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일상의 풍경
안해룡 지음, 리만근 사진 / 현실문화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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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꼴망태와 꼴을 메고, 한가로이 시골길을 가고 있다. 저 멀리 야트막한 산이 있고 노인 뒤에는 하얀 염소가 뒤따르고 있다. 벼는 쑥쑥 자라나 푸름을 더하고 있으며 작은 자갈이 구르는 한적한 비포장 도로에 지금이라도 버스 한대가 불쑥 나타나 먼지를 일으키고 달아날 듯 하다. 그럼 노인은 비켜서며 우리 쪽을 향해 설까?

북한의 일상을 담은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누군가 붙잡고, 묻고 싶다. 사진집을 펴기 전 이 표지를 보면서 산업, 문명이 덜 발달한 만큼 오염되지 않은 북한의 농촌 들녘을 생각했다. 또 말로만 들었던 친정 아버지의 고향 '함경남도 원산'을 막연히 떠올려 보았다.

▲ <북녘 일상의 풍경>표지 사진 '년로보장'
ⓒ2005 리만근
손가락 떨리는 강한 충격

"그럼 그렇지. 북한도 우리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칠순 친정 아버지께 실향의 세월은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일까?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 당신 소원대로 가고 싶을 때 가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간혹 우리에게 전해지는 탈북자들의 말처럼 죽을 만큼이야 되겠어?..." 이렇듯 막연한 기대감을을 가지고 사진집을 열었다.

<북녘 일상의 풍경>이란 사진집의 표지를 장식한 이 사진의 제목은 '년로보장'이다. 우리말로는 '정년퇴직'에 해당하는 순수 북한용어로 정년퇴직한 노인이 한가로운(?) 북한의 들녘을 걷는 모습이다. 북한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에 대한 호기심에 사진집을 구했지만 우리 농촌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에 다소 실망했다.

그러나 책머리에 밝힌 사진가 '리만근' '안해룡'의 긴 말도 읽지 않고 우선 호기심만으로 설렁설렁 넘겨보다가 손가락이 떨리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 할 말이 없었다. 더 느낄 감정조차 없었다. 다만 충격이었다. 사진집 속에 있는 사진들은 더러 보아왔던 우리의 1920년 1930년...동족상잔의 아픔, 그 피난민 시절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사진 설명을 따라, 혹은 사진마다 한쪽 귀퉁이에 새겨진 날짜는 11 6 '02...그러니까 2002년 11월 6일인가? 우리들의 뜨겁던 월드컵 함성, 붉은 물결. 물질적, 문화적으로 풍요 속에 있던 우리들의 붉은 함성이었다. 그해는.

그러나 우리의 한쪽은 더 모질게 살아내야 하는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쩜 저 노인은 친정 아버지의 어릴 적 동무일지도 모른다.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은 철저한 조직의 감시 속에서 살아 내 긴장되어 있고 자신의 남은 생을 보장해주는, 생명 줄이나 다름없는 염소를 묶은 끈을 바짝 거머쥐고 있다. 이 염소는 자신은 물론 온 가족에게 없으면 안 될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사유재산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북한에서 최근 몇 년 전부터 염소를 개인재산으로 허용해주고 있다.(염소 외에 몇 가지를 최소한으로) 그리하여 능력이 있는 가정에서는 염소를 사서 키울 수 있으며, 새끼라도 낳는다면 대단한 재산증식이다. 젖을 짜서 식구들에게 먹일 수 있으며,급하게 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장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다. 염소는 노인에게 그런 존재였다.

한가로움 뒤에 숨어있는 북한 실정 고스란히

다른 사진 한 장, 땔감을 둘러맨 사람이 어미염소 한 마리와 새끼 염소 두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있다. 어미염소는 제 머리보다 크게 퉁퉁 불은 젖을 헝겊으로 꼭 싸매고 있다. 젖몸살이라도 난걸까? 아니, 아니다. 새끼 염소가 빨지 못하도록 꼭 싸맨 것이다. 새끼 염소가 빨아 먹어치우면 가족에게 줄 것이 없다. 염소에게는 매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이 살자면. <212페이지 사진, 염소젖싸개>

