내렸고, 영훈은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간다. 

 

왼쪽부터 하가(조재현), 영훈(정보석), 김형(이희도). 소설에서 하가(河哥)와 김형은 주인공 '나'에 대해 별다른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 아니었으나, 영화에서는 큰 영향을 끼친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하가는 이상의 고민을, 김형은 현실의 고민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죽으면서 영훈은 더이상 학교에 있을 의미를 찾지 못한다. 

 

문학 써클에서 영훈이 탈퇴하는 이유는 소설과 거의 같다. 차이가 있다면, 소설에서는 개인적인 이유로 써클 회원들을 한껏 조롱하다가 쫓겨난 반면, 영화에서는 문학의 도구화에 반대하며 탈퇴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80년대 대학가 축제의 광경은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위 장면 오른쪽 앞부분에는 대학생들이 투쟁가를 부르고 있고, 그 뒤로는 축제에서 '퀸'으로 뽑힌 여학우들의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다. 낭만과 투쟁이 한데 어우러진 80년대 축제의 기이한 공존이다. 

 

학내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때, 영훈은 창문 안 프레임 안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는 아직 현실의 모순에 대항하지도, 자기 내부의 모순에 대항하지도 않고 어정쩡하게 지켜보고만 있다.

 

혜연과의 만남은 영훈에게 있어 숨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었으나, 그 공간은 도피처 이상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처럼 서로를 길들이기를 바랐으나, 영훈의 과도한 참견과 남자로써의 알량한 자존심은 그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결국 몇 번의 분탕질로 그들의 관계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들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 이상한 인서트 컷(플래시백)으로 인해 영훈과 혜연의 문제는 혹시 다른 여자때문이었는가 하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앞으로 시작되는 영훈의 방황은 80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대학생)이 가지는 이상과 현실의 고민이 아니라, 혹시 첫사랑에 대한 방황과 여정이 아닐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게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인서트 컷의 비밀은 <고향>파트에서 밝혀진다.

 

 

2-2. 고향 

   <고향>파트는 소설에 전혀 없는 부분이다. 이문열 작가의 자전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차용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대학>에서 뜬금없이 나왔던 인서트 컷과, 후에 <겨울 여행>에서 정님(이혜숙)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영훈은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서 이상한 사내(전인택)를 보지만, 곧 잊어버린다. 영훈은 고향의 먼 친척뻘되는(아마도 종가집으로 추정)분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는 그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따랐던 정님 누님(이혜숙)을 만난다. 영훈은 정님을 짝사랑했으나, 정님은 학교의 국어선생님과 사랑에 빠졌고 영훈은 국어 선생님을 증오한다. 그 후 정님은 혼전임신으로 종가집에서 쫓겨났으나,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중 어른들은 정님을 쫓아내려하고, 그 와중에 정님은 영훈을 보고 황급히 달아난다. 장례가 끝나고 영훈은 고향을 떠난다. 

 

눈 앞에서 영훈은 정님을 놓친다. 정님이 영훈을 보고 놀라 달아난 것을 보면, 이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나기』이후로 누구나 꿈꾸었던 비오는 날, 첫사랑과의 달콤한 한 때. 하지만, 영훈의 기억속에서 비는 정님과의 이별을 뜻하기도 한다. <대학>파트의 초반 인서트컷은 영훈이 정님을 잊지 못하고 계속 마음속에 묻어놓고 살아왔음을 설명한다. 

 

장례행렬의 깃발은 학내 투쟁의 깃발과 중첩된다. 영훈은 깃발을 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죽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장례는 김형과 하가의 죽음 또한 떠올리게 한다. 영훈은 그렇게 점점 허무주의에 빠진다. 

 

 

2-3. 객주집 

   이 부분은 소설 「그 해 겨울」에서 약 10여 페이지에 기술한 짧은 내용을 각색한 부분이다. 영화 전체로 따지자면 영훈의 개입이 가장 적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영화상으로는 가장 흥미롭고 에너제틱한 부분이다. 

   고향을 떠난 영훈은 객주집에 들어가 방우(머슴) 생활을 한다. 그곳에서 그는 '몸 팔고 술 따르는' 술집 여인들의 모습과 술을 마시러 오는 관료, 유지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영훈은 이곳에서 기차에서 봤던 이상한 사내를 다시 만난다. 그는 칼갈이(전인택)로 이곳 객주집에 잠시 들렀다. 영훈이 있는 마을은 댐이 건설될 예정으로 곧 수몰될 것이다. 그곳에 있는 여인들 중, 김양(방은진)과 윤양(배종옥)이 특히 영훈에게 관심을 보이나 영훈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어느날, 술자리에서 모욕적인 요구를 받은 윤양이 손님들과 싸움을 벌이자 영훈이 윤양을 도와준다. 윤양은 영훈에게 더욱 관심을 보이고 그날밤 같이 잠을 잔다. 그 이후로 영훈은 객주집을 떠나고 윤양이 영훈을 쫓아간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 칼갈이 사내를 만난다.

