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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
박영희 지음, 강제욱 외 사진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12월
평점 :
책 표지 주인공은 선박 수리공 황일천씨다. 지금은 선박 수리공인 그는 한때 배목수였다. 배목수로 살던 그때가 그에게는 호시절이기도 했다. FRP선이 일본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1985년 이전, '배목수'는 바닷가에서 목에 힘깨나 줄 수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군수한테 시집갈 테냐? 배목수한테 시집 갈 테냐?라고 처자들에게 물으면, 열이면 열 당연히 배목수한테 시집가겠다고 대답한다"는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호시절에 결혼도 하고 아들까지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조촐하고 한적한 삶을 꾸리고 있다. 벌이가 션찮다며 그의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진즉 대구로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1980년~1990년, 양복점과 양장점을 밀어낸 자리에 기성복 판매점이 들어서고, 재래시장을 몰아낸 자리에 마트가 우후죽순 들어서서 호황을 누리던 그 시절, 그리하여 이 땅의 소규모 상인들이 설 땅을 잃어가던 그 즈음에 황일천씨도 대책 없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배목수의 길을 접어야만 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며 그와 함께 구룡포에 남은 그 옛날의 배목수들은 이제 10명 남짓, 어제, 그제와 같은 여전한 일상인 오늘 하루(책 속에서) 그의 일당은 1만6천원이었다고 한다.
“산다는 게 참 묘한 기라. 저거(FRP선)이 그때는 나를 하루아침에 놈팽이로 만든 원수 같은 거였는데 지금 그걸 고쳐주고 있으니……. 세상 더러운 거 아이가?” - 그는 바다로 출근한다(선박 수리공 황일천씨 중에서)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시대의 장인들>(삶이 보이는 창)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세공사 김광주씨(사훈:'정밀세공·책임완수'), 제과제빵사 이학철씨(빵은 소녀를 닮았다), 이발사 문동식씨(가위질 반세기). 철구조물 제작사 김기용씨(밀리미터(㎜)와 싸우는 철구조물 제작), 자전거 수리공 임병원씨(자전거 빵꾸 때우는 거? 맹장수술하고 비슷해)다.
“손만 살짝 갖다 대도 토라지는 소녀를 닮았다고 할까요. 빵처럼 변덕이 심한 식품도 드물 것입니다. 특히 공갈빵은 구울 때마다 맛이 다른데 날이 덥거나 추울 때, 맑은 날과 흐린 날 등 그날그날의 기후변화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 빵은 소녀를 닮았다(제과제빵사 이학철씨)
“자전거 앞바퀴 살은 스물세 개를 걸고 뒷바퀴는 마흔 개를 거는데 이유는 간단해. 뒷바퀴에 힘이 더 실리기 때문이야. 우리네 인생도 이런 거 아닐까. 진짜 힘은 앞에서보다 뒷심에서 나오잖아" - 자전거 빵꾸 때우는 거? 맹장수술하고 비슷해(자전거 수리공 임병원씨)
저마다 다른 터전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자전거 빵꾸 때우는 것이 맹장 수술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자전거 수리공 임병원씨의 말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을 다한다는 것, 자신이 선택한 일이 물밀듯이 밀려든 외국산과 거대자금이 양산한 산물에 밀리고 말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우직하게 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조성기, 강제욱 등 6명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와, 르포집 <길에서 만난 세상>(국가인권위원회 기획)과 <아파서 우는게 아닙디다>(삶이 보이는 창) 등 주로 우리 시대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인권에 관한 르포를 주로 썼던 박영희씨가 이들의 이야기를 글로 기록했다.
이들은 이 책을 왜 기획하게 되었을까?
지난해 12월, 대구민예총 주최로 경북 대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종합전시회'가 열렸다. 연극, 사진전, 미술 등 여러 장으로 나누어 평범한 사람들을 재조명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그런 전시회였다.
주최자인 대구민예총은 전시회에 앞서 주인공 몇 명을 선정, 그들을 기록하고자 했다.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시대의 장인들>은 이렇게 나온 책이다. 그런데 대구민예총으로 하여금 평범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게 한 숨은 공로자가 따로 있다. 책 첫머리에서 먼저 만나는 사람, ‘사진기 수리공’ 김성민이다.
2006년 9월 29일, 대구 가톨릭병원에서 한 사진기 수리공이 죽었다. 사람은 물론 기술이고 물건이고 예술까지 서울로 서울로 죄다 몰려드는 판국에, 되려 서울의 고장 난 카메라들을 대구로 끌어 내리게 할 만큼 전국의 사진가들에게 유명한 사진기 수리공 김성민이 자신을 덮친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죽은 것이다.
그가 생을 마감하던 그날, 그가 숨을 거둔 병실 복도에는 그가 고쳐 부활한 사진기로 찍은 사진 100여 점이 걸려 있었다. 사진가 40여 명이 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마련한 ‘회복 기원 사진전’이란 타이틀과 함께
"… 돌아앉아 사진기 수리에 열중인 그의 뒷모습이 그립다. 우리는 성민이의 노력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종합전시'를 통해 사진 도시 대구의 꿈을 이뤄보려고 아등바등할 작정이다. 이 부박한 세상에 기어코 일하는 사람들의 영웅담 하나 만들어보련다…." - 김성민 추모의 글 중에서
그 후 2007년. 대구민예총은 김성민의 죽음을 추모하는 한편, 한 사진기 수리공과 같은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위대한 삶에 바치는 전시회를 기획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종합전시회'와 이 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돈보다 건강이 우선이지’, ‘많이 가진 것 없어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 소중한 거야’ 때로는 이처럼 부족한 것이 훨씬 많은 삶을 애써 위로하지만, 써야할 돈이 벌 수 있는 돈을 상회할 때면 허공중에 사라지는 위안이 되고 만다.
‘그래도 삶의 순정과 진실을 절대로 놓아선 안 되지.’ 돈 때문에 성급해지고 기가 죽으려는 순간을 위로하는 한마디를 책의 발문에서 만났다. 혹은 책속의 사람들, 혹은 내가 오늘도 만날 이웃들을 위로할 한마디라고 추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 옛날에는 정부에 찍혀 탄압받는 단체였는데, 기특하게도 국민세금을 타서 뜻 깊은 행사를 연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세상은 민주주의로 여전히 돌아가는데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통계지수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라고 하는데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달그락거린다. 달그락 달그락.허나 터덕거려도 기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가야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사진전, 혹은 책을 여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