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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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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제대로 읽는 방법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는 안목일터다. 여기서 보이지 않음이란 베일 속의 인물이거나 거대한 조직이거나 하는 막강한 힘을 발견해 내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안개에 드리운 한밤의 기운처럼 작가가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은 음산한 키를 찾는 일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대의 역사적 불운일 수도, 개인에 닥친 불가항력의 운명일수도 있는 어두운 이면의 암호를 푸는 일이다. 보다 근원의 자극을 감지하고 자각하는 힘, 그것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있다. 이 소설은 판타지 요소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러한 복잡한 설계에 의해 동시대의 삶의 맥락 차원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절대적인 공감을 이끌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여지의 과정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라지만 이를 잘 포착해내는 일 또한 묘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랜 세월 참고 인내한 악마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입김의 여운이 차갑게 각인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가끔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기대치’라는 장애물에 전면적 제동이 걸리게 되는 건 참으로 아쉽다. 어마어마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의 워밍업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정작 사연이 밝혀졌을 때의 충격은 그리 신선하지도 못하고 진부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큰 반전과 같은 보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더라면 하는 바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성공할 확률이 낮은 지경까지 왔다면 반전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예감대로의 스토리가 나왔어도 그 전개방식이 세련되기만 했더라면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큰 이야기의 흐름을 쫓다 보니 작은 요소들의 반응에 숙고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드러난다. 전체적인 역사를 구성하고 어느 지점에서 폭발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부족했거나 혹은 적절하지 못한 탓이다. 판타지라는 긴 호흡을 전개해 나가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가 돋보이지는 않은 오류는 결국 허상의 문턱에서 간신히 모면을 한 정도이다.
만약 8명의 아이들이 보다 디테일한 성격묘사로 어필되었다면 소소한 말투에서부터 그 개성이 드러났어야 했고, 서사에 중점을 두고 싶었다면 선이 굵은 지적인 전개를 펼쳐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회화적인 이미지뿐인 소설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인물들은 그들의 언행에서 자연스럽게 가공되기보다 애초에 ‘용감한’ ‘영리한’이라는 수식어로써 드러내는 촌스러운 방식을 구현했다. 특히 할머니가 과거를 한꺼번에 고백해내는 장면은 황당할 정도로 엉성하다. 서사 역시도 한권의 소설 안에 모두 담아내기에 그 역사와 배경이 부실하게만 펼쳐지고, ‘불’이 상징하는 지옥불이나 레드의 색감과 이미지들은 그리 인상적인 대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난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읽어 낼 때 어느 정도 예감에 적중하거나 빗나가는 것을 큰 문제로 삼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그것을 구현해 내는 서사의 장중함이나 아주 사소하더라도 뭔가 지적인 자극을 주는 편을 훨씬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이를 간과하고 마치 개벽과도 같은 엄청난 반전만을 향해 달려갈 때 자칫 그 흐름이 망쳐질 수가 있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이런 것이 있겠다.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지는 몇몇의 상흔들이 그것이다. 이는 작가가 제대로 구축했지만 우리에게 실패로 읽혀진 인물의 묘사 방식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영웅의 존재이다. 미약한 성격 탓에 처음에는 비범성을 모르겠다가도 주위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의 잠재된 힘이 폭발적으로 보태지면서 종국에는 영웅이 됐더라하는 전형적인 영웅담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주인공 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 속 영웅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물이다. 벤은 사실 끝끝내 영웅다운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나약한 소년에 불과할 뿐이고 심지어 이언이 늙어서 고백하는 부분에서도 영웅이 된 흔적은 없다. 오히려 용기를 낸 것은 그의 여동생 쉬어의 몫이었고, 주위 친구들의 도움과 희생을 통해서 난관을 겨우 극복해 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의 부실이었을까? 그렇게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끝까지 나약한 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악마적 기질의 찬드라 혹은 자와할의 불멸시대가 끝났음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찬드라가 킬리안의 마음과 지혜로움으로 운명을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듯, 벤은 쉬어의 희생으로 저주의 고리를 끊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믿었던 실체적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악마였고 불멸하며 이어질 저주의 사신이었다. 그 지겨운 운명의 고리를 단번에 끊어버린 힘은 단 한명의 영웅이 아니라 시간을 공유하는 모두의 힘 때문이며, 이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단단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이렇게 강인함으로 무장하게 한 원인은 바로 인도의 사악한 도시 캘커타에서 자행된 끔찍하고 불편한 역사때문이다. 자와할이라는 이중적 악마를 생산하고, 그 죗값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의 죽음으로써 치러지는 역설의 아픈 역사를 상기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참 불행한 시대였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던 한 많은 역사였다.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돌아보자. 이제는 이언이 어려서부터 희미하게 목격했다던 ‘흰 것’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벤의 곁을 맴도는 천사의 기운 엄마의 손길,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손길은 아닐까. 지옥불 속을 헤치며 달리는 기차의 아우성, 수백 명의 아이들이 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고통의 질주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읽어낸다.
이제 그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각자의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레일 위 기차의 기장이 되는 일이다. 차표는 이곳에서의 비밀을 영원히 숨기고 ‘평범함 삶’을 꿈꾸는 소박함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제목이 ‘지터스 게이트’가 왜 ‘한밤의 궁전’일까의 의문도 이와 맞물려 생각해보면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지터스 게이트에서 모든 사건이 펼쳐지긴 했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건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누고 마음껏 상상하며 꿈과 배려를 키우게 한 ‘한밤의 궁전’이라는 요람 때문에 가능했다. 영원한 순수가 잉태된 궁전이야말로 모든 악과 두려움을 이기는 열쇠였다.
 


