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도둑 - 이상운 이야기집
이상운 지음 / 하늘연못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바쁜 봄날에도 씀바귀 찾아 논둑 몇 개를 바삐 다니시곤 했다. 계집아이인 나는 엄마를 잰 걸음을 따라 다니며 봄꽃들을 뜯었다. 운 좋은 날에 씀바귀가 제법 많이 뜯어지면 그것만을 데쳐 무치거나 김치를 담그곤 했다. 나는 호기심에 그것을 먹어 보고는 그 쓰디 쓴 맛에 정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섣불리 뱉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들일을 갔다 들어오는 길에 봄이면 씀바귀를 가을이면 고들빼기를 한 주먹씩 뜯어 오셨는데 다른 나물들과 섞어 데쳐 무치기도 했다. 섞어 무쳐진 다른 나물들은 혹시나 싶어 가려 먹어 보지만 그것들도 씀바귀처럼 썼다.

입맛 돋워 주는 데에는 씀바귀 이상 없다며 맛나게 잡수시는 어머니를 흉내 내어 먹어 보았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던 맛 이었다. 그랬다. 우려냈다고 하여도 그 맛은 쓰기만 할뿐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이를 한살 더하고 더하여 이제는 마흔줄의 나이에 접어들고 보니 내 스스로 찾아 즐기는 맛이 되었다. 친정어머니가 그랬듯 나 역시 밥맛없을 때면 이젠 스스로 씀바귀나 고들빼기를 즐겨 먹곤 한다.

쓰디쓴 씀바귀가 밥맛마저 떨어져 버린 입맛을 돋는 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어릴 적엔 무턱대고 입에 넣었다가 너무 써서 뱉고 싶었던 그 맛이었다. 하지만 몸에 좋다는 엄마의 말에 쉽게 뱉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결국엔 뱉어버린 그런 말이었다. 이상운의 <책 도둑>에는 씀바귀의 맛과 덕이 들어 있다.

이 책은 좀 불분명하다. 다섯줄로 시작하고 끝나는 글도 있으며, 다섯 페이지를 넘기는 글도 있다. 다섯줄이든 다섯 페이지를 넘기는 글이든 기지와 재치, 역설내지 독설은 쌉쌀한 맛이지만 몸에 좋으니 뱉지 말고 꿀꺽 삼키라던 어머니의 말처럼 일단 삼켜두면 약이 될 그런 이야기들이다.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만나는 그런 이야기들이지만 특유의 재치와 기지, 통찰은 쉽게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책 도둑>. 그가 말하는 책 도둑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 몇 줄 옮겨본다. 좀 더 많은 책 도둑의 확산을 장려하는 이상운에 동조하여. 지난 날 책 도둑이었으며, 여전히 책 도둑인 나인지라.

카메라폰의 급속한 보급으로 일본 서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책을 사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을 몰래 찍어 간다는 것이다. 카메라폰의 이용자수가 수 천 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으아악, 매출액이 격감하고 있다!" …도둑촬영을 즐기는 이 카메라폰 족들은 책 도둑들의 디지털버전이라 할만하다…책 도둑질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카메라폰 보급의 급증과 무관하게 고전적인 아날로그 책 도둑이 건재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카메라폰으로 훔치는 책이란 게 파편적인 정보들인 반면고전 책 도둑은 어쨌든 온전한 한권의 책을 가져갈 것이기 때문이다.(P.15)

책 도둑에 대한 이상운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하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책 도둑 되기를(읽는 것으로) 꺼리는 사람들도 이 책 도둑 편을 접하면 유쾌하게 자차하고도 남을 법한 표현이다. 책 도둑에 대한 그의 애교어린 표현을 보자.

이건 미국의 경우인데 한 조사에 의하면 가장 잘 없어지는 책이 성경이라고 한다.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아리송하기도 한다. 하느님을 가까이 하되, 단번에 화끈하게 가까워지기 위해서 하느님 이야기를 훔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일단 곤히 주무시는 하느님을 화나게 하여 주목을 끈 다음, "한번만 봐주세요. 네?" 하고 회개하면 정말 단번에 아주 가까워 질것도 같다.(P.16)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탐나는 남의 책을 어떻게든 섭취하려했으나 취하지 못한 애통함이나 은밀히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 승리감이 있을 것이다. 한때 자신도 책 도둑이었음을 이렇게 당당하게 변호한다.

대학시절 나는 자취방 책 더미위에 어느 유럽작가의 다음 말을 부적삼아 붙여 놓았었다. '이 책들은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두 빌려 온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별 효과는 없어서 책을 좀 잃어 버렸다.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장난으로 훔쳐간 것도 있다. 그중에는 지금 구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데, 그게 원통할 때면 내 수중에 들어 와있는 '놈'들의 책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P.17)

책 도둑에 대한 마무리는 이렇다. 결국은 책 안 읽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제발 책 좀 읽고 살자는 애정 어린 호소다.

훔치든 말든, 전과자가 되건 고수가 되건, 디지털이든 아날로그이건…그건 각자가 알아서 하기로 하고 어떻게 제발 책 좀 읽자. 먹고살기 어려워서 라고 핑계대지 말고. 무한 경쟁의 시대에 아무리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이라고 하지만 어찌 당장 돈이 될 것 같은 것들만이 인간의 재산이겠는가. 책은 좋은 친구여서 이랬다저랬다 변덕 부리지 않고, 절대 배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계산에도 철저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답을 해주니 이 또한 대단한 재산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읽기 싫으면 주변의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시라. 책을 선물하면 받는 사람이 정말 기뻐할 것이다. "으아악, 싫다 싫어!" 하고 고함을 치며 물어뜯으려 하는 짐승이 있거든 주저마시고 나에게 연락해주기 바란다. 만사 제쳐두고 내가 그를 안전하게 그가 있을 자리, 즉 동물원으로 운반해 줄 테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이상한 분들을 운반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P.18)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 성석제의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재밌다.

이 책을 만약 밥상이라고 한다면 :
신랄한 냉소 한 접시,
짭짤한 재미 한 대접,
야만성에 뜨거운 분노, 국그릇으로 하나,
쓰디쓴 웃음 한 공기,
달콤한 슬픔 반 그릇,
쌉싸름한 위트, 쌈밥용 야채형태로 여덟에서 스물,
익숙한 사물에 대한 기상천외의 통찰, 찌개냄비로 하나,
역시 익숙한 관계, 가치에 대한 색다른 해석, 큰 접시로 하나,
작가와 비슷한 사람들, 선각자들(커트 보네거트, 조나단 스위프트 등 등)의 유용한 충고, 깨소금, 콩자반 형태로 양을 잴 수 없음<뒤표지 글>


웃을 듯 말 듯 애매모호한 표정으로(책 안표지 작가 얼굴) 뻔뻔스럽도록 당연히 들려주는 이야기들. "하하하" 거침없는 이 웃음이 어울리는 이야기들 예순 여덟 꼭지가 이 책에 들어있다. 통쾌한 웃음으로, 책표지 안쪽에서 알듯 모를 듯 웃고 있는 작가의 미소로, 즐겁고 기꺼이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정곡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에 대하여 기꺼이 찔려 줄 용의만 있다면.

밥맛이 없어서 초밥을 먹기로 하였다. 입안에서 연어 알이 툭 상큼하게 터진다. 맛있게 다 먹고 문득 어딘가 끼어 있던 연어 알이 하나 툭 또 터진다. 상큼하게.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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