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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우연히 신문에서 본 박성우의 <삼학년>이란 시를 읽고 한참 동안이나 정지하게 되는 무언가가 흘러갔다. 전문은 이렇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 동네 우물에 부었다 /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놓았다 /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이 시의 소박함과 순박함의 정서는 원대한 고향의 품처럼 아름답다. ‘영혼의 맛이란게 있다면 바로 이 미숫가루와 같은 순박한 맛이지 않을까. 실컷 먹고 싶은 소년의 순수함이 우물 한 가득을 채우고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한 작은 손을 응시하게 한다. 잠깐의 행복감에 젖은 아이의 눈과 마음을 헤아린다면 어찌 따귀를 올려 부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 지나침 역시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은 아니어서 이 시는 우리네 고향이고 누구나의 정서가 맞닿을수 있는 공동의 품이다. 아마도 소년에게 미숫가루가 가득 들은 우물은 온 우주와도 같았을 행복의 근원지였으리라. 온 몸을 흔들리게 한 이 강렬한 맛을 헤아리는 기쁨이, 우리네 인생이 맛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정말이지 영혼의 맛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절반을 살아 낸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이 누려야 할 원초적인 욕망 중 가장 으뜸은 이고 그 다음이 바로 먹는 것이란 말을 들었다. 잠을 자는 것은 혼자 행하는 일이지만, 먹는다는 것은 결코 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태어나면 누구나 타인에 의해 먹임을 당해야 한다.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거나, 끓인 이유식이라도 누가 떠먹여 줘야만 살 수 있으니까자립으로 만들 수 있는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일단 누군가가 조리해주는 음식을 먹는다. 따라서 먹는 행위는 집에서든 밖에 서든 먹는 것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꼭 함께할 때 가능한 일이다. <칼과 황홀>은 바로 이러한 누군가로 비롯되거나 그런 결과를 낳았거나 하는 관계에 관해 이야기 한다. 특히나 이 책은 그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뛰어 넘어 황홀의 맛까지 담은 상차림이니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작가가 찾은 음식들은 그 특유의 맛을 궁금하게 하지만 그보다 그와 얽힌 깊은 맥락들을 짚어내는데 자연스러운 이끌림이 인다. 단순히 그 음식의 맛을 설명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그 곳의 정취나 냄새, 문화와 역사 등 오래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치 간장과도 같은 인생의 깊은 맛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일처럼 말이다. 같은 재료와 같은 시간, 공을 들여도 맛은 제각각인 어머니들의 손맛처럼, 책은 이야기마다 새로운 집으로 초대해 날마다 다른 음식을 선사해준다. 특정한 상황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음식의 맛을 좀 더 깊고 풍부하게 해주는 연관을 맺는다. 이는 마치 된장이 익어가는 발효의 과정처럼 몸에 좋은 균들이 아주 미세한 실이 되어 진득진득 붙어가는 관계를 비유하는 것 같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추억하는 일만은 결코 아니며, 결국 너와 나관계의 연장선상 위에 놓인 매일 해야만 하는 관계의 미학을 비유하는 일이다.

 

 

성석제는 그 어느 이야기여도 재미있게 꾸며내는 익살의 재주로 유명한 작가다. 이 책 역시 예외일 수 없어서, 먹고 사는 흔한 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 재치있게 그려낼 수 있을까하는 감탄이 매 장마다 절로 튀어 나온다. 먹음을 생의 축복이라 여기는 작가이기에 그의 유머와 재치는 또 한 번 맛의 도구가 되어 다채로운 향연의 조미료로 쓰인다. 그만의 음식 기행은 만나는 사람마다의 특별한 교류와 개성을 통해 작가가 듣고 본 자연스러운 재료와 어울어져 가미되고 풍부해진다. 그래서 그가 먹는 음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내가 알던 단 하나의 맛으로만 기억되는 음식일 수가 없게 된다. 그의 흥겨운 칼놀림이 좀 더 날렵하고 섬세해져 그가 아니면 절대 맛볼 수 없는 맛의 경지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먹는 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몸을 유지하게 해주는 숭고한 행위다. 여기에 마음의 윤택까지 돌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먹는다는 것의 숭고함을 몸의 보약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싶다. 결국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그것이 내 몸을 이루는 영양소로서만 생각하는 일에 그친다면 그 영혼은 먹는다는 행위로서 결코 인생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박한 음식이라 하더라도 내 몸에 들어가 삶의 기운을 얻고 말거라는 의도된 긍정은 조금씩 쌓이다보면 모든 삶의 원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 복합의 에너지가 발산될 날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음식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잇게 해주고 나아가서 내게로 온 재료의 역사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작가가 전하는 음식 이야기들은 주로 그 음식에서 비롯된 소소한 일상들을 전하는 일이다. 아무리 비루한 인생이거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어도 작가의 눈을 통하면 결코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게 된다. 설탕을 끼얹은 빵을 베어 무는 일처럼 금세 미소가 번지게 되면서 그 소소함 안의 달콤한 면면을 목도하게 해준다. 먹는다는 것을 특별한 행위이게 해주는 작가의 유별난 지시가 소박한 인생에서도 유머를 보게 하고 삶의 에너지를 부리게 해주는 추진력을 줄 것 같다.

