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시겠습니까? - 국어시간에 쓴 중학생 소설 모음 아침이슬 청소년 4
이상대 엮음 / 아침이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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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 하시겠습니까?>란 재미있는 제목과 함께 '국어시간에 중학생이 쓴 소설 모음'이란 부제가 우선 마음을 끌었다. 아이들이 쓴 글을 통하여 사춘기에 접어든 내 아이의 마음을 엿보고 싶었다.

아이는 다행히도 순조로워 보인다. 내 아이처럼 나 역시 내 부모에게는 무난한 아이였다. 그러나 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사춘기의 질곡이 얼마나 깊었으며 황량했던가! 다행스럽게 나에게는 책과 남다른 관심을 주시는 선생님이 있었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한다고 늘 핀잔 듣는 내 아이에게는 무엇이 있고 누가 있을까?

겉으로는 순조로워 보이지만 나에게 내보이지 못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며 읽게 된 책 <로그인 하시겠습니까?>에는 중학교 2학년생, 청소년들의 고민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생생하고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 마음, 그 속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어떤 고민, 어떤 생각으로 한 번씩 흔들리는 걸까?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중학교 2학년 현태는 자칭 '전학의 달인'이다. 2학년 1학기 현재, 세 번째 학교인 이곳에 전학 온지 이제 겨우 3개월인데, 며칠 후면 다시 전학을 가야한다. 유능한 건축가인 아빠가 건물을 짓는 동안 혼자만 잠시 지방에 계시면 좋을 텐데, 새로운 계약을 할 때마다 가족 전체가 이사를 하였다. 이런 아빠 엄마에게는 돈이 전부이지, 전학을 한 자신의 아이가 얼마나 불안하게 적응해야하는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다.

자칭 전학의 달인이라고 하지만 전학은 늘 낯설고 두렵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아이들이 버티고 있었고, 그 아이들의 벽을 뚫고 겨우 친해질 만하면 다시 전학을 가야 했다.

이런 현태에게 친구의 의미는 '함께 있을 때만 비로소 친구일 수 있는 것'이고 아무리 친하게 지냈어도 전학과 함께 잊고, 잊혀지고 마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친구들에게 며칠 후면 전학을 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 후면 잊혀질 자신이고, 전학을 가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현태는 마음이 자꾸 쓰리고 서글프다. (전학의 달인)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라 이윤하!" 윤하는 언제부턴가 천장에 대고 부모님에게 해야 할 인사를 하고, 대답까지 스스로 한다. 몇 년 전에 엄마 아빠가 이혼할 때 서로 윤하를 맡을 수 없다고 옥신각신하였는데, 윤하에게는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윤하는 집에 오면 늘 혼자다. 엄마와 함께 살지만 언제나 늦은 밤에 피곤에 지쳐 돌아오는 엄마. 어느 날 학교로 찾아온 아버지와 어색하면서도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윤하는 집에 돌아와 9년 전 가족사진을 일으켜 세운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사진. 9년도 더 된 아주 오래된 가족사진. 사진 속에는 9년 전 내가 있고 엄마가 있다. 오늘 마지막에 보여 준 것과 똑같은 미소를 띤 아빠도 있다. 그때 여섯 살짜리 나는 아빠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좋아 보이잖아. 행복해 보이잖아.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시간이 흐른 걸까.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지만 완전히 늦지는 않았어. 언젠가는 저 사진의 모습처럼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게 언제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언제라도 괜찮다. 와주기만 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어)

현태도 윤하도 부모들 때문에 외롭게 고민을 한다. 그런데 이들 두 주인공만이 아닌 또 다른 아이들도 부모 때문에 외로워하고 있었다.

소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의 또 다른 주인공 서린도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적막과 외로움에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다. 교복도 벗지 않고 새벽까지 할 때도 있어 학교생활은 엉망이다. 이처럼 고민하고 있는 것이 모두 다르지만, 아이들의 고민은 가족의 부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가족의 따뜻한 눈길을 원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은 부재중인 부모를 철없이 원망하기보다는 부모의 사정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편의 소설을 써낸 아이들. 이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이 건강한 우리의 청소년들이라고 대견스러워했다면 내가 너무 단순한 걸까?

어린 영혼들이 내민 손을 맞잡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는 신월중학교 2학년생들이 국어시간에 쓴 소설 10편을 글쓰기 지도를 하는 이상대 선생님이 모아 엮었다.

