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 신분 증명의 역사, 청년학술 58
발렌틴 그뢰브너 지음, 김희상 옮김 / 청년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내로라하는 유지들이 모두 모였는데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뚱보목수가 괘씸하였다. 목공기술이 아무리 뛰어난들 자신들(유지들)보다 못한 뚱보일 것이었다. 뚱보목수 마네토가 괘씸하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골려줄 쑥덕공론을 하였고 일은 이튿날부터 착착 진행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미 계획적으로 입을 맞추어 뚱보는 빚쟁이 마테오가 되어버렸고 급기야 법정으로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뚱보도 처음에는 마테오가 아니라고 하소연하였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마테오라고 주장해 별 수 없었다. 나아가 이제는 스스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테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테오라고 주장하였다.

자신이 마테오가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마테오가 되었고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혼돈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뚱보목수이야기>라는 소설의 대략의 줄거리로 1400년경 피렌체에서 실제로 살았던 인물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당시에는 이와 비슷한 일이 많았다고 하며,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개개인, 즉 나의 신분을 누가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처럼 신분증명의 구체적인 수단이 없던 시대에 한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을 바탕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와 신분을 누가 만드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런 일은 중세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어느 날, 나를 닮은 사람이 감쪽같이 나를 대신한다면 나의 신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으로 나를 몰아간다면 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 속의 몇 해가 이미 지나버린 사진? 그런데 나를 대신하는 사람이 나와 비교적 많이 닮았다면? 그럼 나를 대신하는 코드 13자리의 숫자? 이마저도 이미 단단히 작정하고 달달 외워 술술 말할 정도라면? 그럼 나만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증명해보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마저 단 한 사람도 없다면?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신분 증명의 역사이다. 아직 사진이나 지문 채취 등의 기술이 없던 시절 신분 증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현대적인 개인 정보관리 체계나 시각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던 시절,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바로 그 사람이라고 알아보았을까?

간단하게 말하자. 13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는 어떻게 개인의 신상 정보를 관리했을까? 당시는 오늘날 같은 관리도, 주소도 없지 않았는가? '패스포트'나 '수배전단' 같은 말은 배경 없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중세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호주머니 안에 지니고 다니는 신분증에 담겨 있는 중세의 흔적을 추적해 보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과연 여권이 담고 있는 400년 혹은 600년 전의 흔적이란 무엇일까? 현재와 중세는 도대체 어떤 의미로 함께 만나고 있다는 말인가? - 책 속에서


<너는 누구냐?>는 신분증명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소재부터가 흥미롭거니와 중세 유럽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야사를 보듯 읽는 재미까지 더해주어서인지 이야기들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작가와 함께 피렌체로, 혹은 베네치아로 중세 유럽의 도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일어나고 있는 신분증명을 위한 역사의 흔적으로 숨 가쁘게 다녀본다.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이나 문장(汶章)이나 배지 표장(表章)등이 있었고 복식(옷)또한 개인과 개인이 속한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에도 여전히 연결되고 있는 것들이고 보면 중세 유럽의 이야기들이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신분증명에 필요한 수많은 것들의 출현, 사용, 발달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다.

전반부에서 개인과 개인집단의 신분증명의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인 기록의 사실과 함께 이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만날 수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여권을 비롯한 신분증명의 도구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지금의 우리들의 신분증명서와 바로 연결되어있기도 한 것을 보면 신분증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지금 우리들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책 속에는 진짜를 향한 가짜들, 즉 사기꾼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나온다. 진짜를 어떻게 하면 진짜로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짜가 될 수 있을까? 즉, 수많은 진짜들의 진짜를 향한 노력과 함께, 가짜로 가고 싶은(스스로는 진짜가 되고 싶겠지만) 가짜들, 즉 사기꾼들의 어이없는 에피소드들이 배꼽을 쥐게 한다.

신분증명의 역사. 인류와 함께 발전해 온 이 역사는 우리 개개인의 역사와 함께 맞물려 있다. 오늘날 우리들 개개인을 증명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들이 지갑 속에 지니고 다니는 신분증은 이젠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증명이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ID가 나의 중요한 신분증명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ID를 넣어 로그인을 하고 ID를 품고 있는 닉네임으로 우리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존재하고 있다. ID를 입력한 로그인으로 특수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신분이 증명되기도 한다.

책은 두껍지만 신분증명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만 알아가든,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하여 재미 만을 골라내어 알아가든 특이한 소재와 함께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이다.

너는 누구냐? 나?. 신분은 꼭 눈에 보이는 증명서로만 존재하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너는 나에게 꽃이 되어 나와 너만을 위한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 피어날지니 누가 나를 불러 줄까? 신분증명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와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영엄마 2006-01-1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터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