 

김양(방은진)과 윤양(배종옥)의 예사롭지 않은 등장. 택시 운전사가 기어를 변속하는 도중에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는 이유로 이들은 싸움을 벌인다. 이들이 지금껏 '야생 고양이'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장면이기도 하고, 부당한 일은 절대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윤양은 소설에서도 꽤 흥미로운 역할이었지만, 그 역할이 매우 축소되어 있어서 아쉽기 그지 없었다. 축소시킨 이유는 윤양의 이야기를 키우면 소설의 주제가 희석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고, 또 이문열 작가 스스로 여성을 심하게 '비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일관적으로 훓어보면 여성을 '무시'하는 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윤양을 '살아있는' 캐릭터로 그렸다. 그 역할이 너무 커져 때로는 좀 버거울 때도 있지만, 이 캐릭터를 생동감있게 그려낸 일등공신은 윤양을 연기한 배종옥 씨다. 그녀는 이 영화로 1991년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댐을 개발하는 관료와 지역 유지들이 술자리에서 술집 여인들에게 옷을 벗고 시중을 들라는 요구를 한다. 다들 머뭇거리고 있을 때 윤양이 나서서 이 부당함에 대해 저항한다. 그 중 점잖으신 면장나리가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한테 무슨 말버릇이냐"고 근엄하게 야단을 치자 윤양이 얘기한다. "아버지? 아버지 좋아하시네. 집에 가서 니들 딸년들 옷이나 벗기고 술이나 마셔!" 그 이후에 벌어지는 폭력에서 영훈이 들어와 윤양을 팬 관리를 잡는다. 그러자 윤양이 자신을 때린 관리를 노려보며 따귀를 때린다.  

이 장면은 학내 투쟁장면과 겹쳐진다. 하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투쟁이나, 술집에서 몸 파는 술집 작부의 투쟁이나 모두 기성세대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행동들이다. 그들의 투쟁은 모두 아버지 세대들에 대한 투쟁이다. 하가는 죽었지만, 윤양은 투쟁한다. 하가의 빈자리를 윤양이 채운다.

 

영훈이 꿈속에서 본 정님과 꿈에서 깨 현실에서 본 윤양. 영훈은 윤양과 자면서 자신의 첫사랑 정님이 (자신의) 학교 선생님과 자는 모습을 꿈꾼다. 윤양은 영훈을 사랑해서 그와 같이 자지만, 영훈은 아직 다른 여자를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후 영훈은 길을 떠난다. 

 

 

2-4. 겨울 여행 

   윤양과 영훈 그리고 칼갈이 사내(전인택)는 한동안 같이 걷는다. 그들은 칼갈이 사내의 소개로 근처 마을의 교회에 투숙한다. 그곳에서 영훈은 칼갈이 사내의 사연을 알게되고, 그가 자신의 조직을 배신한 사람을 죽이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밤 교회에 불이나고 윤양은 고아를 구한다. 갈림길에서 칼갈이 사내와 영훈은 헤어지고, 윤양은 교회에서 지내기로 한다. 그날밤 영훈은 빈 폐가에서 얼어죽을뻔 하지만, 영훈을 몰래 따라온 윤양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윤양은 영훈에게 "절대 죽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영훈은 한 마을에서 그토록 그리던 정님을 만난다. 정님은 영훈에게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란 말을 한다. 정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영훈은 눈밭을 헤메다 정신을 잃는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자 눈은 멎어있고 바다가 보인다. 영훈은 이제 이 모든 방황을 그만두고 돌아가리라 마음먹는다. 바다에 가니 칼갈이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는 복수를 포기했다고 하고 칼을 던진다. 영훈 또한 약을 던지고 서울로 올라간다.