한 뼘은 더 크게 자랐을 아이들의 건강하고 순수한 악수, 희미한 안개의 도시에 희석되어 모든 두려움의 음험함이 사라지고 맑은 눈으로 돌아보게 되길 기대해본다. 마치 세상 어딘가에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명패를 단 ‘한밤의 궁전’이 존재할 것만 같은, 그래서 그곳의 문을 빼꼼히 열어보게 될 용기가 얻어질것 같은, 참 맑은 안개가 떠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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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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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단편들을 읽어내며 나는 새삼 그냥 그 상태에 놓여있는 무심함의 미학을 엿본다. 꽉 차있는 분명함 보다는 뭔가 충분한 여백이 느껴지는 내밀함이 돋보이는 소설을 오랜만에 읽어낸 기분이랄까. 소설 안에서의 질서와 규칙들이 사회 안으로 포섭될 만한 경계를 흐리고, 더러는 모호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여닫아져서 조용한 문을 바라보는 기분이 내내 새로웠다. 이는 김숨 글이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권능과도 같아서 마치 한낮의 나른한 오후,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하다. 

여기 각각의 인물들은 거의 소외라는 이름의 특권을 행사하는 기묘한 목소리를 아우른다. 그런데도 아무런 의심과 거부감 없이 잘 연출되어서 소외를 마치 독특하고 돋보이는 재치의 기술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강점들을 주류적으로 읽어낸다라면 일반 대중들에게 낯설고 신선한 느낌을 선사해줄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김숨이라는 작가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거의 전작에서 그러한) 기묘하고 진중한 인상들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의 나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상과 환상이 교묘하게 맞닿은 소설을 많이 봐온 독자라면 어쩌면 이 소설들은 그저 무난하게 무심한 소설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간과 쓸개>가 보여주는 여백은 독자가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신선함과 무난함을 오가는 간극의 소설쯤이 될 것 같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설을 어느 편에서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그 어느 편에서도 설득력을 얻기에 충분하다는데 있다. 낯섦 속에서 일상을 바라보는 요소들이 흥미롭게 다가온 독자라면 그 자체로서 큰 의미를 가지겠고, 무난한 이야기라고 느낀 독자에게도 이 소설들은 진부함이 아닌 하나같이 매우 일정하고 잘 다듬어진 정교한 완제품으로서의 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독특한 시선을 던지는 소설일수록 처음의 인상이 중요한 것이어서 눈으로 따르는 여정에 호기심과 온갖 낯설음쯤을 선사해주어도 벅찬 일이다. 비록 카프카의 <벌레>를 읽어 낸 인상만큼이나 기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일상 속에서 일탈을 꿈꿔본 독자라면 분명 이 소설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할 것이다. 읽을수록 감칠맛나는 글을 좋아함에도 <간과 쓸개>는 이 시간 이후에 더 이상 보지 못한다해도 좋을 깊은 여운의 소설임에 틀림없다. 
 

