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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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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들만의 진실이다. 지겹도록 가정하고, 의심하고, 분열하고, 구애하고, 의존하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어도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방식이란게 있다.

멀리 달려가는 기차를 보고 있으면 마치 고향길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의 마음처럼 서정적이고 풍요로운 배경이 선사될 것이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그 고요한 그림을, 정적을, 정서를 사랑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바로 옆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실은 몸을 휘청이게 할 만큼의 위협적이고 형체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속도감으로 눈을 질끈 감게 되는게 가까운 그것의 실체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시대를, 그 삶을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것, 가까이 겪어내는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다.
이 책은 식민지땅의 억압과 모순과, 혼란을 멀리 불길을 응시하는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그것이 우리의 사색적인 성향의 기원이 될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방식과 사고로 그들의 격렬한 불길과 소용돌이가 있는 그 밖의 세상을 상상한다. 여기 이들이 이질적이고 설사 미쳐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냥 그대로를 지켜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런 식으로 멀리 보는 우리에게 너무 아름다운 불길의 배경을 선사해주고 또 사색할 수 있는 고요함을 주기 때문이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소설이긴 하지만 시처럼의 분위기를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녀의 언어는 내내 짧은 편린의 조각들처럼 붕붕 떠다닌다. 주인공인 마그다의 조각난 생각의 반영인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딴지를 걸고 의심하고 가정하는 인물이다.
평소에 과거를 가정하는 일처럼 할 일 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안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어쩌면 의식 밖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를 이런 식으로도 풀지 않으면 도저히 불안을 잠식시킬 수 없는 게 아닐까? 가정은 반성을 돕고, 비전에 대한 계획도 세우게 하는 인간의 과제처럼 의미롭기도 하다. 이러면서 내면의 고요함을 되찾게 된다면야.
변화의 욕망이란 건 어차피 사그라질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진보의 역사도 이로부터 출발함을 인정하듯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마그다가 하는 짓이라고는 매일 과거를 가정하는 일 뿐이지만 고립된 마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일로 서서히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축복의 씨앗이 되지 못한 죄, 부모에 대한 원죄,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죄, 아름답지 못한 죄, 나이 많은 죄, 위엄있는 상전이 되지 못한 죄 모든 현실이 그녀를 억누르고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 속을 헤엄치게 되고 일시적으로 바꾸어 놓거나 아니면 더 엉망으로 만든 악동이 되고 만다. 어차피 그녀는 세상속으로 과감히 뛰어들 행위를 알지 못하고 처지를 인정하고 있다. 우주 속 소리의 여울 뿐으로 신음하는 가여운 껍데기임을 숙명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정과 착각의 말은 그녀만의 특권의 역사다. 다시말하면 그녀가 하는 말이 사실이든 가정이든 착각이든 상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확실하고 내밀한 준거들을 발견해야 그 책을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만으로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게 태어났다. 모호함의 그대로도 좋은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성분을 이해하려면 멀리서 바라 볼 것, 마그다의 특기인 착각의 작동을 켜놓고 응시할 것. 그러면 이 여자의 답답한 행동과 분열된 심경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녀라는 성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부재에 의해 만들어 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부재하고 어둡고 먼 실재라고 믿는다. 특히 아버지는 그녀에게 부재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녀 삶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바람을 가르는 칼날이나 탑으로 묘사하고 본인은 구멍으로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아버지에대한 심각한 집착을 말해준다.
구멍은 완전해질 수 없는 영원한 공허의 상징이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버지만이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새삼 오이디푸스컴플렉스로 환원해 보는 일은 안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그 허공의 욕망을 그 무엇으로도 채우고 싶은 심경이라고 믿어 두고 싶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는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버지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미 구멍을 통해 모든 세상을 본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녀가 미래의 목구멍 속에 '그 다음은 뭐지?'라는 암호를 넣고 용감히 돌진하는 건지도 모른다. 미련없이, 아무도 채워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제거하고, 채우고, 또다시 비우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영원한 삶의 원리임을 아는 듯이 말이다. 이 고백은 그래서 그녀의 생이 위대한 목격자로서 완성된 삶을 살고자 했음을 알게 해준다.  