책에 수록된 10편의 단편은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글을 쓴 아이의 사실적인 고민과 해결이 함께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헤아려 쓴 것보다 훨씬 사실적이며 생생하다.

아이들의 글이라서 어른들이 쓴 소설보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구성이 세련되지 못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글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이 어설프기도 하지만, 아이들만의 특성이 맑고 순수하여 오히려 장점으로 와 닿는다.

중학생들이 쓴 소설이어서 얼핏 어설픈 내용이려니 싶었다. 다만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선뜻 읽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고민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의 중학교 2학년을 떠올려 볼만큼, 한 편 한 편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고민들이 생생하고 치열했다. 중학교 2학년 그때 나는 어떤 고민들을 했던가!

덕분에 아이들에게 한결 가까워진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내 스스로 세대차를 만들어 아이들을 멀찍이 두고 내 주관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하고 의지하면서 손을 내밀고 있는데, 나는 미처 맞잡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힘든 사춘기의 질곡을 헤쳐 나온 아픔을 깡그리 잊고 스스로 세대차를 만들어 편견의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들의 마음을 진솔하게 만났고 한 걸음 다가선 듯하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아이들의 마음에 접속하는 코드로 입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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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세계문학전집 1
기하라 부이치 엮음, 한성례 옮김 / 이지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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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도 ‘리외’는 죽은 생쥐 한 마리 때문에 넘어질 뻔 했는데 평소라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 생쥐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현관에서 비틀거리던 생쥐 한 마리가 결국 피를 토하며 죽었고 이튿날 아침 왕진나간 아랫마을은 온통 쥐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쥐 8천 마리를 모아 쌓기에 이른다. 출현하는 생쥐는 줄었지만 사람들 사이엔 원인모를 열병이 빠르게 번져 열병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하루 30여명에 이른다. 이런 며칠 후 ‘리외’에게 날아든 전보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페스트라는 사실을 발표하고 시를 폐쇄하라!'

6월 말, 지독하게 뜨거운 바람이 하루 종일 불었고, 희생자 수는 일주일에 7백 명으로 급상승했다. 집들의 문은 뜨거운 바람과 햇볕과 페스트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꼭꼭 닫혀 있었다. 때때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가 인간의 자연스런 언어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사망자가 급증함에 따라 관도 부족하고 묘지내의 장소도 태부족이었다. 관은 소독해서 셀 수도 없이 다시 사용되었다. 시체마다 개별적으로 무덤구덩이를 파던 것을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나뉜 거대한 무덤구덩이 두 개로 팠다가 나중에는 마지막 남은 수치심마저 사라져, 남자와 여자의 시체는 뒤섞이고 포개져서 묻혔고, 그 위에는 석회가 잔뜩 뿌려졌다. - 요약본 본문 발췌


8월 중순이 되자 페스트가 온갖 것을 다 뒤덮고 있어서 이미 개인의 운명은 존재하지 않고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사실만 있을 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 덕분에 페스트는 사라지고 이듬해 2월, 사람을 가득 실은 열차가 도시로 왔다. 작가는 마지막에 덧붙인다. 페스트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하여 언제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청소년기에 읽은 페스트를 '신선한 고농축액' 마시듯 다시 읽으며

페스트라는 극한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의사 리외. 페스트마저 오직 신의 형벌이라고 기도에만 전념하다가 페스트로 죽어가는 파늘루 신부, 보건대를 조직하여 리외와 뜻을 함께 하지만 결국 페스트로 죽고 마는 부자 지식인 타루, 처음에는 페스트 만연한 도시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리외와 뜻을 함께 하는 랑베르 기자, 페스트라는 극한 상황의 혼란을 틈타 돈을 벌려고 날뛰는 무리들 속에서 이들은 삶이 막 열리기 시작하던 사춘기의 나에게 특별한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리외처럼? 페스트처럼 목숨을 앗아가는 극한 상황에 종교는 인간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파늘루 신부를 보면서) 인간은 처음에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랑베르처럼 이타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페스트처럼 혹독한 대가가 꼭 필요한 건가? 재산을 털어 보건대까지 조직하여 페스트와 싸웠지만 결국 죽고 마는 지식인 타루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인류사에 혹독하게 기록된 페스트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힘든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리외의 성실함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이타심이야말로 혹독한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바이러스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시 읽는 페스트가 새롭다. 대충의 줄거리 속에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새삼스럽고, 그때는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운 깊이로 다가온다고 할까? 청소년기에 많이 읽었던 명작들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방대한 분량의 명작을 다시 읽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 <요약 세계문학전집 1, 2> 덕분에 페스트는 물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약 세계문학전집 1, 2>는 '전쟁과 평화', '파우스트', '위대한 개츠비', '북회귀선' 등 많이 알려진 62편의 명작들을 신선하게 요약하여 명작 한 편을 5분 정도에 정리하며 읽기에 좋다. 비교적 많이 알려진 명작 사이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유명작가의 다른 작품이 다소 낯설게 섞여 있는데 처음 읽는 작품도 요약본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 기존의 요약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요약, 정리하였다고 할까?