논 한 귀퉁이에 북한 주민들은 먹을 수 있는 '피'를 심고 거둬들여 식량이 바닥난 겨울에 '피죽'이나 '피 쌀'을 만들고 끓여 목숨을 연명한다. 식량이 부족한 북한 주민들에게 '피'는 버려진 잡초가 아니라 주린 배를 채워 목숨을 연명하는 소중한 곡식이 되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한 뼘의 크기, 잡초 한포기라도 자랄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씨를 뿌린다. <128페이지, 피 수확/110 페이지, 뙈기밭 수수재배>

사진집의 표지 사진을 실제로 보면(A4 용지 크기에 가까움) 사진 한 장에 담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능선보다는 계단식으로 밭을 개간해 한 톨이라도 더 거두어 들여야 하는 절박함과, 사람만큼 헐벗은 산일망정 귀한 땔감마련을 위해 오르내리는 헐벗은 사람들의 주린 배와 겨울바람 속에 드러난 맨살들이 보인다. 언뜻 한가로운 표지사진은 이런 북한의 실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사진 한장 한장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마음 아프다. 걸러지지 않은 현실 그대로를 고스란히 알려주는 그 모습들을 통해 헐벗은 북한 보통 주민들의 실정을 보며 마음이 한참 아팠다. 할 말은 없지만, 무언가 끝없이 나오려는 말들을 참고 참아야했다. 지나친 나의 감상일까? 감시의 눈을 피하여 한 사진가가 셔터를 눌러 우리에게 비로소 알려지고 있지만, 미처 다 담지 못한 숨은 현실은 또 오죽할까 싶다.

꾸며지지 않은 '북한 민중 다큐멘터리'

이 사진집은 90년 대 말부터 10여 년간 북한에 머물게 된 어느 사진가가 렌즈를 들이 댈 수 없는 상황에서 숨을 죽여 가며 수천 번 눌렀던 셔터, 그중에서 103점을 묶어 낸 것이다. 우리의 서민에 해당하는 북한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비교적 다양하게 담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중 일부에 해당할 것이다. 미처 전해지지 못한 아픔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간 우리에게 알려진 북한의 자료들이 어떤 목적을 두고 제시된 선전용이었거나, 북한이 제시하는 일정 공간, 일정시간에 감시를 받으며 눌러진 셔터라면, 이 사진집 속에 있는 사진들은 발각되는 순간 생명까지 위험한 환경조건에서 조심스럽고 살벌하게 눌러진 셔터들이다. 그런 만큼 북한에서는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꾸며지지 않은 북녘 일상의 풍경, '북한의 민중 생활사 다큐멘터리'다.

북한의 민중들, 그 보통 사람들의 현실, 이제까지 어떤 곳에도 공개되지 않은 북한의 현실이 이 사진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혹시 이산이나 실향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월은 한없이 흘렀건만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고향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사진집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겨울이면 추위에 떨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혹은 그 때보다 더 헐벗은 산천을 보며 눈시울 적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픈 마음에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김없이 우리의 한쪽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정치보다는 살아가는 것들이 더 절실하듯 이들에게도 먹고 사는 것이 더 절실하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떠나 우리들의 반쪽으로 우리들이 안아야만 한다.

리만근과 안해룡

▲ 북녘일상의 풍경
ⓒ리만근
리만근은 사진가다. 1990년 대 후반부터 수 년 동안 북한에 머무르면서 사진 촬영할 기회를 얻었다. 북한의 보통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일상을 꼼꼼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또 사진에 담겨 있는 세세한 정보들을 철저하게 확인하면서 메모했다. 그의 사진 작업은 남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북한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에서 나온 산물이다.(책 앞표지 안에서)

안해룡은 사진가이자 다큐멘터리 작가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재일동포 민족교육 문제에 관한 기록 작업을 10여 년이 넘게 계속해 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한국과 일본의 잡지,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리만근의 사진 작업 속에 담겨진 북한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리만근과 수차례 만나면서 그의 체험과 기록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책 앞표지 안에서)

이런 사진집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사진집은 그 특성상 일부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끌다 보니 어지간한 소신 없이는 출간이 힘든 현실이다. 게다가 이 사진집에 있는 사진 103점은 그동안 어디에도 공개된 적이 없는 북한 민중들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 한 장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나올 법 하다.

사진마다 촬영 장소, 촬영 년도, 북한 용어 그대로의 설명이 들어 있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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