여기 9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형태를 이루지만, 한편한편의 파편적 단서들을 주어 담다 보면 보편적으로 흐르는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정서의 흐름이 과잉되거나 부족함 없이 아주 일정하고도 정확한 시점에서 투여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소설이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가장 큰 맥락인, 구성의 힘이 적재적소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킬지 한 치 앞의 상상도 어려운 서사를 선사하는 점도 큰 매력이다. 빠르게 읽히지만 그만큼 자주 정지하게 만들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는 여백의 힘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메시지가 강하거나 혹은 없는 듯 보이는 가장의 기교이거나 그 어떤 의도에 치우침이 없는 무심함이 선선한 바람처럼 인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가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색과 탐닉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소설이라는 그릇 안에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 속으로 약간의 틈과 파문을 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너무 이상하고 엉뚱해서 자꾸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수한 매력 속으로 자꾸만 빠져들고 싶어진다.

단편 모두에서 어느 누구하나 가족과 이웃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도 하나같이 그들이 낯설기만 하다. 처절한 태도로 심각한 반응을 유도하기 보다는 ‘저러다 어쩌려고?’ 정도의 감흥만 일으켜서 솜씨 있게 사건을 이끌어가는 면도 세련돼 보인다. 사실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만큼 우리의 마음을 진동시킬 수 있는 게 있나 싶다. 순간의 틈을 언제라도 돌아보게 하는 것, 그 힘이 이 작가의 눈에서 명석하게 빛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단편들은 상처 난 과일만 모아둔 옹색한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안의 곪거나 지나치게 익은 과일들이 ‘당신과 나’로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니 이 바구니 안의 일그러진 형상들은 꼭 우리를 닮아있다. 평화로운 시간과 공간의 이면에는 우리가 만들거나 혹은 의도치 않게 남겨진 기묘한 사건들로 넘쳐난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맞닿은 또 다른 현실이며 진실일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마치 <육의 시간>에서 말하는 박물관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상상했을 때 더욱 명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쩌면 이들처럼 박제된 군중들의 다중적인 집합인 박물관은 아닐까. 어쨌든 이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면 삶에 별다른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희망과 꿈을 지닌 사람일수록 본인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옹색함과 초라함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불운한 순간과 무료함, 지나친 광풍이 이는 순간에도 이 시기를 관통한 사람이라면 분명 제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정도로의 위안이어도 우리에게 무료한 일상을 살아갈 이유는 분명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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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한 나라의 정치와 사회, 문화, 경제 거의 전 분야를 아우를만한 정보를 한눈에 알려면 신문의 한컷만화만 봐도 대충 가늠해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잡지 시사인의 '폭풍 인기'를 자랑하던 저자 굽시니스트가 우리 시대를 쉽고 재밌게 전달해주는 책이다. 이의 매력이라면 무엇보다 실랄한 눈으로 직시하는 것, 가슴을 뻥 뚫리게하는 고발과 풍자, 지식과 진실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모습들이 담겨 있고 지극히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풍자도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재밌고 유쾌하게 살아갈 미래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마구 던져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시사 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던 굽본좌의 통렬한 그림 속으로 빠져 들어보자!  

 

  

굳이 왜 '이태원'이라는 특정 지역을 알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을 시원스레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의 저자목록을 죽 읽어내는 순간 이태원이 무조건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지는 충동이 인다. 입지가 단단한 우리 시대 젊은 예술가들이 터를 잡은 곳인데는 그만한 이유가 차고 넘칠 것이 뻔한거 아닌가. 비단 저들이 사는 마을에 대한 자랑만을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이 주는 특유의 에너지들이 각자의 예술성에 어떤 식으로 미치는 지 궁금해진다. 오렌지색 표지처럼 톡톡 튀는 매력의 책을 읽고 나면 나도 내가 사는 곳이 좀 달리 보일 수 있을까?   

  

   

집을 '순.례.'한다는 말이 확- 안으로 들어오는 책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의 거장 여덟명의 사택을 찾아다니며 그들 각자의 사연과 철학으로 일궈낸 자취들을 이해하고 상상해보는 시선이 독특하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거장들의 지혜과 철학, 사랑이 담긴 여러 메시지를 직접 보고 듣고 생각해 내는 순례의 기록은 색다른 감동을 줄 것 같다. 배려와 사랑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동선과 사연을 만들어 낼 세상에 유일무이한 공간의 '집'이 어떤 미학을 전해줄지 기대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들이 현실화 되는 과정이 차곡차곡 쌓이며 연륜이 되고, 색다른 삶의 향기를 전해줄 것이 분명해진다. 벌써부터 그 집에서 풍겨오는 정겨운 냄새로 얼굴 가득 미소가 머금어 지는 책이다.  