요약본의 단점 대신 장점이 더 돋보이는 책

<요약 세계문학전집 1, 2>는 많은 작품을 한 권으로 요약하다보니 쉽게 잃고 마는 원작의 맛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나아가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전해준다. 이 책은 방대한 원작을 원고 20매 정도에 '농축' 하였다는 것이 맞겠다. 원작의 맛은 고스란히 살리면서 짧게 요약한다는 것,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 책의 편집자는 방대한 명작 한편에서 우선 꼭 필요한 핵심 원문들을 뽑아내고, 그 원문과 원문을 편집자로서의 단수 높은 내공으로 이어 엮는다. 이것은 엮은이의 주관대로 줄거리를 뽑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닌, 원작에서 중요한 부분을 원문 그대로 뽑아냈기 때문에 원작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져 독자로 하여금 고전 명작을 직접 체험하는 경험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감동과 함께 신선함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작품 요약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작가의 작품성향을 간추려 제시하고 작품 끝에는 '편집자의 한 마디'를 덧붙여 작품 이해를 돕는데 페스트에 덧붙인 편집자 한 마디는 이렇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이며, 페스트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 불어 닥칠지 모르는, 그래서 결국은 받아들이거나 맞서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무너지거나 혹은 맞서거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페스트, 편집자 한마디

그리고 다시 부록으로 작품마다 '논제'와 '글쓰기 구상' '논술 키워드'를 덧붙였다. 논술이 학생들에게 필수가 되었지만 학교 공부 외에 방대한 분량의 명작을 읽을 여유가 없는 아이들에게 명작의 감동과 함께 명작에서 뽑아낸 시의적절한 논술키워드로 논리력을 기르는데 큰 도움이 될 법하다.

이 책의 편집자가 페스트에 입력한 키워드는 '부조리'와 '부정'이다. 부조리와 부정은 요즘 우리의 뉴스를 매일 같이 장식 하다시피 하는 중요한 이슈들이다. 아이와 함께 페스트를 읽고 편집자가 페스트에서 뽑아낸 부조리와 부정을 현재 우리의 사회와 연결시켜 이야기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 책은 대부분의 요약집이 어쩔 수 없이 안게 되는 단점들을 장점으로 되살려 오히려 원작에 대해 궁금하게끔 하고 있다. 지난 날 인상 깊게 읽었던 명작을 언제든 다시 읽고 싶은 갈망과 학교 공부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논술에 대비하여 명작을 읽어야만 하는 아이와 요즘 한 편씩 읽으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이 좋다. 요약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훨씬 살려 독자로 하여 직접 고전 명작을 체험하게 하는, 우리의 문학 작품이 이렇게 요약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아쉬움이 무척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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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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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쾌한씨'는 작업 도중 자동차 범퍼모서리에 복부가 찍히며 넘어진 이틀 후에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병원을 찾았다. 장파열. 거동조차 힘든 그가 이런 사실을 회사에 알렸지만 수술이 끝나도록 회사에선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된 그가 출근했을 때 회사에서 이미 퇴사처리된 후였다. 치료는 고사하고 일자리마저 자신도 모르게 뺏기고 만 것이다.

이런 하소연과 함께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이후 단 한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는 그가 내민 월급봉투는 의문투성이였다. 몇 달 전부터 인상된 시급 370원과 연말성과금 지급은 고사하고 고용주 마음대로 월급을 주고 미루고를 반복하여 들쭉날쭉, 계산조차 복잡한 월급명세서였다.

"내가 잘못한 기라. 마, 다친 그날 병원을 찾아 갔어야 한 긴데 나는 나대로 그냥 견뎌보려고 했던 기라."
"자기들 마음대로 봉급을 줘서 안 그런교. 다음달에 밀린 것은 그 다음다음 달에 나오는 기라."


