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입시를 앞둔 내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나타나 뜬금없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겠다고 고집한다면?
<가출 아빠의 사랑 스케치>에서 만난 저자 아들 정규이야기다. 공부를 죽어라 싫어하는 아이였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숨 막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에만 가면 인생이 술술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로선 나름대로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만 부모로선 화가 나고 황당한 건 당연할 것이다.
당장 머리를 원래대로 돌리던지, 머리 색깔만 달라졌는데도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지 인천공항에 가서 확인서를 받아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그러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은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머리색깔이 달라졌지만 탑승이 가능하다'는 확인서를 받아들고 4시간 만에 나타날 만큼 팽팽하게 맞섰다.
"그 아들에 그 아비였습니다. 자기 멋만 한껏 내려는 아들이나 그걸 용납하지 못하고 아비만의 생각과 규범의 틀 안에 꽁꽁 묶어두려고 한 것이나 피장파장이었습니다. 두 고집사이에는 언제나 충돌과 긴장이 연출되기 일쑤였습니다. 불속에 타오르는 푸른 대나무가 쩍쩍 갈라지며 터져 나오는 소리처럼 큰 소리가 나고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 책 속에서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책 속의 글 기준) 그는 대학 1년생으로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놀 여가가 없다"며 한 번씩 쉬어가면서 공부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 척 하고 있는 아들이다. 그간 이 부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아버지와 아들의 그토록 팽팽하던 긴장의 관계를 부드럽게 풀어 이렇게 끈끈한 부자간으로 밀착 시킨 걸까?
사춘기 자녀들에게 잔소리가 먹히나요?
"내 딴에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더군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우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의 두 번째 단계, 그 다음은 아이들의 생각에 나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대화가 통하게 되고 이해가 되었고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회복하는 '정석'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단장인 박광무씨가 이 책의 저자. 결혼 17년 만에 용감하게 가출 하여 그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 간의 사랑을 찾아낸 주인공이다.
저자는 지난해(2005년) 미국 미주리대 주립대 객원 연구원으로 1년간 미국에 머무르게 되는데 아내를 한국에 두고 사춘기에 접어 든 아이 둘만 데리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교회 등의 일로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는 이 아빠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손수 준비하고 등교시키는 등의 아내가 하던 일을 모두 하면서 아이들을 뒷바라지를 한다. 아버지로서 빳빳하게만 세우던 권위로부터 가출을 감행한 것.
미국에 가기 전 저자는 새벽에 집을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한국의 전형적인 직장인 아빠였다. 그렇다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었고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아이들을 대하고 판단했다. 아빠라는 권위만을 빳빳하게 세우면서. 이런 날이 반복되다보니 아이들과의 관계는 늘 겉돌았고 사춘기 아들과는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
흔히, 부모자식 간에 문제가 생기면 부모라는 완고한 권위에 절망한 아이들이 가출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저자는 결혼 17년 동안 근엄하고 완고하게 지켜오던 가장으로서의 자리를 미국행과 더불어 과감하게 버리고 용감하게 가출해버리고 만다. 그 용기 있는 가출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아이들과의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 등을 소박하고 자세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신변적인 글로만 머문다거나 개인의 여행기, 미국 생활 체험기가 아니다. 아빠와 자녀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자 깊은 신앙고백 에세이다.
용감한 가출아빠가 전하는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출아빠의 사랑스케치>에는 저자의 가정과 아이들 관련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바라보는 우리 교포들의 생활이야기, 미국 가정에 입양되어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한국인 입양아들 이야기, 한국인이 바라본 미국사회와 미국인들, 우리의 교육과 미국의 교육 등을 잔잔하게 들려준다.
나 역시 지난해부터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와 시시때때로 해답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대로 잔소리와 큰 소리를 내면서 스트레스가 만만찮고 아이는 아이대로 힘든 모양이다.
사춘기적, 나도 너 못지않게 부모의 바람과는 딴 방향만 쳐다보고 오기로 질주할 때도 많았는데 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걸까? 눈만 뜨면 다시 되풀이 되는 아이와의 전쟁으로 생각과 고민이 분분하던 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로서 저자의 이야기들에 공감하면서 읽었다고 어제까지 이해할 수 없던 아이의 세계를 하루아침에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부모로서 여전히 이해도 수긍도 해주지 못하는 아이의 세계. 그러나 저자의 용기 있는 가출은 대책 없이 되풀이 되던 잔소리와 큰소리를 잠시 미루고 숨고르기를 하면서 아이의 세계를 들여다보아야겠다는 다짐의 계기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자! 눈에 보이는 대로 잔소리하기 전에 호흡을 하고 아이를 이해하려고 먼저 해봐! 부모라는 권위와 자기 위주의 애정으로부터 가출을 하여 이성적으로 아이의 세계를 들여다 봐!'
솔직히 처음에는 이 책을 약간 거북스럽게 보았다. 교육열 높은 대한민국에 기러기 아빠와 고액과외가 많다지만 이 불경기에 번듯한 과외를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아이들과 함께 한 미국행'이 연구를 가장한 해외어학연수정도의 배부른 이야기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한 아버지의 자식사랑을 맘껏 느꼈고 진정한 용기가 뭔지 알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