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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 - 그림 속 여자, 그녀들의 섹슈얼리티
신성림 지음 / 시공사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현실의 여성에 만족하지 못한 조각가는 자신의 관념과 환상대로 아름다운 여인 갈라테이아를 만들어 깊은 사랑에 빠졌다. 피조물 여인(몸)에 대한 사랑에 신이 감동한 걸까? 이 딱딱한 조각품에 생명이 부여되고 피가 돌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조각해낼 수 있는 조각가에게 현실의 여성들은 지나가는 대상에 불과하고, 피조물 갈라테이아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일 뿐이다. 갈라테이아의 눈은 남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여받은 생명에 대한 감사로 의미없이 조각가를 향하여 포옹할 뿐이다.
고대조각가 피그말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낸 '장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갈라테이아의 다리에는 생명이 깃들지 않아 여전히 딱딱한 조각대 받침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끝까지 수동적이다.
또 다른 화가 '마그리트'는 피그말리온 그림에 '불가능에 대한 시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 남성의 잣대와 관념에 의해 여성(몸)을 재단하고 만들어내지만, 남성이 절대 임신할 수 없는 것처럼 남성의 환상과 관념에 의해 되풀이되는 여성의 완전한 몸은 불가능한 시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환상과 관념만으로 여성의 몸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재단되고 만들어진다. 대체 왜? 어떻게?
<여자의 몸>은 '그림 속 여자,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야말로 그림 속 여자들, 미술 작품속의 여자들 이야기요,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몸)이야기다. 여성의 의지대로 그려진 그림이라고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7~1651)의 그림뿐이다.
'태초의 몸, 그녀는 왜 빛나는가?'라는 주제에 의하여 거론되는 여자의 몸. 그녀의 허리, 그녀의 손, 그녀의 젖가슴, 그녀의 눈, 그녀의 입, 그녀의 머리카락, 그녀의 엉덩이, 그녀의 발과 다리, 그리고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그녀의 몸 이야기다.
책 내용을 가닥 잡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그림 한 점을 더 거론해야만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의 다른 이름은 '회화의 알레고리로서 자화상'이다. 화가 자신을 그린 것인데, 나만 그럴까? 화가에 대한 아무런 상식없이 이 그림과 만났을 때 여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자기가 그리는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결연한 의지의 한 인간만 보일뿐이다.
화가의 몸에서는 여성으로서 연약하거나 요염한 모습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붓을 쥐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있고, 붓만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거머쥘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인다. 그리고 팔레트를 쥔 손도 어깨부터 아주 튼튼하여 세상의 많은 일에 맞설 수 있어 보인다. 몸은 쓸데없는 살집도, 육감의 살집도 전혀 보이지 않고 아주 당당하고 굳건해 보인다. 남성에 의해서가 아닌 여성 스스로 그려낸 여성이다.
화가는 그림 그리는 것에만 몰두할 뿐 관객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오직 칼 대신 선택한 붓과, 붓으로 난폭한 앗시리아 군대의 대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유디트를 잔혹하게 그릴 뿐이다. 아름다운 유디트는 자신의 나라에 침입하여 수많은 남자와 아이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한 홀로페르네스를 죽여 유대민족을 구했다. (우리의 논개 이야기와 기본적인 이야기가 비슷하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유디트의 영웅적인 모습보다는 섹스로 남자를 유혹해 살해한 에로틱한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어 음탕한 여자로 입에 올리고, 그림으로 그렸으며, 즐겼다. 그래서 이 여성 화가는 최대한 여성을 없애고 가장 잔혹하게 유디트를 그렸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명망 있는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다 강간당한 뒤 재판까지 끌고 갔지만 재판과정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된 화가 자신의 이야기였다.
남성과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환상과 관념에 대한 복수의 칼날대신 선택한 붓이었다.
만약 화가가 발끝까지 이 그림의 구도를 잡았다면 치마는 복사뼈쯤에서 끝나고 다리는 신발을 신고 당당하고 끄떡없이 서 있지 않을까? 남자들의 성에 의해 유린당한 수많은 중국인들의 전족이 아닌 언제든 자신의 의지대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남자들이 원하는 각선미보다는 살아가는 동안 지구의 둘레를 4바퀴나 돌아도 끄덕 없는 '삶의 다리'로서 말이다.
나의 이런 추측이 지나친 걸까? '피그말리온 신화'와 '아르테미시아의 붓을 든 손'이 많은 화가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며 미술을 거론하는 책마다 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에 대하여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간 몰랐던 어떤 갈래들이 가닥 잡혀지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은 대부분 화가들이 남성이었던 서양미술사의 '명화'라는 찬사를 얻고 있는 그림 속 여자들을 통하여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까지 갖게 한다.
인간은 생명과 진화를 되풀이하면서 일정한 모습을 갖추었다. 보이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태어난 자궁을 가진 여성의 본질을 자기들만의 관념으로 꿈꾸고 만들어 냈다. 그래서 갈라테시아는 얼굴부터 생명을 얻는다. 여성의 가능성은 나중 문제고 늘 눈에 보이는 미모와 '여성의 몸'이 우선인 것이다. 갈라테시아의 다리는 생명을 얻건 말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하간 남자하면 한 인간을 우선 떠올리지만, 여자하면 인간의 본질보다는 '몸'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여자의 몸'은 항상 민감하다. 서양 미술사에서 지난 날 대부분 화가가 남성이어서? 꼭 그럴까? 이 책은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그림 속 여자들을 통하여 여성의 자아인식의 변천사까지 아울러 볼 수 있게 한다. 이야기들은 그림 속 여자들 이야기만이 아닌 현재 우리의 이야기로 날카롭게 이어진다.
앞표지는 머리를 잡은 여인이 등을 보인 채 서있고 뒤표지는 강간당한 성에 대해 복수의 칼날 대신 붓을 든 손, 즉 자화상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표지다. 여성의 머리는 무엇이었으며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남자들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여성을 자신들의 관념으로 꿈꾸고 만들어 냈다. 면사포는 여성의 사회성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차도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