이쯤이면 황홀한 맛이라는 게 꼭 맛있다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미감의 황홀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내 입맛을 사로잡는 맛은 접시 위에 놓인 맛좋은 음식일수만은 없고, 그것을 향유할 줄 아는 개개인의 포크와 칼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어느 지점에서 베어 물줄 알고, 어떤 때에 술을 마셔 풍미를 더 가감할 수 있는지를 아는 섬세한 지점을 말이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그것을 알맞은 때에 먹고 입안에 머무는 동안의 씹는 행위를 적절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맛을 정확하게 누릴 줄 아는 자이다.

그가 펼쳐내 보이는 인생의 소박한 맛은 오랜 동안 우울한 순간마다 떠올리게 되는 소중한 맛집들의 지도처럼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해준 당신의 미소 그것만으로도 밥상의 무게는 전보다 훨씬 근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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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항상 사람들을 놀래킨다. 그를 연상하면 아마도 젊음이란 단어를 가장 먼저 상기할 듯 싶은데 도무지 늙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다. 그가 내는 신작들만 보아도 '언제까지나 파릇파릇한 감성으로 젊음을 이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을 더욱 견고하게 심어준다.
오랜 세월 글장이로 살아가는 삶,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날선 눈으로 보고 예민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숙명이 버거웠을 법도 한데 그에게는 철두철미한 마음가짐이 상처받지 않을 것처럼 매우 단단한 심지로 버티는 듯 하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작가이지만 하루키는 분명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라는 삶과 지극히 개인적인 또다른 삶을 잘 분리하며 살아간 것 같다. 이것이 어쩌면 엄숙하거나 거장의 반열에서 느껴질 아우라를 벗어나는 그만의 비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글을 쓰지만 적당량을 쓸 것, 언제나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관람하는 평범한 일상들이 젊음을 언제까지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살아내는 일상의 기록이 <잡문집>으로 묶였다. 소소함을 지나오면서 작가는 어떤 시시콜콜한 일상을 쪼개며 살아갈까,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응시하고 미래를 그리며 살아갈까하루키만의 하루가 무척 궁금해진다.

 

  

 

미셸 투르니에가 자극 시켜주는 상상력 산문집이라, 읽기도 전에 머릿속이 요동을 치듯 출렁거린다. 서로 상반되거나 상응하는 개념들을 깊게 성찰하며 철학적 관점들을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은 쪽으로의 발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책이다
거장 투르니에의 감성과 상상력 안에서는 과연 어떤 것들이 노닐며 떠도는 것일까. 세상에 규정된 단어들이 그의 지혜와 만나면 어떤 의미로 새롭게 부여될지 궁금하다. 상상력으로 파생된 개념의 의미와 미래를 상상해보는 일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즐거운 감염의 기분을 맛보게 해줄것만 같다.

