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아프리카
김충원 지음 / 진선북카페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은 헤어질 날짜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연애와 같다.

아, 정녕 이렇게 끝내야 하는 것인가... 한숨을 내쉬어 보지만 비행기 티켓에 빨갛게 적혀 있는 숫자는 경고문처럼 귀향을 재촉한다. 배낭을 꺼내어 짐을 싼다. 가장 소중한 다섯 권의 스케치북과 에스키스 노트부터 챙기고... 아프리카를 반추해 본다. 훗날, 내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도 아름다운 대자연의 싱그러움이 지금처럼 건재하기를 기원하며 스케치북을 접는다.
- 책 속에서


저자는 이처럼 아프리카 여행을 아쉽게 끝내고 있다.

'가장 소중한 다섯 권의 스케치북과 에스키스 노트부터 챙기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섯 권의 스케치북을 엿보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스케치와 짧은 에세이로 아프리카를 만나면서, 스케치가 주는 특별한 느낌에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스케치 아프리카>는 미술 교육가로 유명한 저자 김충원이 두 달 동안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화폭에 담은 아프리카에 대한 기록'이다. 아프리카의 원시적이고 건강한 생명, 아프리카의 야생 동물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모습을 크로키와 수채화로 만날 수 있다.

저자가 여행을 시작하는 곳은 아프리카 동쪽 탄자니아와 케냐에 걸쳐 있는 세렝게티 국립공원, 아루샤와 타랑기레 국립공원, 빅토리아 호수 주변 등이다.

얼룩말의 무늬는 사람의 지문처럼 저마다 다르다

작은 웅덩이에 목마른 얼룩말들이 모여들었다. 덩치가 큰 수컷은 망을 보며 힘이 약한 어린 말들과 암컷들에게 순서를 양보한다. 이들은 가장 자존심이 강한 야생마들이다. 특히 우두머리 수컷은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치타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결사의 항전을 벌이기도 한다.

얼룩말의 줄무늬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육식동물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얼룩말이 한데 뭉쳐 있으면 따로따로 보이지 않고 큰 덩어리로 보인다.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들 가운데도 같은 이유로 줄무늬를 가진 돔 종류가 많이 있다.
- 본문 중에서


언젠가 황학주 시인의 <아프리카>(생각의 나무)라는 여행 에세이에서 얼룩말의 무늬에 대해 뭉클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우리들의 눈에는 모두 같아 보이지만 사람의 지문이 모두 다른 것처럼 얼룩말의 무늬 역시 저마다 다르다고.

새끼를 낳은 어미는 한나절 내내 새끼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새끼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시선을 막아 버린다. 그 대신 자신의 무늬만을 새끼에게 기억시킨다. 새끼는 이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무리 중에서 어미의 무늬만을 찾아내 어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약육강식의 광활한 초원에서 살아남아 어미가 된 얼룩말은, 제 새끼에게 제 무늬만을 기억 시키면서 위험한 맹수로부터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할 것이다. 우리들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세상 그 어떤 비바람도 막아 주겠다고 가슴의 약속을 하는 것처럼.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무늬와 지문'을 스케치하다

"윌드비스트 떼는 계절에 따라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을 넘어 먼 거리를 이동한다. 이동하는 동안 표범이나 사자의 공격을 받게 되면 이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내닫는다. 암컷 가운데는 때때로 이동하는 중에 새끼를 낳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은 갓 태어난 새끼도 2~3분이면 네 다리로 서고 잠시 후에는 어미와 같이 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렝게티 평원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이 동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본문 중에서


'누'라고도 불리는 월드비스트는 얼룩말에 섞여 산다. 이들처럼 대체적으로 연약한 동물들은 무리를 지어 살고, 제 무리만으로 약하다 싶으면 힘이 비슷한 다른 무리와 무리지어 산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아름다운 공존이다.

이 책은 스케치와 짧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크로키로 만나는 동물, 수채화로 만나는 아프리카 초원의 모습,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과 이해가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야생동물들의 몸짓을 표현해낸 크로키와 평화롭고 담백한 스케치의 맛을 맘껏 느낄 수 있으리라.

예전에나 지금이나 아프리카의 생명들에게 가장 큰 적은 사람. 오래전에 '바첼사바나'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룩말이 있었는데 130년 전에 절멸하고 말았다고 한다. 바첼사바나의 아름다움에 반한 유럽인들이 남획해 가죽으로 가공했기 때문이다.

이뿐일까. 인간의 하찮은 치장을 위해 죽어간 동물들은 수도 없이 많다. 아름다운 상아를 지녔다는 이유로 멸종한 코끼리. 뿔 때문에 사라진 코뿔소들. 독특한 무늬 때문에 멸종한 기린... 가장 용맹스럽고 아름다운 사자로 알려진 '바바리사자'는 원형경기장의 싸움꾼이 되어 인간에게 구경거리를 주는 대신 멸종했다.

이제 더 이상 아프리카의 동물들이 인간들의 하찮은 치장과 솔깃한 호기심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책을 읽는 내내 간절히 바랬다.

우리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무늬와 지문으로 살아간다. 아프리카도, 아프리카의 수많은 생명들도 우리들처럼 그들만의 독특한 무늬와 지문으로 살아간다. 우리들의 무늬와 지문에 그들을 길들이지 않는 것, 그들만의 독특한 무늬와 지문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스케치 아프리카>는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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