 

한동안 영화는 이들 셋의 로드무비가 된다. '출옥수와 술집 작부와 동행'이라는 설정은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의 오마주로 보이기도 한다(꼭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설정은 영화에서 많이 봐 온 모습이기도 하다). 칼갈이 사내는 타의에 의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뺐겼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직을 밀고한자를 죽이러 가는 길이다. 그 역시 영훈과 같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잡은 미망을 없애기 위해 길을 걷는다. 대학에서 만났던 하가와 김형을 영훈은 길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들은 서로 제 갈길로 헤어진다. 윤양은 현실 세계에 남고 영훈과 칼갈이 사내는 자신의 미망을 없애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난다. 결국 김형과 영훈은 같은 고민을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바다로 가는 도중 영훈은 정님을 만난다. 소설에서 정님 역시 잠깐 스쳐지나는 인물이지만, '나'에게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치열한 정열"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소설에서는 정님의 남편은 도망간 것으로 나오고, 정님은 그를 잊지 못한다. 소설은 한창 내면적으로 피폐해진 '나'의 가학성으로 이 술자리를 잔인하게 밀어 부친다. 

          "누님 결혼하세요."
          "그럴까."
          "아이를 다섯만 낳으세요."
          "그럴까."
          "그리고 빨리 늙으세요."
          "그럴까."
          "그래서 때가 되면 죽으세요."
          "그럴까."
 

하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클라이맥스로 잡고 있다. 이 씬은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들어있다. 장점은 정님과 영훈의 만남으로 영훈이 지금껏 가지고 있던 모든 고뇌와 방황이 해결되는 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어 있던 정님과의 기억/추억을 해결함으로써 그의 내부에서 발생한 방황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단점은 지금까지 치열하게 끌고 온 외부 투쟁과 내부 투쟁의 고뇌를 멜로라는 공식으로 풀어버렸다는 점이다. 어쩌면 소설을 뛰어넘는 청춘의 혼란스런 방황과 갈등을 영화적으로 풀어낼 걸작이 나올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아쉬운 씬이다. 

 

영훈은 결국 바다에 도착하고 자신의 미망을 버린다. 칼갈이 사내 역시 복수를 포기하고 자신의 미망을 버린다. 이들은 그들의 고뇌와 고통과 번민이 그들 내부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3. 무리한 원작에 대한 예우

소설에서 한 에피소드를 차지하는 "금시계 사건"은 영화에서 짤막하게 보여진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없어도 상관없는 장면이어서, 원작과의 관계를 위해 예우 차원에서 넣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영훈, 하가, 김형과의 술자리 장면은 소설에서 <비용제> 에피소드를 차용한 것이다. 소설에서 프랑소와 비용의 시 「유언시」를 모티프로 해서 이들 셋은 맘에 들지 않는 상대들에게 유언시를 남긴다. 그리고 그런 비용을 위해 물건을 하나씩 훔쳐오기로 한다. 소설에서 '나'는  술을 훔쳐오려다 무리해 가겟집 주인에게 들키고 만다. 가겟집 주인은 대학생의 젊은 혈기라 생각하고 웃으면서 보내준다. 그들은 훔친 물건들을 다리 밑 거지들에게 주면서 "비용이 준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것이 비용제의 전말인데, 영화는 아무런 설명없이 물건을 훔쳐오고 "비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장면은 소설을 읽지 않으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영화상 굳이 필요한 장면도 아니다. 

 

 

4. 카메오 

영훈이 혜연과 헤어지는 계기를 만든 고급 자제분들의 파티장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장군의 아들>에서 갓 데뷔한 신현준 씨와 김승우 씨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영훈의 첫사랑 정님을 뺏아간 연적 국어 선생님 또한 <장군의 아들>에 출연한 이일재 씨가 맡았다.  

 

 

5. 방황의 끝  

   영화의 끝. 영훈은 서울로 올라간다. 방황을 끝낸 영훈은 어떻게 살아갈까? 현실 투쟁의 삶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이전처럼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사창가에 드나들며 '길들인' 여자친구를 사귀게 될까? 어떤 삶을 살더라도 그는 이제 방황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미망의 원인인 첫사랑과의 부채를 해결했으니까. 이 모든 방황의 근원이 결국 사랑이라니. 유치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게 '젊음' 아닌가?  

   어쩌면 이 영화는 개인 보다는 집단의 가치를 더 중시한 80년대를,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90년대의 시선으로 그린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너무 빨리 도착한 게 아닐까? 

 

 

 

6. 덧붙임 

   뜬금없지만, 하가(조재현)가 사창가에서 옷을 벗는 장면은 <나쁜 남자>의 한기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그가 포주를 연기할줄은 아마 그 자신도 몰랐겠지요. 

 

   짤방보이의 표정을 이 영화에서 딴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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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3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3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3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0-03-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끈 분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무척 새롭네요^^

Tomek 2010-03-05 09:2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젊음'이라는 시간을 봉인하기엔 영화라는 매체만큼 적절한 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