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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세계문학전집 1
기하라 부이치 엮음, 한성례 옮김 / 이지북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도 ‘리외’는 죽은 생쥐 한 마리 때문에 넘어질 뻔 했는데 평소라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 생쥐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현관에서 비틀거리던 생쥐 한 마리가 결국 피를 토하며 죽었고 이튿날 아침 왕진나간 아랫마을은 온통 쥐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쥐 8천 마리를 모아 쌓기에 이른다. 출현하는 생쥐는 줄었지만 사람들 사이엔 원인모를 열병이 빠르게 번져 열병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하루 30여명에 이른다. 이런 며칠 후 ‘리외’에게 날아든 전보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페스트라는 사실을 발표하고 시를 폐쇄하라!'
6월 말, 지독하게 뜨거운 바람이 하루 종일 불었고, 희생자 수는 일주일에 7백 명으로 급상승했다. 집들의 문은 뜨거운 바람과 햇볕과 페스트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꼭꼭 닫혀 있었다. 때때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가 인간의 자연스런 언어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사망자가 급증함에 따라 관도 부족하고 묘지내의 장소도 태부족이었다. 관은 소독해서 셀 수도 없이 다시 사용되었다. 시체마다 개별적으로 무덤구덩이를 파던 것을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나뉜 거대한 무덤구덩이 두 개로 팠다가 나중에는 마지막 남은 수치심마저 사라져, 남자와 여자의 시체는 뒤섞이고 포개져서 묻혔고, 그 위에는 석회가 잔뜩 뿌려졌다. - 요약본 본문 발췌
8월 중순이 되자 페스트가 온갖 것을 다 뒤덮고 있어서 이미 개인의 운명은 존재하지 않고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사실만 있을 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 덕분에 페스트는 사라지고 이듬해 2월, 사람을 가득 실은 열차가 도시로 왔다. 작가는 마지막에 덧붙인다. 페스트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하여 언제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청소년기에 읽은 페스트를 '신선한 고농축액' 마시듯 다시 읽으며
페스트라는 극한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의사 리외. 페스트마저 오직 신의 형벌이라고 기도에만 전념하다가 페스트로 죽어가는 파늘루 신부, 보건대를 조직하여 리외와 뜻을 함께 하지만 결국 페스트로 죽고 마는 부자 지식인 타루, 처음에는 페스트 만연한 도시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리외와 뜻을 함께 하는 랑베르 기자, 페스트라는 극한 상황의 혼란을 틈타 돈을 벌려고 날뛰는 무리들 속에서 이들은 삶이 막 열리기 시작하던 사춘기의 나에게 특별한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리외처럼? 페스트처럼 목숨을 앗아가는 극한 상황에 종교는 인간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파늘루 신부를 보면서) 인간은 처음에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랑베르처럼 이타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페스트처럼 혹독한 대가가 꼭 필요한 건가? 재산을 털어 보건대까지 조직하여 페스트와 싸웠지만 결국 죽고 마는 지식인 타루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인류사에 혹독하게 기록된 페스트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힘든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리외의 성실함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이타심이야말로 혹독한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바이러스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시 읽는 페스트가 새롭다. 대충의 줄거리 속에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새삼스럽고, 그때는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운 깊이로 다가온다고 할까? 청소년기에 많이 읽었던 명작들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방대한 분량의 명작을 다시 읽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 <요약 세계문학전집 1, 2> 덕분에 페스트는 물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약 세계문학전집 1, 2>는 '전쟁과 평화', '파우스트', '위대한 개츠비', '북회귀선' 등 많이 알려진 62편의 명작들을 신선하게 요약하여 명작 한 편을 5분 정도에 정리하며 읽기에 좋다. 비교적 많이 알려진 명작 사이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유명작가의 다른 작품이 다소 낯설게 섞여 있는데 처음 읽는 작품도 요약본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 기존의 요약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요약, 정리하였다고 할까?
요약본의 단점 대신 장점이 더 돋보이는 책
<요약 세계문학전집 1, 2>는 많은 작품을 한 권으로 요약하다보니 쉽게 잃고 마는 원작의 맛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나아가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전해준다. 이 책은 방대한 원작을 원고 20매 정도에 '농축' 하였다는 것이 맞겠다. 원작의 맛은 고스란히 살리면서 짧게 요약한다는 것,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 책의 편집자는 방대한 명작 한편에서 우선 꼭 필요한 핵심 원문들을 뽑아내고, 그 원문과 원문을 편집자로서의 단수 높은 내공으로 이어 엮는다. 이것은 엮은이의 주관대로 줄거리를 뽑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닌, 원작에서 중요한 부분을 원문 그대로 뽑아냈기 때문에 원작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져 독자로 하여금 고전 명작을 직접 체험하는 경험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감동과 함께 신선함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작품 요약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작가의 작품성향을 간추려 제시하고 작품 끝에는 '편집자의 한 마디'를 덧붙여 작품 이해를 돕는데 페스트에 덧붙인 편집자 한 마디는 이렇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이며, 페스트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 불어 닥칠지 모르는, 그래서 결국은 받아들이거나 맞서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무너지거나 혹은 맞서거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페스트, 편집자 한마디
그리고 다시 부록으로 작품마다 '논제'와 '글쓰기 구상' '논술 키워드'를 덧붙였다. 논술이 학생들에게 필수가 되었지만 학교 공부 외에 방대한 분량의 명작을 읽을 여유가 없는 아이들에게 명작의 감동과 함께 명작에서 뽑아낸 시의적절한 논술키워드로 논리력을 기르는데 큰 도움이 될 법하다.
이 책의 편집자가 페스트에 입력한 키워드는 '부조리'와 '부정'이다. 부조리와 부정은 요즘 우리의 뉴스를 매일 같이 장식 하다시피 하는 중요한 이슈들이다. 아이와 함께 페스트를 읽고 편집자가 페스트에서 뽑아낸 부조리와 부정을 현재 우리의 사회와 연결시켜 이야기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 책은 대부분의 요약집이 어쩔 수 없이 안게 되는 단점들을 장점으로 되살려 오히려 원작에 대해 궁금하게끔 하고 있다. 지난 날 인상 깊게 읽었던 명작을 언제든 다시 읽고 싶은 갈망과 학교 공부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논술에 대비하여 명작을 읽어야만 하는 아이와 요즘 한 편씩 읽으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이 좋다. 요약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훨씬 살려 독자로 하여 직접 고전 명작을 체험하게 하는, 우리의 문학 작품이 이렇게 요약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아쉬움이 무척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