그의 말대로 다친 그날 바로 병원을 찾았다면 적절한 산재처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비정규직중 과연 몇이나 산재처리를 받았는가?"고 울산현대공장 파업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털어 놓는다. 산재뿐이랴. 비정규직 그들이 '생계'현장에서 겪는 부당한 대우와 인간적인 차별과 수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은 있으나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정규직에게 작업복이 세 벌 나오면 이들에겐 두 벌, 그래서 정규직이 버린 작업복을 주워 입는데 그나마 좋아진 사정이라고. 간식으로 정규직에게는 제과점 빵을 주지만 이들에겐 구멍가게의 빵을 주는데 한 생산라인에서 정확히 구분한다. 정규직은 해마다 임금인상투쟁을 하지만 이들로선 어림도 없을뿐더러 정규직이 파업하는 동안 덩달아 일을 못하는 이들은 그들 뒤에서 비를 들고 청소를 해야 한다. 정규직에게는 파업동안의 일당이 나오지만 이들 비정규직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월차를 하루라도 쓰려면 범법자라도 된 듯 비굴해져야 하고, 또한 일주일전에 미리 말해야 하기에 갑자기 아프면 낭패,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아픔도 허락을 받고 아파야만 하는 이들이다. 생리구조상 남자들에 비해 볼일 보는 시간이 긴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화장실 볼일로 수모를 겪어야 한다. 끊임없는 잔소리와 따가운 눈총은 물론 '짤리는' 이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옷에 싸 버리고 말까?'를 수도 없이 생각한다고.

이렇듯 모멸로 이어지는 수모를 예사로 받는 이들이 정작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짤릴(그들 표현대로)' 위험이 가장 많은 '신규채용 때'다.

우리나라 채용구조는 3개월 계약, 3개월 계약… 이런 식이다. 1년 계약은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에. 또 한 가지는 1년 계약단위인데 그 대신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 이런 구조를 교묘히 이용하는 악덕 고용주들에게 비정규직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 쓰고 버리면 그만인 싸구려 부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렇다보니 작업현장에서 받는 온갖 차별과 모멸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해고되지 않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정규직도 좋으나 그보다 먼저 저는 퇴사당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했으면 합니다. 더는 쓰다 버린 소모품 정도로 다뤄지는 그런 인생이 아니었으면 좋겠고요. 인격은 고사하고 인간적인 차별까지 받고 살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잖습니까?"-어느 비정규직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거나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턱없이 적은 월급은 들쭉날쭉하여 생활은 계획 없이 늘 불안정하고, 작업현장에서 작은 문제라도 생기거나 불만을 말하면 그 순간 퇴사로 이어지기 일쑤다. 또한, 어느 날 출근하여 보면 자신도 전혀 모르는 회사에 입사되어 있다. 그야말로 입사도 퇴사도 고용주 마음대로다.

비정규직으로서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 정규직으로 채용은 고사, 일한 기간만큼 몇 백 원씩 쌓아진 시급조차 떼먹으려고 고용주는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태는 강쾌한씨가 치료비는커녕 자신도 모르게 쫓겨나고만 울산현대공장이야기에 불과할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대한민국인권의 현주소를 찾아서

<길에서 만난 세상>의 첫 번째 글, '노동은 있으나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파업중인 울산현대자동차를 찾아가 만난 비정규직 이야기다. 책 속의 글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웹진 '인권'에 연재되었던 글들로 21세기의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다.

"2004년 2월 폐광 속에 버려진 광부들의 이야기를 필두로 글쓴이들은 매달 길을 떠나야만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안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전라도 광주와 부안을 다녀오기도 했고, 울진과 속초, 소록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모두 참으로 아픈 곳들이었고,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곳들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조금만 더 정직하고 따뜻했으면 하는 마음에 눈물 떨 군 적도 여러 번이었다." - 여는 글

세 명의 공동 저자 스스로 이라크 파견 작가, 탈학교 청소년, 방북 이후 보안관찰처분 등의 이력을 갖고 있어서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하여 생생하게 전해준다. 세 명의 공동 저자가 만나 끝없이 눈물 적셨던 사람들은 또한 이렇다.