 

 

뭔가를 모은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작가는 태생적으로 좀 유별난 수집벽을 가졌고 그것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수집이라는 것은 누구나 했을법 한 일, 주위에서 횡횡하는 일이기에 크게 생소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수집품이 구두이건, 책이건, 전단지가 됐건 차곡차곡 쌓은 것들을 궁금 없이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세상에 그 어떤 하찮은 사물이라도 수집가의 눈에 들면 쓸데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모았고 내 이유와는 어떤게 같고 다른지를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만약 그것이 이우일의 그것들처럼 남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나부랭이거나, 아이들도 내다버릴 유치한 피규어라 할지라도 모으는데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다. 때문에 누구나 모을 순 있다지만 다 같은 층위에서 콜렉터라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집은 소유할 만큼의 가치가 중요한 일인데 이외에도 그것을 모으는데 들이는 시간과 돈과 노력 따위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런 특별한 의식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쓰레기가 돼버릴테니 말이다. 몇 년을 찾아 헤맨 시간의 역사를 사랑해서이고,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성실한 나’ 그러니까 일종의 나르시즘의 감정에 반해서일 것이고, 이러저러한 노력의 대가를 사랑한 일 때문에 콜렉터는 존재한다. 작가가 살아오면서 제 방 한가득 모아온 사물들이 각각의 역사로 남아 있다면, 하루 종일 머물러도 좋을 신세계가 펼쳐져 있을 게 분명하다. 그의 집에 빨리 초인종을 누르고 싶어진다.

 

 

손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한 기쁨을 모를리는 없다. 작가는 시골생활이 어려운 도시생활자로서 어떤 해방구를 찾았는지 DIY라는 발랄한 단어로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해준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손이라는 도구로 만드는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들을 모두 가능하게 하다니! 무조건 만들어 보자라는 무모함이 어느새 일상의 용기를 북돋는 변압기가 되어 준다. 유쾌함이라는 활력은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를 따라 손을 놀리고 싶은 충동으로 자동반사 될 것 같다. 텃밭을 가꾸고 악기를 만들고, 자연과 공생하는 환경 친화적인 삶의 태도가 도시생활자들의 답답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자유케 해주리라. 쇼파에 누워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고작 리모콘을 누르고 과자나 입에 넣는 활용의 손 사용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것 같다!

 

 

건축도로서의 삶은 어찌보면 여행을 해야만 하는 방랑 기질이 얼마쯤은 다 있는 모양이다. 세계의 어느 곳에나 건축은 존재하고 보이는 모든 재료가 곧 공부고 영감이 될테니 말이다. 보이는 모든 환경이 작품의 구상을 도울 수 있으니 여행을 다니는게 당연한건지도 모르겠다.
오기사란 이름으로 유명한 작가 오영욱이 몇몇 나라를 돌아보며 겪은 일들을 담아는 이 책은 그 시작이 서울이었다가 서울로 끝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행은 어차피 다시 돌아오는 일일테니까.
서울에서의 일상과 나에게 미안해서떠났다던 여러 여행지에서의 일들이 겹쳐져 그 안에서 벌어진 '다름'을 보게 해줄지도 모르겠다. 욕망과 화려함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즐기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각박함에 지친 생활의 위로를 얻은 일상까지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여행지의 온도와 냄새와 사람들의 표정, 건축이 내뿜는 분위기들이 그의 눈에는 어떤 식으로 담아졌을지 비행기 티켓을 끊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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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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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장이 되신 그 분의 자택이나 집무실처럼의 서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 그쯤이면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는 비유도 어리둥절한 것이 아닌가. 그게 도서관이 아니면 대관절 무엇이 도서관일 것이며, 그보다 개인이 도서관 만큼의 서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수많은 책의 기운 속에서 하루 종일 바라만 봐도 좋을 광경을 자신이 한권 한권 땅 밭 일구듯이 만들어간 것이라면, 그 자부심 또한 남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바라보기만 해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조약이 있대도 무슨 상관이랴, 무언가를 소유하는 기쁨으로 얻어지는 아드레날린의 용솟음은 최고치를 내달릴 것 같다. 서가까지 이루어낸 한권 한권의 역사와 그것을 일일이 읽고 난 후 개인의 역사는 또 어떤 것일지 상상만으로도 근사해지는 일이다.

이 책의 작가가 언급하는 책 목록을 보다 보니 역시 한 사람의 소소한 취향이나 지향점 같은 것을 엿보게 되는 것 같아 기쁘다. 짐작되는 유려한 장서의 소장 목록 중에서도 가장 인상을 남긴 몇몇 작품만을 소개하는 것이어서 그 섬세한 선별의 고심이 무조건 내 목록 리스트에도 올라도 좋을 것 같다. 굳이 내 기준의 필터를 거르지 않아도 최상급인 것을 덥석 물어온 것 같은 고마움과 결례를 범하는 마음이 한데 공존하는 마음도 든다. 이것만으로도 두 손에 담아진 소중한 역사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일이다.