 

 

2페이지 안에 예술가의 전 생애와 업적을 말한다! 이 책은 세계를 대표하는 101명의 예술가들, 그들의 인생을 가장 함축적이고 인상적인 언어와 그림으로 축소해 담아낸 만화책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가들에서부터 그림 이외엔 미처 알지 못한 예술가의 삶의 이면까지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작가가 포착한 예술가들의 인생의 부피가 어느 지점에서 확장되고 축소되는지 고유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만한 재미있는 책일 것 같다.  

 

 

  

이 책은 말그대로 화가로 알아보는 서양의 미술 흐름을 담은 책이다. 전쟁과 사건, 등 역사의 철학과 인식의 변화에 따른 순차적 구별법이라기 보다 화가가 주인공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인 것이다. 그림 안에 모든 세계관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가의 삶, 시대를 바라보는 눈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역으로 포착해낼 수도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13세기 부터 21세기에 이르는 미술사의 역사를 차분하게 돌아보며 지식을 함양해볼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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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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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엇보다 주인공 맷의 경우처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일을 접목해보는 도전의 사나이에겐 무조건 멋지다 말하고 싶어진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더 이상 금융맨이 아니라 완전한 시인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 도전은 실패하였지만 어쨌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려는 인생에는 무조건적인 격려와 배려를 해주고 싶다. 이런 다양한 사람이 존재해야 풍부한 사회가 되고 이들이 결국 조금씩 나은쪽으로 변화하게 하는 숨은 실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된 맷의 고군분투 생활기는 그래서 드높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좀 더 괜찮은 쪽으로 힘겨운 첫발을 내딛으려는 사람들에게 애잔하지만 더없이 큰 용기를 주는 책이다. 

 

금융과 시를 접목해 금융문학이라는 획기적인 정보물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실은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은 모험이었다. 돈의 흐름을 모르면 절대로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면 시대의 흥망이 보이고 그것은 결국 사람을 잘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재물만 쫓다가는 시야가 협소해져서 세상의 조망이 불가능해지고 이는 종국의 커다란 실패나 가져올게 뻔하다. 그런데 여기 주인공 맷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나름 유능한 신문사 일원으로 보다 미래지향적인 예측을 두고 시와 금융의 결합이라는 획기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보기 좋게 기대감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밀려오듯이 아내는 부정을 저지르고, 살아온 인생의 증거인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며, 봉양해야할 아버지와 아이들은 그를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던져 놓는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마약상 맷을 지켜보기에는 정말 그에게 지어진 짐의 무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가늠케 한다. 돈의 흐름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조망하던 관찰자 맷이 이제는 가장 낮고 음험한 뒷골목의 더러운 돈을 만지게 된 현실은 참 아이러니 하기만 하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란 것은, 그 어떠한 안전망도 없으며 어렵게 성공을 이루어도 언제 바닥으로 곤두박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사회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그래도 중간 중간 맷이 전하는 금융문학을 읽어내는 중에는 그가 얼마만큼 건실하고 바른 사람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 많다. 사실과 세태, 미래 시장의 전망을 버무려서 풍자적이고, 무엇보다 한 템포 물러서서 응시하게 하는 시선처리는 정말이지 놀랍다. 이런 의미에서 맷은 어쩌면 금융의 선구자인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지점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국 거대한 시스템에 놀아난 가여운 소시민의 힘겨운 한걸음 한걸음을 울지 못해 웃는 심경으로 지켜보는 건 참 기막히지만 용기를 얻는다. 끝내 좀 더 나은 현실이 주어지지 않고 실력과 설득력 있는 시도조차 허무맹랑하게 치부되는 것은 어쩐지 슬프고 아쉬운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맷의 이상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지만 현실의 맷은 시대를 뒤쫓기 바쁘다. 그러니 결과물은 보기좋게 시시하게 버려지거나 낡지 않았음에도 그 꿈은 버림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정말 놀라운 한걸음이었고 버려진 쓰레기통에서 가장 쓸만한 희망으로 머지않아 우리의 꿈이 될 것을 믿게 해준다.

 

맷이 해내는 시도들은 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최악의 결과만을 낳는다. 맷이 말하길 세상은 마치 쟁기로 밭을 갈아엎듯이 우리를 엎어 버리고 나아가지만 그렇더라도 이 책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실소를 터뜨리게하는 여유와 삶의 희망 같은 것을 전해준다.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삶이어도 고결하고 순박한 우리네 진짜 모습이 아닐까를 생각해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기 시작한다. 읽는 내내 아픔이 가벼이 여겨질 만큼 너무나 유쾌하고 세련된 방식의 치환을 해내는 작가의 문장은 정말 내내 아름다웠다. 

