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010년 1월 1주 !
겨울에 내리는 눈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겨울의 눈은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게도 하고, 유년시절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얀 눈은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고 속죄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길 그렇게 바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도 어느정도 '귀엽게' 내렸을 때 얘기다. 지난 1월 4일 월요일에 내린 눈은 귀엽기는 커녕 난생 처음으로 '고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쏟아내렸다. 서울에 살면서 눈때문에 고립감을 느낀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낭만과 서정도 지나치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쏟아진 눈 때문에 이웃끼리 주먹다짐을 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아마도 자연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을 같은 무력한 인간에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낭만이 아닌 광기로 가득한 눈, 아니 폭설을 다룬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The Shining)』이다. 동절기면 문을 닫는 오버룩 호텔의 관리인으로 취직한 잭이 폭설과 호텔과 관련한 초자연현상으로 서서히 미쳐 가족들을 죽이려하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의 동명소설이 원작이지만, 잭 니콜슨의 광기와도 같은 연기와 등장인물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따라다니는 듯한 카메라, 새하얀 설경의 이미지로 원작소설을 잡아먹은 괴물같은 영화다.(사족이지만, 'REDRUM'과 '해살'의 어감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황금가지의 '해살'번역은 번역과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한 절망스런 '사건'이었다) 궁전과도 같이 큰 호텔안에서 느껴지는 폐쇄공포증은 무시무시하며, 마지막 아들 대니와 아버지 잭이 벌이는 눈밭 미로에서의 추격전은 소름을 돋게 만든다. 창백한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눈은 마치 살인자의 칼날처럼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샤이닝』에서 눈은 광기의 눈이다.
눈하면 또 북반구를 빼놓을 수 없다. 흠뻑 쌓인 눈에 겨울이면 2개월씩 밤이 지속되는 곳을 영화가 가만 놔두었을리 없다. 알래스카에서 벌어지는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30 Days of Night)』,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프로스트바이텐(Frostbitten)』과 『렛미인(Låt den rätte komma in)』이 있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프로스트바이텐』을 꼽겠다. 다른 두 영화는 지나치게 심각한 반면, 『프로스트바이텐』은 공포와 코미디가 오가는 정말 '골때리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944년 동부전선, 독일군에 쫓기던 한 무리가 숲속의 어느 집에 숨게 되는데 그곳에서 뱀파이어에게 당하고 만다. 그리고 현재, 그 중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한명이 병원에서 실험을 하게 되고 그 실험의 산물인 알약이 아이들에게 유통되면서 조용한 마을은 뱀파이어의 습격을 받게 된다.
솔직히 영화는 좀 어설픈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불안한 10대가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불안한 10대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오직 본성만으로 질주하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한가!!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해 허둥대는 10대 뱀파이어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귀엽다. 피보다 술과 마약을 더 탐닉하는 뱀파이어도, 절대절명의 순간에 농담을 건네는 뱀파이어들의 모습도 신선하다. 이 영화의 10대 뱀파이어들은 욕망을 따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10대건 어른이건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이들은 작은 마을을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눈덮인 하얀 설원에 불타는 마을. 그리고 그 위에 휘영청 떠있는 달. 술과 마약에 취한 뱀파이어가 말한다. "밤은 길어. 이제부터 두달간 밤이라고!" 낭만적인 북구의 설원과 밤은 악귀들이 날뛰는 지옥으로 변한다.
하지만 진짜 눈이라면 남극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남극에서 벌어지는 자멸극에 대한 이야기는 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과 임필성의 『남극일기』가 있다. 완성도로 따지자면 『괴물』이 더 낫지만, 이야기로는 『남극일기』가 더 끌린다. 『괴물』이 눈에 보이는 '괴물'을 상대한다면, 『남극일기』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과의 망령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하 80도의 혹한, 낮과 밤이 6개월씩 지속되는 남극. 탐험대장 최도형(송강호)을 비롯한 6명의 탐험대원은 '도달불능점' 정복에 나선다. 그 와중에 막내 민재(유지태)가 80년전 영국탐험대의 「남극일기」를 발견하고 대원들은 점점 이상한 상황에 맞닥드리게 되고 하나 둘씩 남극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거리감을 느낄 수 없는 새하얀 설원과 크레바스, 블리자드 등 자연재해가 발생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서서히 미쳐버린다. 걸어서 도착할 수 없다는 '도달불능점' 정복이라는 목표는, 도형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으나, 결국엔 피로 물든 '고해성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도달불능점을 통과하고 어딘가로 계속 행군하는 도형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걷는 것 같다. 순백의 설원은 너무나 투명해서 그곳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죄가 비칠 정도이다. 눈을 바라보는 것과 직접 걷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
가능하면 개봉 영화를 찾아보려 했으나, 신년 주초에 있었던 '눈사태'와 관련한 영화를 찾다보니 모두 구작이 되었다. 그저 다음주에도 '눈사태'와 관련한 영화를 뒤적거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임
1. 『닥터 지바고』를 뺀 것은 정말 아쉬웠지만, 이 테마엔 도저히 넣을 수 없겠죠...
2. 눈을 보고 광기만 생각하니 너무 살벌한 것 같군요. 노컷뉴스에서는 「'폭설 연가' - 시인 10명의 폭설/눈 예찬」기사를 실었습니다. 아직 읽지 못하셨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