나의 경우 서가랄 것 까지도 없이 매우 조악해서 단지 한 벽만을 겨우 채우는 정도의 책만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산다고 산 정도 정도니까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이들의 수와 비용을 부러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삼분의 이 정도가 새 책이고 나머지는 헌책들을 사 모은 것들이다. 새 책이든 헌책이든 상관없어 하는 편이며, 거의 모든 책이 문학이고, 서점에서든 지인에게서든 도서관에서든 먼저 읽고 나서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경우에만 사 모았다. 굳이 읽은 후에 책을 사게 되는 이유는 물론 형편 때문이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샀다거나 평이 좋아서 산 경우 실망할 가능성이 많고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렇다보니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좀 더 현명하다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아닌 경우야 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사 모으는 일이라거나 전적으로 신임하는 작가가 언급한 책은 읽기도 전에 소장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나의 경우는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나 책에 언급된 책을 알아가는 방식으로 읽어왔고 사 모았던 편이다.

저자가 좋아하는 여러 책 목록 중에서도 사진집 <윤미네 집>의 경우에는 알고만 있었지 직접 발로 뛰어 기필코 보고 싶다 생각이 들지 못했다가 유별난 뒷이야기를 듣고서야 최근에 찾아보게 된 책이다. <청구회 추억>이나 <풀종다리의 노래>처럼 취향이 겹쳐지는 책이라도 만나면 전국의 어느 헌책방이라도 샅샅이 뒤져서 소장 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까지 드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많은 책이 언급되었는데 워낙 아는 바가 없어 거의 모든 책을 앞으로 읽어야 할 목록에 취할 정도로 궁금한 책이 많았다. 
나의 경우 가장 오랫동안 발품을 팔아 어렵게 구한 책이 바로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이다. 몇 년은 걸린 것 같은데 어느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기쁨은 읽은 후의 감동보다 클 것이라는 예고까지 됐을 정도로 너무 벅찼었다.

저자가 목도한 일들 가운데 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책들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빛을 발하게 되거나 소장가들의 꾸준한 사랑에 힘입어 재출간 되는 빛나는 순간은 매우 인상 깊다. 좋은 책이라면 언제라도 어떻게 해서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라는 동화같은 일이 가끔은 펼쳐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권의 새 책이 쏟아지는 이런 시대에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오래된 책 한 권을 찾아내는 일은 조금은 무모해 보인다. 소외된 변두리와도 같은 곳에서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졌다한들 낡은 책장을 한 장 넘겨보기에는 세상에 너무 예쁘고 많은 책이 존재한다. 낡고 오래된 것이라면 고전처럼의 위상을 갖지 않은 이상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 가는게 슬프지만 사실이다. 이런 소외의 틈에서 진면모만을 가려낼 줄 알고 소장하는 일까지 인생의 큰 기쁨으로 안는 사람의 성정은 분명 따뜻한 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일 것 같다. 책은 첫 장이 펼쳐지기 전까지 사물 그 이상일 수가 없지만, 오랜 세월 품어온 소외의 심층에서 내뿜는 단어 하나하나의 향기는 참으로 오래된 서가의 향기처럼 그윽할 것이다. <오래된 새책>을 읽는 내내 그런 향기가 맡아졌고 내 책들이 늙어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봐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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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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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읽는 태도에는 제 각각의 관습적인 데가 있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에 균형이 잡혔다면 깨뜨리기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전작 <책 읽는 방법>을 읽었을 때 ‘슬로우 리딩’이란 주장을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속도감이 별로 늦춰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좀 실망을 했었다. 사실 빨리 읽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속도감을 자랑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는 성미를 지닌 것도 아닌 내가 고쳐지지도 못할 그저 그런 책읽기를 해나가겠구나 하는 자조감만 들 뿐이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어떤 책을 읽어도 훗날 상세히 기억해내는 법이 거의 없다. 당연하게도 대강 눈으로만 읽어낸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음미해가며 혹은 기억하려 애쓰며 읽는다는 것은 속도감과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속도감 안에는 당장은 조금 어렵더라도 천천히 알아간다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의 가능성이 전제로 깔려 있다. 그러나 내 경우처럼 천천히 읽더라도 머리를 복잡하게 작동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작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채로 머물게 된다면 당연히 책을 제대로 읽는 길과의 만남은 요원해진다. 그러니 그것은 천천히 읽는다고 해서 달라질 근본적인 대안은 아닌 것이다. 내가 유지하는 속도감의 윤활유라면 언제나 ‘재미’라는 요소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천천히 산책하는 듯 읽고 싶어진대도 재미가 없는 책은 아주 시시하거나 지루한 상대와 함께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책일 때만 더 알고 싶어지고 깊게 성찰하고 싶어지는 여유를 누리게 된다면 음미할 수 없을 정도의 책에는 전혀 가동될 리가 없다는 소리다. 물론 이 문제는 작가가 후기에 언급한 ‘슬로우 리딩’을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의 구분을 든 예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책임을 전제로 했을 때 훗날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 경우는 대관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문제는 다시 원점이다. 나는 재미있더라도 거의 눈으로만 읽은 탓이 큰 것이다.