재미난것은 책의 여기 저기서 구멍, 열쇠구멍, 목구멍, 방, 땅 속의 구멍 등 많은 부재의 공간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마그다에게 구멍은 그녀만의 요람인 동시에 두 번째 집이며, 회귀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놀이터고, 태초로의 회복이며, 도피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녀의 살인은 아버지를 구멍에 메우고서야 얻게 된 그녀만의 혁명이다. 아버지에 대한 보복으로도, 헨드릭이란 남자에게서 일말의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된 걸 알게 된 이후로도 그녀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낀다. 같은 여자인 클라인 안나에게서 애정을 느낀다거나 하는 몸부림은 그래서 더 슬퍼 보인다. 이는 성적인 욕망이 아니다. 공허에 존재에 대한 또하나의 발견이며, 동질감이며, 위안이다. 안나에게서 그녀는 두 개의 구멍을 보고, 두 개의 공허를 느끼고 비로소 이 관계만이 이상적이고 희망적이란 걸 깨닫는다.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채우는 일이 아닌 그 구멍 속을 향해 돌진하는 바로 그 행위 자체인 것이다.
현실은 그녀에게서 모두 달아나 버리지만 마그다는 당당히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했음을 자랑스러워 하고 세상에 외쳐댄다. 그리고 너무 쉬워서 말하기도 민망한 지긋지긋한 버려진 땅의 이야기들을 돌아 보며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별의 심장부로 떠나는 마그다의 그 길고 차가운 여행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다. 물론 멀리서, 바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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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르클레지오 선생님이 이화여대 기숙사에서 쓰셨다는 소설이 바로 <허기의 간주곡>이다. 어느 강연회에서 뵈었을때 한국만의 정서인'情 과 恨'에 대한 언급을 하신게 인상적이었는데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아픔과 성장,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소설이 참 잘써졌더라는 소리는 아마 우리네 정서에 매료되고 또 깊이 공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에서 들려오는 작은 노래가 듣고 싶어 진다.   

 

 

  

  

전위적 작가로 유명한 조르쥬페렉의 소설이다. 임금 인상 요청과정에서 벌어질 갖가지 상상을 마침문장 없이 길게 풀어쓴(역시 언어유희의 대가 다운) 실험정신을 가감없이 펼쳐 보이는 모양이다. <인생사용법>에서 보여준 놀라운 상상의 나래가 이 소설에서 어떤 화려한 작법으로 선보여질지 기대된다.  

  

 

  

 

 

이 책이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 이유 말고 더욱 이목을 끄는 건 가장 웃기는 책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괴짜 주인공이 자본주의체제에서 겪는 좌충우돌 모험담을 그려내고 있다는데 존케네디툴의 빛나는 코믹 걸작의 세계로 풍덩 빠져들고 싶어진다.  

 

 

 

 

 13년 전의 소설을 새로 다시 쓴 이색적인 소설이다. 옛 소설을 새롭게 써본다는 것은 작가라면 한번쯤 꿈꿔봄직한 일일 것이다. 예전의 길을 다시 떠올리고 그 길에 오르고 다른 꿈을 꾸는 것, 생각만해도 모방충동이 인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길 위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뒤를 쫓고 싶어진다.  

 

 

    

  