우리 사회의 성(性)에 대한 모순과 편견이 만들어 낸 비혼모,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봉제노동자 24시, 외국인 이주 노동자 실태, 한국 남성과 결혼한 아시아 여성들 코시안, 테러리스트로 싸잡아 오해받는 무슬림, 탈학교 청소년, 방황하는 도시의 노인, 보호 관찰대상자, 진폐증으로 고통 받고 살아가는 탄광촌 사람들, 팔려오다시피 와서 성을 유린당하고 착취당하는 베트남 처녀들… 그리고, 세상의 편견에 여전히 세상의 끝에 있는 섬, 소록도를 찾았다.

한편의 글 끝마다 인권에는 미처 담지 못한 취재후기를 실었는데 뒷이야기들만으로도 그들의 아픔은 깊게 패여 들고, 인권관련 사진을 주로 찍는 김윤섭씨의 사실적인 사진들이 깊은 생각을 묻게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간 이런저런 매스컴을 통하여 한번씩은 반드시 만난 적이 있는 이야기들인데도 표면적인 것들만 알고 있는 나의 무관심에 또한 부끄럽기도 하였다. 이들이 나의 일상,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매일 무심히 스치는 이웃들이란 사실이 가슴 아프고 억울하였다. 마음 아프고 부끄럽고, 적절치 못한 국가정책이나 약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착취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향하여 치밀던 분노도 숨기지 않고 싶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세상.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 모여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 나의 일이 아니니 나와는 별 상관없다는 무관심만으로도 때론 우리도 가해자일수 있지 않을까? 가까운 내 이웃의 일이 결국은 나의 생활과 이어진다. 같은 사회 공동체로서 적어도 무엇이 우리들의 권리를 빼앗는지, 어떤 사람들이 차별대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 관심가지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몫이지 않을까? 우리는 과연 몇 퍼센트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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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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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책은 무척 비싼 물건이어서 집 한 채를 팔아 고작 6~7권을 살 수 있는 정도였기에 신의 축복을 받은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책의 혜택이었다. 책은 한편으로 사치품이었으며 읽는 목적을 떠나 특정개인의 신분과 부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특별한 목적 외에는 보관가치를 크게 두지 않으며, 이젠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야말로 책이 넘치는 시대가 되었다.

몇 년 전,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함께 전자북 등이 선보이면서 종이책이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고 염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책들은 얼마나 꿋꿋한가! 인터넷의 위세에 눌려 사라지기는커녕 인터넷의 무한한 정보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흡수, 고단수로 진화하고 있음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신간으로 만나는 책들 중에는 ‘모 사이트에서 자료출처하였다’는 각주(별도설명)가 많이 보인다. 시대에 맞게 발 빠르게 계속 진화하고 있는 책을 볼 수 있음이 무척 반갑다고 할까?

그렇다면 책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오기 시작하였을까? 책은 어떤 역사를 걸어 왔고 어떤 과정으로 진화하였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늘 궁금한 이야기였다.

<세상은 한 권의 책 이었다>는 지난 날 책값이 턱없이 비싸서 책의 원래 목적을 벗어난 중세의 책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네모반듯한 책의 모습의 기원이 되고 있는 코덱스(codex)출현부터 중국에서 105년에 발명된 종이가 유럽으로 전파, 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이 대량생산(?) 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책의 모든 역사도, 전 세계의 책의 역사도 아닌 성경제작이 활발하던 중세유럽의 한 시기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신구약 성경제작에 양200마리 동원? 세상은 신의 손가락이 쓴 책?

▲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앞표지
ⓒ 마티
고대에는 밀랍으로 칠한 목판이나 점토판, 또는 나무껍질처럼 비교적 편편한 것이라면 어느 것에나 글씨를 적었다. 중국에서는 비단 피륙에,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등지에서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무언가를 적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랫동안 보관하기에는 부적합하였고 성경처럼 귀중한 내용은 양피지처럼 값비싼 것에 적을 수밖에 없었다. 코덱스의 출현과 함께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경제작이 활발하게 제작되면서 수서본의 화려한 시대가 열린다.

양피지는 특성상 턱없이 비쌌고, 따라서 양피지를 이용하여 무엇을 적는다는 것은 사회특권층에서만 가능하였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니 대량생산도 불가능한 일, 그러자니 다른 책을 보고 일일이 베껴 쓰는 필사만이 오직 책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몇 개월에서 몇 년간에 걸친 필사는 힘든 작업이었고 말 그대로 밭갈이에 비유되는 필경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참회의 방법으로 간주되기도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를 필사하였는가!’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계산하기도 하였다나.