다시 말하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우 리딩’이란 말 안에는 천천히 눈으로 읽으라는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중요한 건 천천히 마음으로 읽으라는 뜻이 담겨있다. 나는 천천히 읽었으되 눈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체득하지 못했고 기억까지 해내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천천히 여러 생각을 조합하면서 산책하듯이 걸어 나갔다면 나는 좀 더 다른 풍경들을 기억해냈을 것이고 좀 더 유익한 책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책을 읽는 방법 가운데서도 ‘소설’에 대한 좀 더 특화된 읽기 제안을 하는 책이다. 읽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는 유아적인 가르침은, 뭔가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소설 읽기’에 대한 구체적 제시를 한 책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은 읽는 방법에 대한 빌미를 얻어 우리의 관습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고, 책을 대하는 창조적 해석을 이끌어내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면 좋은 책읽기란 무엇일까? 히라노 게이치로는 실제로 소설 쓰는 작가의 안목과 독자로서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한 신중한 역할을 잘 활용하고 있다. 소설 속에 나돌며 떠도는 오브제들에 말을 걸어오는 영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대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진 문장이 던지는 직구를 받는 일이 아니라 그 동안의 수많은 단서들을 골라내고 추려내 앞으로 이어질 상상력에 대한 가능성을 퍼즐처럼 재구성해보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소설이 단 한 장면으로 축약될 수 있는 서사의 풍경화가 아닌 거의 모든 장면들이 겹쳐지고 포개져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불분명한 형체의 그것, 추상화에 가까운 화폭을 증명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신중한 시간을 들여서 여러 가능성에 대한 매듭을 연결하고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는 일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바가 바로 관계의 연동을 윤활하게 도와주는 일이다. 다른 장르에서와는 달리 소설의 책 읽기란 단어 하나만을 두고도 상황 그 이상 너머의 수가지 통로를 뻗어 상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을 쓴 작가와 독자의 감각적인 환경을 잘 조합하고 문장의 행간에 담긴 각자의 상상력을 동참하라고 유도한다. 책에서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기초편만을 잘 봐도 이 막연하고도 무수한 경우를 새삼 보게 되는 일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축화, 구조화 되어 쉽게 설명되는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거대한 화살표’의 표식대로 따라가다가 보이지 않는 ‘작은 화살표’의 방향대로 플롯을 이해하다보면 미시적인 단서들이 독자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 세세한 단서 또한 놓치지 말라고 전한다. 소설이 주는 기쁨 중에 이러한 미세한 방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이 주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세상에 없는 픽션의 세계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며 언급하는 거의 모든 소설들은 그것마다의 특장점 혹은 단점을 어떻게 커버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어떨 때에는 왜 이런 것까지 고려하며 읽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한 데가 있다. 이렇게 작가가 늘어놓은 장치들을 모두 끼우고 장착되어 연동되는 추진력은 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기쁨을 준다. 좀 달리 말하면 소설을 전보다 좀 ‘낯설게’ 읽게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책에 동그라미나 밑줄 따위를 그어가며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수만 가지를 구획하며 깔아 놓았을 혹은 그러지 않았지만 독자의 참여로 증폭되는 기운을 모두 떠안은 합작의 완성을 돕는 일이다. 그러니 그것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좁은 통로를 건너야 하는 이유이고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설의 진풍경을 진정으로 누릴 자인 것이다.