"장중한 세월의 깊이와 화려한 몰락! 슬프고도 낭만적인 비극의 결말"이란 문구 안에 중국의 80년대 시대상과 개인의 열망, 사랑 모든게 다 담겨있는 듯 하다. 작가는 한국인들이 중국의 80년대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써놓았지만 우리네 역사도 지극히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때이니 왜 모른다 하겠는가. 길 위의 시대, 진한 감동의 도가니에 빠뜨려 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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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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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건 크게 삼아진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사실은 반복의 역사라는 것이 놀라울 것 없는 명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진화하고 발전된 세상이 도래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삼십년 주기로 찾아오는 유행만큼이나 시시하고 비등비등하게 굴러가는게 인생사 이치인가 싶기도 하다. 다시 반복되는 감회에 젖기라도 하면 그냥 암묵적인 약속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구 안의 그저 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나를 돌아보면 그만 일것 같다. 많은 반복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특히 권력과 부의 줄다리기 싸움을 지켜보기란 참으로 고되고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하고 언제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어 굴어가는 싸움이지만 우리는 미해결의 창고에 계속 적재 하는 부채자의 심정이다. 권력의 반대에 선 자는 단지 없는 자라서 잘못된 시스템 때문이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권력의 노예로 속아 주는 슬랩스틱 바보역에 열연을 도맡아야만 한다. 언제까지 그들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삽질을 계속 해야만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세상이 생각보다 참 변화하기를 싫어하는구나 싶어진다. 아니 변화를 두려워 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이렇게 더디기만 반복되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다이아나 진주목걸이는 커녕 설거지통에서 세젯물과 씨름해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들으면 희망이고 뭐고 참 암담한 현실이고 미래다. 이게 다 인간의 야욕, 그 차고 넘치는 욕심 때문 아니던가. 한 번 쥐면 놓치고 싶지 않아지고, 왠만큼 쌓고 나면 또 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준거들을 찾게 되는게 인간이다. 문제는 이를 외적 치장에 좌우된다고 보는 걸텐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일수록 강하게 드러나는 법이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반토흐나 본디나 이 천박한 기호에 그야말로 꽂힌 군상들로 등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고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추악한 냄새나 풍기며 사태는 생각지 못한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와 물질로 재단되는 사회, 어떻게든 돈만 벌면 성공한 사회로 치부되는 사상의 부재, 여기서는 ‘진주’라는 기호의 버러지들이 우글대기 시작하면서 생각지 못한 도롱뇽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더한 문제는 이 고급 기호를 둘러싼 생산 자체가 권력화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비하는 대중의 코드가 점점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를 증명해내고 싶어하다보니 자연히 사회적 코드가 혼선으로 위협되고 온갖 열패감으로 뒤돌아 볼 겨를없이 상실하게 된 것이다. 
허영은 더 큰 허영을 부르고 그 뒤에 생산자였던 도롱뇽들과의 괴리는 그만큼 더 벌어지게 된다. 이 급격한 격차가 인간의 또다른 형상을 하는 도롱뇽의 권력의지를 키우게 된 원인이다. 그러면서 서로 자신을 순결한 희생양인냥 착각하는 경박함은 추락의 끝을 모르고 밑천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싸움을 닮았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볼 줄 모르면 대중과 권력을 쥔 층위간의 긴 갈등은 언제까지나 한쪽의 일방적인 상처로 휘둘려 지게 마련이다. 대중 각자가 이런 치사한 외적 요건들에 휘둘리지 않고 단단한 개인들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이 너절한 기호 놀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의 도롱뇽은 수줍음을 알고 제 분수에 맞는 충실한 손을 가진 사랑스런 동물이었다. 인간의 자본과 욕망이 쥐어 준 도구로 인해 이들의 사상은 급격히 진화하고 또 변질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더이상 도롱뇽의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전염된 좀비와 같다. 그들은 성가신 존재들로 전락하게되고 위협적이며 막강한 권력의 또다른 적이 되고 만다. 도구로 표상되는 이미지는 여기서 칼이다. 날카롭고 예리한 기술을 갖게 되자 겉잡을 수 없이 발전이란 걸 해내고 권력의 불가항력이 되어 버린다. 대체 이들의 손에 무슨 짓을 한건가? 
이렇다 보니 뒷통수치는 도롱뇽의 행태에도 배신감 보다는 씁쓸한 죄책감이 앞서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일개 도롱뇽이 자기의 동물적 신념(?)을 버리고 과감히 인간이 좋아할 만한 권력을 모방하게 되었는데, 왜 인간은 도리여 배울 만큼 배워준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는 이 단순함마저 제대로 대처해내지 못하는가? 인간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걸까?  
새삼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거울 속 자신도 못알아 볼만큼 얕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일처럼 이 똑같은 도롱뇽의 재스춰조차 인간은 감당해 내지 못하고 어쩌면 그들의 지배라도 받을 기세처럼 나약함을 드러냈다. 이를 조금 비틀어서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고 비유해본다면, 한쪽은 일방적인 성장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당황해서 삶의 원칙들마저 무너뜨리며 휘둘려 지친 모습은 보기 딱하더라도 한편으로 인과응보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도 싶어진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 제 각자 본연의 길이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질서를 존중하면서 키워나갈 것, 이 기본 토대를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에게 과거나 지금이나 행복의 능력이란 딱히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건 인류가 다같이 행복해질 능력 같은건 없을지 모르지만 개별적 인간에게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질서라 부르는 틀에서 엉터리 군중에 섞여 억지로 함께 하는 한 우리는 불행할 것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조금이나마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건 각자의 길에서 같이 걸어갈 상대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는 자유일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이상, 좀 더 많은 부를 거머 쥐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반드시 같이 걸어갈 상대의 손을 잡고 한계단 한계단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어느쪽이 양보해야 할지를 아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본주의가 종말하는 그날까지 아마도 이 지겨운 행진은 또는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 그래서 도롱뇽을 그림자처럼 옆에두고 항상 경계하며 희망 반 걱정 반으로 살아가는게 우리 각자의 몫이고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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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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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나고 자라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잎사귀하나 깻잎인지 시금치인지 구별해내지 못하는 무지함은 생각해보면 얼마나 딱한 일인가. 허물어져 새 빌딩이 들어선 고향 터 대신, 발길이 뜸할 것 같은 고갯마루를 한참이나 올라가 서서 나무와 바위 하나에도 신성한 전설이 살아있는 내 고향땅 바로 그런 곳이 어딘가에는 정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참 이 소설을 읽다보니 매일 먹는 쌀과 보리의 모양새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삶은 삭막하다 못해 울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요로운 전원의 땅, 사람이라면 응당 이런 곳에서 나고 자라는게 맞지 싶어지며 황금색로 물든 곡식의 목처럼 한없이 고개가 숙여지고 만다. 맨발로 흙을 디디고, 밭을 일구고, 열매를 따고, 가축을 길러내고, 자연을 보고 자란다는 것, 이는 분명 인간이 꼭 누려야할 자산이며 사명처럼 보인다. 냄새를 맡고, 보고, 먹고, 느끼는 시간들을 누리지 못하면 당연히 자연의 소중함을 모르거나 미약하게 갖게 되고 이는 인생의 가장 큰 맛을 모르고 보내는 일처럼 허망해 보인다. 그렇기에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시골의 풍경과 이야기가 더없이 소중하게, 마치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유심히 그리고 수선을 떨어가며 지켜볼 일이다. 추억이 없는 이들에게 <토마토 랩소디>는 생생하고 흥미로운 시골 생활이 어떤지, 그 묘미를 마음껏 맛보게 해준다.