책을 제작하고자 주문을 의뢰하는 수도사나 사회 특권층도, 책에 직접적인 공력을 들이는 필경사와 채색사도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 즉 신의 뜻으로 사는 세상은 신의 손가락에 의해 씌어진 한권의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은 오직 그야말로 신의 뜻을 대신해 만든 한 권의 책이었다.

대부분의 수도사가 성경 제작에 주력, ‘어떤 성경을 얼마만큼 소장하고 있는가?’로 수도원의 명성을 얻는 것에 비해 한편의 귀족층에서는 성경은 물론 기사의 무용담 등을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였는데, 얼마만큼 화려한 책을 몇 권이나 소장하고 있는 가에 따라 신분의 위상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책들은 지나치게 부린 기교와 화려함으로 어떤 글씨인지 분별조차 힘들고, 심장모양이나 특정가문을 상징하는 백합꽃잎모양 등의 책도 제작되기 일쑤였다. 책의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예사였다.

중세, 그 당시에 책을 소유하는 것은 대단한 부자나 특권층만이 가능한 특별한 것이었다. 책이란 내용을 막론하고 턱없이 비싼 물건 이다보니 도둑도 자연스레 생겨나고 심지어는 책에 쇠사슬과 자물쇠까지 설치하게 된다. 그럼 이렇게 비싼 책들이 어떻게 대중에게 가까이 걸어오기 시작하였을까? <세상은 한권의 책이었다>는 이런 과정과 화려한 ‘수서본’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을 풍성한 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서양의 문화와 책의 역사는 성경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책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성경의 이야기다. 당시 책의 주종을 이루는 것이 성경이었기 때문이고 수도원과 수도사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책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만들어 내는데 어느 정도의 양피지가 들었을까?

고대에는 비교적 구하기 쉽고 값싼 파피루스로 두루마리의 책을 만들었지만, 중세의 책이란 대부분 양피지로 만든 장정본이었다. 양피지는 만드는 공정도 까다로운 데다가 양 한 마리에서 고작 넉 장이 나올 뿐이었으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제작하려면 자그마치 200마리의 양을 잡아야 했다니 양피지 값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 위에 금박 은박을 입히고 각색 물감으로 채색(彩飾)을 더하는가 하면 표지는 각종 보석으로 치장했으니, 그쯤 되면 책은 단순히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와 위용을 과시하는 사치품이요. “정신적인 재화보다는 경제적인 재화”(자크 르 고프)였다.

책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와야 할까?

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혁명은 ‘코덱스(codex)의 출현’과 ‘인쇄술의 발명(1460년)’이다. 코덱스의 출현은 서구 문화사에서 그야말로 혁명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코덱스(사각형의 페이지들을 묶은 형태의 책)를 최초로 언급한 것은 84~86년경 시인 마르티알리누스에 의해서였다고. 코덱스는 탁자위에 올려놓고 글을 쓸 수 있고 원하는 곳을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두루마리보다 훨씬 합리적이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으로부터 책의 역사는 눈부시게 진화되고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네모반듯한 책의 기원이다

학교 다닐 때 글자나 종이, 혹은 인쇄술 발명에 대한 것들을 배웠지만 ‘코덱스’도 몰랐고, ‘양피지’란 이름뿐, 그다지 아는 것도 없었다. 파피루스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드는지, 짐승 가죽을 이용하여 어떻게 책을 만든다는 건지, 거위 깃이나 갈대 펜으로 과연 얼마나 글을 쓸 수 있다는 건지 등. 책을 좋아하는 내게 이런 것은 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서본의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많은 에피소드를 보았는데 그 이야기들은 중세 서양문화를 이해하려면 참고삼아야 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이었다.

무엇보다 책을 둘러싼 것들을 맘껏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의 제목만으로는, 책이 너무 좋아 삶의 모든 것을 책으로 연결시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려니 싶었는데 오직 책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과 삶의 많은 부분을 소비(?)한 사람들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그들에게 책은 모든 세상이었고 살아가는 목적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권의 책이 우리생활에 어떻게 스며있어야 제대로 된 가치를 빛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였다. 책 한권이 나의 모든 세상은 아니지만 책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보고 세상을 보는 내 자신이 좋다. 누군가든 나처럼, 책을 좋아하고, 책을 통하여 삶의 많은 부분을 가치 삼는 사람들에게는 책의 진정한 의미와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줄 책이란 생각이다.

양피지는 어떤 것?

