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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풍경 2 1920-1940 - 백두산을 찾아서
민태원 외 지음, 이지누 엮음 / 호미 / 2005년 11월
평점 :
한 세기 전,1898년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글로는 형용할 수 없고 사진으로도 전할 수 없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붓이 필요할 뿐이다!"
"호수는 마법에 걸린 듯 평온한 적막에 쌓여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생명이 숨쉬고 있는 듯했다. 뭔가 강렬한 생명체의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말을 타고 백두산을 향하면서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고 백두산 천지 앞에서의 숨 가쁘고 벅찬 감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의 위용에 놀란 것일까? '민담수집'과 '조선 연구'의 목적으로 1898년 우리나라에 왔던 러시아 작가 가린 미하일브로스키가 남긴 기록을 좀 더 보면 이렇다.
"여러 가지 물건을 조금 값이 비싸게 팔려고도 하련만은 그들은 오히려 유쾌하게 우리를 대할 뿐 솔직하였다/ 학동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특히 습자의 필법이 훌륭하다. 그것을 보자니 조선인은 매우 쓸모가 있으며 재주가 있는 민족이라는 감상이 일어났다...
조선의 문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내의 글이요. 하나는 여자의 글인데, 사내 글은 한자요, 여자 글은 조선 글이다. 조선 글은 전 국민의 반수는 안다./ 길가의 조선농부들은 산간에서 흐르는 조그만 계류도 버리지 않고 재치 있게 활용하여 물레방아를 돌린다."
- 책 속에서
가린은 9월 13일 두만강에 이르렀고 10월 18일까지 40여 일 동안 조선 땅에 머물면서 이방인의 눈으로 백두산과 조선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가린을 통하여 만나는 1898년의 조선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방인이 느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백두산 주변 풍광은?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이 백두산을 기행하면서 자세히 적어 남기고 있지만 이국인 가린이 남긴 글에 자꾸 눈이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 가장 관심 있게 보아야 할 것은 여행자의 시각이다. 자기가 교육받고 소비하던 문화만이 우월하다는 식의 문하절대주의는 여행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자신이 살아 온 환경보다 못한 곳을 여행할 때에는 오만해지기 쉽고 그보다 나은 곳을 여행할 때는 비굴해지기 쉽다.
이러한 것은 지극히 소극적인 여행일 뿐이다. 그러나 여행이란 다양한 문화와 모습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린이 조선을 이해하려는 관점은 아주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엮은이의 기행문 설명 글
그렇다. 이 이방인은 철저하게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여행하고 있는 지역의 문화와 일정한 거리를 두되 투명한 유리창을 통하여 보는 것과 같다.
여행자의 눈빛은, 여행하는 동안 자기가 머무는 곳에 최대한 흡수되면서 자신이 살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궁금해 하고 이해하려는 배려가 자주 보인다. 그리하여 여행하는 동안 사소한 것들에게까지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린의 기행문은 조선의 다른 지식인의 글보다 길다. 그러나 날짜별로 비교적 세세하게 기록한, 50페이지를 넘기는 글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이미 한 세기를 넘겨 버린 세월 속에 묻혀져 있던 우리의 모습이요, 분단으로 반세기가 지났지만 갈 수 없는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이방인이 우리 땅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글 속에 당시 조선의 산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름답고 빼어나다' '정다웁고 재미있는(지혜롭고 재치있는) 백성이다' 등등. 여행자는 자주 출현하는 호랑이 때문에 여정을 미루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광에 감동하고 조선 사람들이 들려주는 민담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국의 이방인, 여행자 가린의 자세한 기록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근대 우리의 모습과 그 당시 백두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가린의 글은 당시 우리나라에 대한 세계의 눈빛이며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20~1940년 백두산,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민족의 희망의 이야기
<잃어버린 풍경- 백두산에서>는 민족의 명(영)산, 백두산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집이다. 모두 9편을 모아 묶었는데, 당시 내로라하는 조선의 지식인들의 글 8편과 이방인 가린의 글 한편이 실려 있다.
민태원, 최남선, 박금, 이은상 등의 글인데 당시 이 기행문들을 잡지나 신문들이 서로 실으려고 다투었다고 한다. 글들의 배경이 되고 있는 1920~1940년은 국권을 상실한 울분이 컸고, 그리하여 민족의 명(영)산 백두산에 희망과 함께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렇게 모아졌으리라.
누구의 글이든 백두산을 답사하여 남긴 글들은 비교적 꾸밈없고 소박하며 담백하다. 또한 당시의 지식인들이 남긴 글들은 오늘날의 문장처럼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화려한 수식어는 최대한 배제한 단아함과 간결함이 돋보인다.
양념을 최대한 쓰지 않고서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려 소박하지만 깊은 맛의 정갈한 음식 같달까? 그런데 글들은 편안하다. 그리하여 잔잔하게 읽어 나가다가 수많은 활자 속에서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희열이 감동스럽다.
세월 속에 이미 많이 변해 버렸고 분단과 함께 우리가 미처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 북한의 당시 모습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어서 가치 있는 자료들로 행간을 옮기는 눈길이 무척 아쉬웠다. 마음으로는 선지식들이 글로 남긴 근대 조선의 여정을 모두 내 안에 담고 싶었다.
제한적인 사랑보다 차리리 애틋한 그리움으로!
암울한 시기에 민족의 정기를 품고 있는 백두산을 기행하며 기록으로 남긴 선지식들의 글 덕분에, 다시 우리가 읽기 편하도록 작업하여 돌려준 엮은이 덕에 만날 수 있는 행복이 크다.
한 해 동안 5만 킬로미터가 넘게 남녘땅을 돌아다니지만 나는 아직 금강산과 백두산을 가보지 않았다... 약속은 간단한 것이었다. 남녘땅을 쏘다니듯이 그렇게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것 같으면 가지 말자는 것이었다. 불쑥 생각나면 지리산을 오르거나 설악산을 가듯 그렇게 가지 못할 것이라면 아예 사랑을 시작하지 말자는 것이다.
제한적인 사랑을 하기보다 차라리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겨 두는 것 또한 깊은 사랑 못지않은 진한 사랑의 방법이니까 말이다... 이제 그리움은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가고 싶은 것이다... 내가 가지 못했으니 사진도 없다. 그것이 아쉬워 아등바등 거렸으나 오히려 사진이 없는 것이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행문집을 엮으며, 엮은이 이지누 머리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