<토마토 랩소디>는 입체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구성의 오케스트라다. 평범해 보이는 시골마을과 그곳의 순진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이야기. 이 외에 반전은 없다. 완벽한 플롯과 응집되는 폭발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다만, 이 소설의 이야기에는 저마다 깊고 유려한 역사가 존재한다. 개성있는 성격의 캐릭터가 인상적인 배경을 펼쳐 보이고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함이 오히려 돋보이는 소소한 개성을 말한다. 자신의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통해서 가늠하는 정도이지만 작가가 얼마나 개인사에 공을 들였는지 그 장엄한 역사성에 놀랍기만 하다. 개인사든 그들이 살아온 시대든 이런 이야기가 한데 모여 소설의 깊이감을 더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인물이 주는 묘미는 독자로 하여금 그 시대와, 그들의 지난 역사, 인생사를 모두 맛보게 해주는 넉넉한 인심이 참 기분 좋은 맛이다.
 
전체적인 스토리만 봐도 거대한 사건을 부여해서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은 왜 이 소설이 안정적인 흐름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만약 이 마을에 거대한 일이 벌어졌다면 분위기는 오히려 풍자와 익살스러움을 포기한 어중간한 이야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게도 주변에 흔히 일어날만한 설정들 즉, 중심과 주변의 갈등이라던가, 문화적 충돌, 인종(?)갈등, 로맨스, 치정, 욕망 등 다양하게 존재할만한 인생사 갈등들이 각각의 인물들에 의해 잘 버무려진다는 점은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과 이야기들이지만 오히려 맛있는 코스 요리가 하나씩 꺼내지는 구성은 전체적으로 안정된 입체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전체적인 인상을 선택하는 대신, 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은 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어느 한 인물만을 전면으로 내세운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더라도 전체 요리의 맛은 아주 일품이다.

이 소설이 선사하는 또 다른 묘미라면 희극과 비극을 버무려 놓은듯한 연극적인 요소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는 가장 핵심적인 인상을 부여해주는 재미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몇 백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정통적인 숭고함을 느끼게도 해주고, 신화적인 요소들이나, 마법, 모험담 등은 놀라우리만치 개연성과 섬세한 이야기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연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무대 중심에서 연기하는 배우에게 익살과 풍자의 시선을 과감하게 던지는 아우라를 형성해준다. 고전적인 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설정이다. 
또한 중간중간마다 독자에게 전하는 말따위를 섞어서 무대 위의 배우들과 거리감을 두어 가까이서 지켜보게 하는 장치는 새롭고 현대적이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에서는 상당히 치밀하고 현대적 감각의 묘사가 돋보여서 옛스러움과 현재의 강점을 아우르는 힘을 느낄수가 있게 된다.