ⓒ마티
양피지, 즉 파르슈맹(parchemin)은 소아시아의 페르가몬(pergamon)이란 도시에서 유래. 페르가몬 왕 에우메니오스 2세가 처음 사용했다고. 기원후 3~4세에 걸쳐 기술적 발전과 함께 널리 전파, 13세기에 종이가 나타나기까지 글을 쓰기위한 주된 재료로 쓰였다.

양피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는 여러 가지 동물의 가죽이 사용되었다. 염소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인 '바잔(basane)이 가장 흔했고,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벨랭(velin)이 가장 고급이었다. 중세에는 양피지를 만드는 공방이 따로 있었다는데 주로 도시 한복판이나 수도원 근처에 자리 잡았다고. 당시 양피지를 이용한 대부분의 수서본들은 성경내용이었으며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서본이 제작되었다.

가죽을 손질하려면 여러 주씩 걸리는 아주 꼼꼼한 손질이 필요했다고 한다. 가죽은 24장, 또는 36장씩 묶어 다발로 팔았다. 한 장의 가죽을 둘로 접느냐 넷으로 접느냐에 따라 양피지 크기가 달라졌고 가장 큰 것이 4절(콰르도), 가장 작은 것이 8절(옥토)였는데, 이것을 공책처럼 묶었다. 화려한 수서본을 만들려면 양피지를 검정이나 자주색으로 물들여 금색이나 은색으로 글씨를 쓰기도 했는데 가죽은 파피루스나 종이보다 견고하고 불에도 잘 타지 않는 장점으로 이미 썼던 글씨를 긁어내고 다시 쓰기도 새 글씨를 쓸 수도 있어서 자외선에 비추면 글씨가 겹쳐 보이는 것도 종종 발견된다고. 그럼 어떻게 양피지를 만드는 걸까?

1.짐승의 가죽을 벗겨 하루쯤 개울물에 담가 털이나 지저분한 것들을 제거한 다음 물기를 빼고 살이 붙어 있던 안쪽이 위로 향하게 하여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런 다음 가죽의 안쪽에 석회를 발라 안쪽끼리 맞닿도록 반으로 접는다.
2.1~2주일 경과 후, 다시 한번 물에 넣어 나머지 털을 제거, 강도를 달리한 석회액에 여러 차 례 담갔다가 헹구기를 반복, 둥글거나 네모진 나무틀에 팽팽하게 펼쳐 놓는다.
3. 둥글거나 네모진 나무틀인 에르스에 팽팽하게 펼친 상태에서 가죽을 살을 걷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작업이 끝난 가죽에 백묵가루를 뿌린다.
4. 마지막 작업으로 백묵이 뿌려진 가죽을 속돌로 긁고 양가죽으로 문질러 매끈하고 부드럽게 다듬는다.( 책의 내용을 토대로 요약)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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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최항기 지음 / 함께읽는책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역사의 주인공을 보면서 '그때,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안타깝게 물어 볼 때가 있다. 인간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다가, 미처 그 뜻을 다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아쉽게 꺾이고 말았다면 그 안타까움은 더욱 크고 깊다. 요즘 자꾸 나를 붙들고 있는 한 사람을 둘러 싼 무수한 물음이 있다. 홍경래와 홍경래를 둘러 싼 역사적인 사실들이 그렇다.

'만일, 홍경래의 난이 성공했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떤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200여 년 전 당시에 여러 갈래의 큰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역사의 뒷전에서 묵묵히 잊혀지고 있는 홍경래를 소설로 만나게 해준 작가의 의중을 알아보면 조금은 도움이 될까?

왜 하필 홍경래인지, 홍경래를 소재로 책을 펴낸 작가에게 물어 보았다.

"홍경래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반역자의 우두머리라는 얘기 그 이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시기는 사회적으로는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였는데도 기득권층은 그 에너지를 옛 악습으로 억누르려고만 했습니다. 특히 평안도 지방은 많은 부(富)에 비해 지역차별로 인해 관직에 오르지 못한 지식인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습니다. 홍경래는 이런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일종의 기폭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인데요. 성공하지 못함으로서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됐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결국 일제치하라는 굴욕을 당하게 된 맥락을 따라가 보면 홍경래의 난이 그 시작인데도 일반적으로는 무시당하고 있더군요. 그렇기에 홍경래의 이야기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홍경래의 난>을 책으로

<홍경래의 난>은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시민기자 최항기의 역사소설로, 10년을 준비 끝에 봉기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지금과 크게 닮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점 등이 읽는 내내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내가 200여 년 전 그때 핍박받는 하층민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하였을까?' '내가 홍경래였다면?'… 나아가 <홍경래 난>을 통하여, 당시의 지배층의 부패에서 오는 사회계층간의 갈등과 시국적인 고민이 지금 우리들의 절실한 문제들과 다르지 않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홍경래와, 홍경래로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좀더 진지하게 들여다볼까?

