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동안의 표류
김갑수 지음 / 어문학사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오월동주'라고 했다. 다시 말해 같은 배에 타면 이방인끼리도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나라 백성으로 골육의 정을 나눴으니 산다면 같이 살고 죽는다 해도 함께 죽을 것이다. 이 감귤 한조각과 술 한 방울은 가히 천금처럼 소중한 것이니, 네가 관리하되 기갈이 심한 사람을 구하는데 사용하라."-책속에서

금남 최부(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을 바탕으로 한 소설 <오백년 동안의 표류>(어문학사 펴냄)에서 만난 한 부분이다. 정황은 이렇다.

1487년(성종 재위 중) 9월 '추쇄경차관'의 임무를 띠고 제주도에 간 최부가 이듬해인 1488년 윤 정월, 부친상으로 고향 나주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한다. 

최부와 그 일행 43명이 제주도를 떠난 것은 윤 1월 3일. 일행은 열흘 가까이 밥은커녕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최부는 배를 샅샅이 뒤지게 하여 황감(감귤) 50개와 술 두 동이를 찾아낸다.

조선은 신분과 계급이 엄격한 시대다. 최부는,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와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이 적대 관계로 한 배에 타 풍랑 앞에 서로 협력했음에서 유래한 '오월동주'의 예를 들어 신분과 계급 상관없이 가장 위급한 사람 먼저 구할 것을 명령한다. 

최부에게는 양반이요, 최고 상관자인 자신의 목숨이나 아랫것들의 목숨이나 똑같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때만이 아니다. 최부는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까지의 몇 달 동안 이 원칙을 고수한다. 최부와 그 일행 43명이 떠날 때의 그 인원 그대로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표류 당시 34세였던 조선 선비 최부의 이런 성품과 위험에 처할 때마다 발휘되는 기개, 통찰력이 바탕이 된 지도력 덕분이다.

또 한 가지,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도 결코 흔들림 없는 예(禮)와 효(孝) 때문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이들을 왜구나 첩자로 거짓 보고하거나 의심하던 중국인들조차 최부가 아버지의 산소 앞에 나아가지 못함을 함께 슬퍼하고 조선의 예(禮)와 효(孝)에 관심을 두니 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조선 선비로서의 최부의 참다운 면모나 굽힘없는 기개는 감동스럽다. 당시 이들의 굶주림과 기갈이 어느 정도인가. 돛도 이미 망가져버려 운명을 오직 하늘과 바람에 맡기고 있는, 물 한 방울 받을 수 있는 그릇 하나조차 없는 상황이다. <오백년 동안의 표류>에서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 입술이 타서 변색된 사람을 골라 감귤과 청주를 미량씩 배급했다. 그야말로 단지 혀만 적실 정도였다. 그나마 감귤과 청주는 곧 바닥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마른 쌀을 씹었다. 어떤 사람은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했다. 얼마 안 가서 오줌도 나오지 않게 되자, 오줌이 나오는 사람의 가랑이로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일이 벌여졌다. 표류인들의 가슴은 뜨겁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소리를 내기도 힘들어져 모두가 쉰 목소리로 속삭이는 형국이 되었다. 표류인들은 그늘을 찾아 엎드려 개처럼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 책속에서

북을 찢어 빗물을 받고, 입고 있던 옷의 물을 짜 마시는 등으로 최부 일행은 목숨을 겨우겨우 연명하다가 표류 14일 만인 윤1월 16일 중국 태주부 인해현 우두외양에 표착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일행의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해적과 강도, 최부 일행을 왜구로 몰아 출세하려는 일부 중국 관리들의 음해와 무고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135일간의 중국에서의 표류 또한 만만찮기 때문이다.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에 '제국과 인간'이란 역사소설을 연재 중인 시민기자이자 작가인 저자 김갑수는 최부의 인품과 <표해록>을 소설 형태로 잔잔하게 들려준다. 

이야기는 두 갈래다. 하나는 최부 일행의 표류나 그 기록인 <표해록>을 따라가는 것, 또 하나는 최부 기념사업회 답사 일행에 기록 작가로 참여한 신응천의 백선묘를 향한 사랑, 그 표류이다. 

최부 일행이 표류했던 500여 년 전 당시와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때문에 보충설명도 필요하다. 저자는 이 부분을 답사 일행 중 한사람인 교수, 기자, 대학생 등의 입을 빌려 들려줌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표해록>을 좀 더 쉽게 소개해준다. 

그리하여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고전 <표해록>이 쉽고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난 왜 표해록을 잊고 있었나?'하는 반성과 함께 '올 가을 표해록 한권 구해 읽어야지'하는 마음까지 먹게 할 만큼 말이다. 

 <동방견문록>,<입당구법순례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최부의 <표해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으로 바다와 중국을 표류한 최부의 여정이 담겨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혔거니와 문학사적, 사료적 가치가 높다.  
 
2006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90년대부터 <표해록>에 대해 연구해 온 북경대학 갈진가 교수는 <동방경문록>이나 <입당구법순례기>보다 <표해록>이 훨씬 우월하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중국 명나라 초기와 전기의 사회 상황,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과 수로, 풍습, 인물 등을 정밀하게 기록했기 때문. 

특히 '회통운하' 등 기록이 대부분 상실된 중국의 운하 연구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표해록>의 가치는 외국에서 먼저 인정했다. 최초 학술적인 번역은 '존 메스킬'이란 미국학자가 했다. 앞서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인 1769년에 <당토행정기>라는 이름의 번역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갈진가 교수는 답사 마지막 날 일정인 심포지엄에 참가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한국인은 최부를 모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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