이 시대 가장 밑바닥의 삶들이여, 이 책을 보고 웃으라. 그리고 옆 사람과 함께 안단테로 묵묵히 걸어가라. 맷이 이렇게 우리에게 외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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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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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이렇게도 가혹하고 소외된 상상을 부려도 되려나 싶다. 적어도 이 작가에게 걸었던 애초의 상상력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기에, 사실은 좀 밉기까지 하다. 몽환적이거나 애잔한 아픈 사연쯤을 품을 줄 알았지 숨죽이며 확장되는 문제들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예컨데 삶과 죽음의 무게와 순환, 존재의미와는 거리를 둔 다른 주제. 그런데 그게 정말 보이지 않더라. 이 소설은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진짜 하려는 의미를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소설이다. 어쩌면 가장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의 요동같은 것만 명확하게 짚어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생각들을 충분히 이야기해내는 고집같은 것, 어쩌면 그이기에 뜻밖의 정경도 만들어 내는것 같다. 물론 이 책의 문체와 시선들이 전작에 비해 크게 끔찍하거나 황당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 아니다. 아무리 눈쌀찌뿌려 지는 장면이라도 그의 시선은 현실의 무게보다 훨씬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다. 생경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과 거짓말같은 기록들을 판단하는 것은 확실성 보다 모호성을 주기 때문에 이 소설의 몽환적인 느낌을 강조하는데는 틀림이 없다. 마치 작가는 이 세상에 명확한 근거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당황스럽고 뭔가에 대한 반응의 파문만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언제나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던 종국의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뭔가 가기 꺼려지는 지점으로 데려다 놓는 시도를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꽤 걸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뒤죽박죽도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나는 호되게도 어리둥절해 했던 것 같다.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겁이 잔뜩 서린 무지랭이의 얼굴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만큼 폴오스터의 작품은 매번 다른 충격과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주변인 애덤 워커는 현실의 중심에서 비껴 나온 소외의 인간이다. 소외의 골이 깊어지던 찰나 만나게 된 보른과 마고는 평온했던 그의 삶에 닥친 시련의 장애다. 전에 없던 허기를 느끼게 되고 아무런 온도를 지니지 못한 워커의 눈에 에로티즘이란 것이 싹튼 것도 이들에 의해서다.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당시 사회적 상흔에 의한 정치적, 문화적 여러 요인들과 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맞물려 나아가는가를 담고 있다. 정치적 부조리에 의한 혼란과 전쟁, 특히 이 소용돌이에서 잉태된 보른이라는 괴물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보른에게서도 드러나지만 워커도 차츰 이러한 결핍과 한 몸인 욕구의 충족에 혈안인 모습을 보면 전이의 무시무시함이 느껴진다. 결국 워커에게 무의식적으로 발생되는 에로티즘이란 것은 소외의 밑둥에서 자란 거대한 암덩어리인 것이다. 때문에 관습이라는 이성적 사고에 의한 억제의 감정과 결핍에 대한 충족의 욕망은 공존하면서 워커를 내내 종용하고 기이한 인간으로의 성장을 낳는다. 중심에서 이탈하여 아주 후미진 곳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키우게 된 명확한 감정은 에로티즘이었다. 이는 주변의 사람들을 자신의 세계에 가두고 걷잡을 수 없는 환상의 자궁을 만든 요인이 된다. 이것이 무엇에 대한 아픔이든, 소외에서 온 결핍의 발산이든 워커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길만이 남는다. 2부에서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누이와의 사랑은 워커에게 그 욕망의 근원이 얼마만큼 기이하게 펼쳐지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타자와의 분리를 인식하게 될 뿐, 자신의 실존적 모순을 자각하기에는 분명함이 없다. 오히려 그들과의 분리를 의식하게 됐을때 에로티즘은 자신을 고립하게 만든 원인임을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교감이란 것은 세상과 만나고 사람들과 융화되는 안도의 세계가 아니라 타자와 나를 분명하게 할 뿐인 단절의 수단이었던 것을 처참히 말해준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역시 시점의 이동일 것이다. 시점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사실의 왜곡과 감정의 선이 아무리 훼방 놓여지고 있다지만 결국 지극히 한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우리 각자에게 극치의 착각을 보도록, 그 극한의 환상은 애처롭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한 아픈 역사, 그리고 그 아픔이 낳은 어떤 쓸쓸하고도 고립된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 보게 한다.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걸어가고 있다. 그가 괴물이든, 병자든 그 누구든 그런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눈길이라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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