<토마토 랩소디>는 무엇보다 감각의 발현이 충만히 빛난다는 점이 놀랍다. 토마토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가 만들어낸 이 엄청난 상상력의 뿌리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은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다. 토마토를 싣고 미지의 영토로 향했던 논노의 여정처럼 이야기가 전해주는 나래는 그들이 사는 풍경만큼이나 끝을 알 수 없게 넓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작가는 거의 모든 문장에서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며, 후각적인 원초적 감각들을 일으켜 세운다. 요리를 묘사하는 장면이라던지 인물의 생김을 묘사하는 장면, 전원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장면 등에서 그 능력은 정말 탁월하게 빛난다. 여기서 표현되는 말처럼 온몸의 감각이 일어나고 깨어나며 고양되는 그런 느낌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다. 또한 토마토가 주는 색감의 느낌처럼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본능적이고 섹슈얼한 감각은 마침내 소스가 되어 사람들의 입맛에 쾌락을 던져주는 일만큼이나 농축된 감각의 여정을 잘 표현한다. 빛과 맛, 햇볕과 토마토나 올리브가 빚어낸 이 시골마을의 한바탕의 꿈은 끊임없이 순환할 자연의 생리처럼 고요하지만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감각의 요람이다. 욕망의 덩어리 사랑과 애증의 덩어리 증오와 어리석음의 덩어리 그것의 열매는 정말이지 붉고 아름답다.   

결국 젊은이들은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고 악인은 벌을 받고, 우둔해 오해를 일삼던 대중은 그것을 바로 잡을 수있게 된다. 시골마을의 짓궂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상적으로 아름답운 빛깔로 행복을 전해준다. 이들의 오해의 역사와 화해가 담긴 따끈한 피자의 맛, 모든 감각들이 일어나 춤을 추는 이 아름다운 땅에서 붉은 즙이 만들어낸 그 융합의 맛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싶어진다. 온 몸의 감각들이 일어설만한 그 붉은 맛 붉은 바이러스의 위력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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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김훈 작가를 강연회를 통해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사랑' 이라는 말에 유난히 손사래 치시던 일이 유쾌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런 그가 다음엔 '사랑'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고 말했을때 의아했고 기대감으로 벅차 올랐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아이같은 감성의 그가 쑥스러움을 누르고 전면으로 도전한 이야기이다. '사랑'이란 말을 한번도 꺼내지 않지만 전해지는 것으로 그 여운이 충분히 전해진다고 들었다.    
'김훈' 하면 그만의 개성있는 문체 즉,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번 소설에서 가장 빛나지 않을까 싶다. 눈이 시리도록 들여다봤다는 그만의 세상 풍경을 같이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집요한 시선으로 인간 내면의 심리 세계를 파헤치는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이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 꿈의 노벨레를 쓴 작가라고 하니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펼쳐가는지 가늠해 볼만 하다.  

  

 

 

  

 

번역을 하신 김연수씨 때문에 알게 된 소설이다. 세상에서 가장 절제하는 삶을 택한 수도자의 순탄한 행보가 아닌 타락과 욕망에 젖어 신앙적 고민에 부딪히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참한 행복이라는 단어에서 암시되듯이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정치적 신앙적 고뇌를 견뎌내는 순교자의 삶이라니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다.  

 

 

 

 

 

루브르박문관에서 그림을 보고 나온 저자가 큰 감흥을 느끼고 평생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동기를 보니 마음이 풋풋해진다. 너무 좋은 그림을 만난 순간에 그 시대를 상상하고 상황을 상상하고 미래를 상상해 보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유쾌한 일이다. 평생 그림 공부에 매진하며 소설로 일궈낸 그림 속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진다.        

  

 

  

 

언제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박민규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소설이야기에 덧붙여 일러스트와 이와 얽힌 이야기들이 구경거리라고 한다. 엉뚱하고 독특한 시선의 박민규만의 상상과 현실의 세계가 또 어떤 로켓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는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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