이 상상의 공간을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밝혀내는 집요함이 요구된다. 좋은 글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삶 보다는 보이지 않은 그 너머를 응시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언어가 빚어내는 대상의 본질을 알아내고 새로운 가치로서의 언어를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새로운 책읽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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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소울푸드'란 말에서 들려오는 포근하고 경건함마저 드는 좋은 맛의 기운만으로, 문득 내 인생의 '영혼의 맛'은 어떤 음식일지 떠올려 본다. 살아가면서 위로를 받고 싶어지는 순간에 소박한 한접시의 음식으로 마음이 다 누그러러질 수 있다면 이보다 위대한 순간이 또 있을까. 
<소울푸드>는 21명의 명사들이 들려주는 인생의 참 맛, 살아 갈 의지를 북돋아 주는 마법같은 음식을 소개한다. 치유의 가루라도 뿌려진것처럼 조금씩 음미하면서 이들이 차려놓은 한 상의 기운들을 모두 먹어보고 싶어진다. 
엄마가 끓여주는 소박한 된장찌개, 여행지에서 먹은 완전체와도 같은 라면 한 그릇의 맛, 이들의 영혼을 움직이게 한 음식은 어떤 소울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감동적인 맛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작가 김중혁을 떠올리면 온통 '젊음'과 '재치' '상상력'같은 단어들이 떠돈다. 그의 소설 속 이야기들은 그 어떤 황당함을 안고 있더라도 그럴싸 하다. 뻔뻔함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스럽고, 황당함보다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진중함과 엄숙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가까운 일상의 이면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종일관 톡톡 튀어오르고 인물들의 재기발랄함 역시 이루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게 묘사된다. 소설 이외에 김연수씨와 엮은 <대책 없이 해피엔딩>을 읽었을 때도 배꼽이 상실될만큼 이들의 핑퐁같은 재치 주고받기에 한참을 넋놓고 본 적이 있다. 그런 그라서 이번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도 기대를 할 수 있을만큼 해도 좋을 것 같다. 일상에서 겪은 소소한 생각들이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과 함께 펼쳐진다니, '호기심과 편애로 만든 세상'이라는 김중혁만의 독특하고 호기심의 전파가 세상에 마구 던져질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도 '뭔가 건지지' 않겠는가?   

 

 

'함성호'의 <당신을 위해 지은 집>은 '집'에 대한 온 성찰이 담긴 책이다. 집에 얽힌 온 세상의 단서들을 주어내고 그 안의 의미를 짚어낸다. 여행지에서 본 집, 인류의 역사와 철학으로 빚어진 집, 문화마다다른 집, 수많은 '집'으로 얽힌 여러 고리들을 풀어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거나 미쳐 발견해내지 못한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다룬다. 오랜 세월 세상을 남다르게 보아온 시인의 눈으로 또 건축가의 눈으로, 온 정신의 상징인 '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보다 그의 글쓰기가 무척 궁금해지는 책이다. 내가 짓고 살아갈 '집'에 대한 깊은 공감과 기대감이 부풀대로 부풀어져서 상상의 집이어도 좋을 꿈을 꾸게 되었으면 좋겠다.

 

 

김혜리기자의 유독히 '유심히 바라봄'에 대한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리라. <그림과 그림자>는 그녀의 첫 그림산문집이라는 독특한 매력으로 시선을 끈다. 그녀를 둘러싸고 포진된 온갖 대상에 대해 유심히 관찰된 질문들이 복합체로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을 것만 같다.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의 이면을 바라보고 의문을 던지는 그녀이기에 이 책의 글, 그림들이 유별나게 다가오리란 기대감이 든다. 마흔점의 그림에서 떠도는 수많은 그림자들의 몸짓이 그녀의 글로 어떤 공감을 불러 일으킬지 그녀의 뒷그림자를 밟으며 조용히 따라 걷고 싶어진다.  

 

  

제대로만 만난다면 한 권의 책은 오롯이 '우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 최성일이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 어쩌면 그런 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책을 만나더라도 허투로 읽는 법 없다는 지독한 독서광의 자질을 무릎 아래까지만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그가 생전에 펴낸 귀한 서평들이 한 권에 담긴 것도, 수많은 세월동안 책에서 추려낸 철학과 지혜들은 어떤 식으로 독자에게 전해질지 기대하는 일도 무척 즐겁다. 이 <한 권의 책>이 11월 늦은 가을의 완성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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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완료했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