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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포칼립스
대니얼 H. 윌슨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로봇과 인류의 결투를 다룬 소설은 이미 많다.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진부하다. 로봇이 언젠가 어떠한 오류로 인해, 혹은 인간의 손을 벗어난 발전으로 인해 각성하게 되고 결국 인간을 공격할 것이라는 상상력은 너무나도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처음 받자 마자 대단히 당황했다. 아직도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를 결정했다는 문구만 없었어도, 좀 더 기대를 접고 독서에 임했을 것이다. 고놈의 문장이 쓸데 없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근데 사실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라는 설정엔 신선함을 줄만한 구석이 없다. 정공법으로 나간다면 그렇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할테고, 인간들이 그것에 저항할테고, 어떤 계기로 인간이 로봇을 이길 것이다. 이 플롯대로라면 정말 별로 읽어보고 싶지 않은 소설이 될테다. 작가도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정해진 각본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작가는 이 소설만이 가지게 될 독창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 지점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작가는 우선 소설을 보고서식으로 작성했다. 물론 몇 십년 전과 비교한다면 기존 소설의 틀을 깨는 독창적 발상이라고 칭찬해줄만 하다. 하지만 각종 좀비물, 세계멸망물에서 이런 식의 포멧은 많이 사용하지 않았나. 작가의 의도가 다소 움찔하는 부분이다. 또한 본격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로봇이 인간을 조금씩 공격해나가는 부분을 소설의 1/3정도에 할애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바이러스가 서서히 퍼지는 부분까지 하면 소설의 절반정도가 전쟁 이전의 이야기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의 꽃은 이 부분이다.
소설 전반부는 정말 손에 땀을 쥐며 읽었다. 이미 로봇들이 인간 생활의 곳곳에 자리잡은 시점, 그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물건들이 인간을 공격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가정용 로봇이 패스트푸드 점에 들어와 점원들을 공격하는 장면이라던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이 애들을 협박하는, 그리고 그 사실을 어른들을 믿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장면은 좋았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로봇이 인간을 공격해나가는 과정, 이를테면 엘레베이터가 사람을 죽인다던가 기계가 사람의 목소리를 사용해 전화를 통해 인간들을 한 곳으로 유인하는 모습들은 끔찍하리만치 신선했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 발발 후다.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저항군을 조직하고 로봇들의 중추인 컴퓨터를 해치우러 나가는 여정은 너무나도 지루했다. 나름대로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조직들이 만들어져 나름대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어필하긴 했지만, 그 점조직들이 알레스카까지 행군하는 과정은 다소 박력이나 스케일 면에서 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기계들이 인간을 사이보그화 시킨다던가, 그 과정에서 태어난 (결국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존재들은 상상력이 너무 뻗어나가 오히려 개연성이 떨어진 부분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SF를 평소에 즐겨 읽지 않아서 SF적 상상력을 내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진부하면서도 신선하고, 신선하면서도 너무 진부한 이 소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조금 곤혹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