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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젊음'이란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회한의 시절이기도 할테고, 다른 누군가에겐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미성숙의 혼란한 시절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젊음이란 설익은 지식과 일천한 경험으로 사회를, 세상을 온몸으로 부딪혀 나가는 시기일 것이다. 그렇게 쉴새없이 부딪혀 나가며, 깨어지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세상에 맞추어 살아나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젊음'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만다.
돌이켜보면 '젊음'은 완전한 인간으로는 미성숙한 시기이지만, 그때의 열정과 치열함, 그리고 무모함은 이제는 더이상 젊지 않은 기성세대들에겐 다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이상향'의 그리움이 묻어있는 단어다. 이문열 작가의 『젊은날의 초상』은 이런 '젊은날'을 자신의 작법으로 그리고 있다.
책은 총 3편의 중,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개별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장편의 한 부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각각 따로 발표되었었는데, 「그 해 겨울」→「하구(河口)」→ 「우리 기쁜 젊은날」순이다. 아마도 작가는 각각의 개별적인 사안을 중시하는 단편의 모음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소설로 이 작품들이 기억되기를 바라서 장편으로 구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부 「하구(河口)」에서 '나'는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다. 2년여간의 방황생활에서, 이렇게 인생을 마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뿐인 혈육인 형에게 연락을 한다. '나'가 머무는 강진(江盡)은 글자 그대로 낙동강물과 남해안 바닷물이 만나는 이도 저도 아닌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만난다. 그들은 더이상 강에서 버틸수도, 바다로 나아갈 수도 없는 인생들이다. '나'는 이곳 사람들을 관찰하며,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회. 이번에 떨어지면, '나'는 군대에 가야하고, 아마도 '나'의 인생은 이곳 강진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머물러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대학이야말로,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자신의 처지를 격상시켜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나'는 그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나'는 미련없이 서울로 떠난다.
2부 「우리 기쁜 젊은날」에서 '나'는 (그렇게도 꿈에 그렸던) 대학생이다. 그러나 대학생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숨막힐듯한 학교 수업과, 끊임없는 가정교사 생활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생활속에서 동기인 김형(金兄)과 하가(河哥)를 만나 친한 친구사이가 된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다니며 말술을 마시고, 문학 서클에 가입하고 치열한 토론을 해나간다. 하지만 60년대 말의 시대상황은 그들을 낭만적으로 머물게 하지 못했다.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모든 것이 정치적인 분위기로 물들었으며, 그런 '나'는 대학 생활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서로 상충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괴로워한다. 힘든 시기에 '나'는 우연히 혜연이란 여학우를 만나는데,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나'의 가부장적인 태도(지나친 간섭과 여자에 대한 우월감)로 결국 헤어지고 만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김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는 학교를 떠난다.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을 그리고 있지만 제목은 역설적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혼란스러움 불안함을 '어설픈 지식'으로 채우고 허기를 달랬던 그 시절. 사랑의 달콤함도 겪지만, 서로 길들이기를 원해 결국 이별을 고하는 젊은 날의 사랑. 끔찍한 시절이지만, 돌이켜보면 상처는 흔적만 남고 그 흔적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젊은 날. 작가는 이 시기를 회한에 찬 시선으로 그렸다. 술자리에서 프랑스와 비용의 유언시를 읊으며 '비용제'를 치르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대학은,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기는 했으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의문점은 해결하지 못했다. 대학은 도구로써 기능할 뿐, 목적이자 목표는 되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구도자같은 생활을 시작한다.
3부 「그 해 겨울」은 '나'의 구도자 생활을 그린다. '나'는 시골 객주집에서 방우(머슴)생활을 한다. 객주집에서 '나'는 술집 아가씨들의 생활을 보다 바다로 가기로 결심한다. 바다로 가는 도중, 수상해보이는 칼갈이 사내를 만나지만 그냥 지나친다. 우연히 먼 친척뻘되는 정님 누님을 만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후 길을 가다 죽을고비를 넘기고 '나'는 유언장을 쓴다. 바다로 가는 길은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는 것으로 바뀐다. 바다로 가는 길, 우연히 전에 마주쳤던 칼갈이 사내를 만난다. 칼갈이 사내는 누군가를 죽이러 간다고 했다. 바다에 도착하자 이 모든 방황의 근원이 내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나'는 이제 이 모든 방황을 끝내고 다시 돌아가자는 다짐을 한다. 내 옆에는 칼갈이 사내가 있었고, 사내 또한 복수를 포기하고 칼을 바다로 던진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늦겨울의 날씨는 풀리고 있었고, 곧 봄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3부에서는 '절망의 끝'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허무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해 점점 가학적이 되어가는 자신. 육체의 고통으로 자신 내부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얼핏 보면 구도자적인 숭고함을 떠올리지만, 한편으로는 '젊은날의 치기'로 보여진다. 하지만,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라고 얘기한, 정님의 말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이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해 겨울, 그 바다에서 '절망의 끝'을 봤다. 부정과 부정으로 끝까지 밀고 들어간 그 사유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그 해 겨울, 그 바닷가에서, '나'는 방황을 멈춘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만, '내'가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지, 다른 길을 걸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걸을 길은 더 이상 춥지 않은 따스한 봄날일 것이고, 다시는 '젊음'의 방황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젊은 날은 늦겨울의 추위와 함께 물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