소설을 통하여 만난 홍경래는 정치적인 야욕이 큰 인물은 결코 아니다. 나처럼, 이 시대 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일뿐. 홍경래의 바람도, 봉기에 참여한 대다수의 바람도 누구나 평등한 처우를 받는 것과 땀 흘린 대가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세력의 패권싸움은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무관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왕과 벼슬아치지만, 그들의 싸움은 배부른 밥그릇 싸움이기 예사요, 자신들만의 안위가 먼저지 민초들의 허덕이고 주린 배는 알바 아니었다. 자신들의 싸움이 잦을수록 상대적으로 극심해지는 백성들의 황폐함을 헤아린다면 그럴 수는 없을 터. '백성들을 위하여!'는 음흉한 속셈을 위장한 위정자의 허울이기 예사였다.

세도정치, 매관매직, 지배층의 세력다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의 하층민에 대한 횡포… 지배층의 부패는 더욱 심해지고 가뜩이나 핍박받던 민중의 삶은 송두리째 뽑힐 지경에 이른다. 게다가 홍경래는 중앙 지배세력들에게 이유 없이 멸시받고 배척당하는 서북출신이었다. 당시 서북 사람들은 뜻이 높고 능력이 있어도 결코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런 사회에서 뜻이 좌절당하고 삶이 핍박받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했다.

핍박받는 하층민 대다수와 뜻이 꺾인 선비들이 마음속에 뜻을 두었다. '세상을 뒤집어야 해. 사람답게 살아야 해. 많은 것을 얻길 바라지 않아. 특별한 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모두가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 그걸로 족해….' 이렇게 시작된 봉기였다.

'홍경래의 난'이 성공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를?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홍경래로서는 두 번의 큰 패배가 못내 아쉬웠으나 그조차도 봉기가 실패한 대답으로서는 뭔가 부족했다. 10여년을 준비해 오면서도 뭔가 자신이 깨닫지 못한 부족한 면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 않았나! 난 민심을 따랐는데 왜 하늘은 나를 저버리려는 것인가?' 홍경래는 그간 자기가 걸어 왔던 길을 죽 돌이켜 보았다. '난 혹시 진짜 민심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지금의 실패는 하늘이 이를 깨우쳐 주려는 것이 아닐까?' - 책 속에서

봉기 초기에는 승산이 있었지만 주저앉게 된 정주성에서 홍경래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심지어 임종직전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하고, 봉기를 함께한 사람들 중에서도 관군에게 항복하기를 권유한다. 한편, 정주성을 둘러 싼 수많은 관리들은 이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생각할 가치도 없이 어떻게든 눈에 띄는 공을 세워 출세하기 위해 앞 다툴 뿐이다. 작가는, 봉기의 실패로 좌절하고 있는 정주성에 독자들을 오래 머물게 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한 꿈을 꾸지만 그것마저 꺾여 버린 홍경래와 대다수 봉기군의 꺾여버린 꿈에서 200년이나 훌쩍 지난 우리시대 대다수 우리들의 아픔을 보는 것은 무리일까?

작가는 역사적인 사실은 최대한 배제,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만 들려줄 뿐이다. 비록 묻혀지고 있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둘러싼 질문들이 다양한 편이며 지금 우리 사회와 당시는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점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이 필요하다. '홍경래의 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 책 덕분에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인 문제들을 아울러 알게 됐다. 이것이 역사소설의 또 다른 매력 아닐까?

'만일 그때 홍경래의 난이 성공하였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를 살아가고 있을까? 작가의 말대로 일제치하의 굴욕을 따라가 보면 홍경래의 꿈이 꺾인 채 멈춰 있을까? 상인 임상옥과 홍경래의 교차하는 인연의 진실은? 10년이란 오랜 세월의 준비 끝에 일어난 봉기였는데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홍경래의 난이 성공하였기를 200년이 훌쩍 지나 부질없이 바라본다. 어리석은 줄 알면서….

물 흐르는 듯 잔잔하게 읽었는데 책을 덮고 보니 그 파도가 거칠고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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