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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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발견되기 전까지는, '훈민정음'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만든 원리와 방법을 몰라 그 설이 분분했다. 그러다 보니 세종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 문창살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지기까지 했다.

임금은 화장실에 가지 않고 '매화틀'이라는 도구를 가져다가 용변을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반박이 가능한 설이었지만, 그 당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명쾌한 반박조차 어려웠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고서야 온전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 책 속에서

<28자로 이룬 문자 혁명 훈민정음>에서 만난 대목이다.
 
어린 시절, 어린 우리들 사이에서도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가 문살에서 힌트를 얻어 한글을 만들었다더라" 며 왜곡되어 회자되었던 터라 씁쓸한 마음으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가 훈민정음 창제의 바탕이 된 세종대왕의 '듣기능력'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 한 편을 만났다.

설날이나 동짓날에 모든 신하들이 모여서 임금에게 배례를 하고, 임금이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하는 회례연이 근정전에서 열리고 있었다. 오늘날의 송년회와 신년회 정도가 될까?
 
음악 책임자인 박연과 신하들 사이에 중국 악기를 조선식으로 개량한 편경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편경은 종묘제례(중요 무형 문화재 제56호) 때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 문화재 제1호)에 쓰이는 악기이다. 해마다 5월에 종묘에서 시연되는 종묘제례에서도 볼 수 있는 악기로 돌이나 옥을 갈아 만든 경쇠를 매달아 만든 것이다. 논쟁 속에 편경이 연주되었다. 
 
세종대왕: "중국 편경의 경쇠는 소리가 조화롭지 아니한데, 우리가 만든 편경의 경쇠는 옳게 된 것 같다. 경석이란 돌을 얻어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소리가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12율(한 옥타브를 12로 나눈 것)을 만들어 음을 섬세하게 한 것도 놀라우니 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된 일이냐? 9번째 매가 내는 소리가 약간 높지 않으냐?"

세종의 이런 질문에 음악 총 책임자인 박연은 그만 깜짝 놀란다. 미처 몰랐는데, 왕의 이런 질문을 듣고 보니 과연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득달같이 편경을 살펴보던 박연은 왕에게 이렇게 아뢴다.

박연: "다 갈지 아니한,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어서입니다."

박연은 즉시 물러나 먹이 남아 있는 부분을 갈아 없앤 후 연주를 한다.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먹을 갈아내고 연주하자 소리가 바르게 되었음을 물론이다. 먹물이 다 말랐다고 해서 연주를 하였는데 마르지 않은 먹물이 아주 살짝 남아 있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발생한 미세한 음의 차이를 세종대왕이 잡아내고 만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10년 전인 1433년 음력 1월 1일의 실록 기록이다.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의 저자 '김슬옹'은 이런 일화들과 함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필요성을 느낀 것도, 창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랬다. 당시 진정한 글자로 인정받았던 한자는 우리의 다양한 소리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글자였다. 학문 도구로 쓰는 것도 불편할뿐더러, 조사나 어미가 거의 발달하여 있지 않고 하나의 낱말을 소리의 높낮이로 구분하는 중국말에나 적합한 문자인지라 우리의 풍부한 입말을 담아 낼 글자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요구하였던 것이다.

한자의 불편함 때문에 한자를 우리식으로 바꾼 이두까지 생겨났건만, 한문을 배울 수 있는 사대부가의 사람들에게는 그럭저럭 쓰임새가 있었지만, 먹고 살기 바쁘고 신분 때문에 배움의 제약을 받는 하층민들에게는 한자만큼이나 깨치기 힘든 글자였으니 있으나 마나였다.

우리의 다양한 입말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하는 한자의 아쉬움을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공로자 중 한사람이요, '훈민정음 해례(국보 제70호, 세계 문화유산)' 서문을 쓴 정인지는 명쾌하게 표현한다.

정인지: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

이렇게 말이다. 세종대왕도 이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상들이 글자로 인정한 글이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까닭에 우리 입말에 맞는 소리글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고, 바탕이 되고,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훈민정음에 매혹되었나

<28자로 이룬 문자 혁명 훈민정음>은 '언문'이란 이름으로 주로 쓰이다가 근대 이후부터 '한글'로 불린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당시의 일화들이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마치 생중계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소개된다.

훈민정음이 주인공인 만큼 당연히 훈민정음에 대한 이런저런 상식들이 이 책의 중요한 뼈대이다. 훈민정음은 무엇인가? 어떤 필요성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원리는 무엇인가? 왜 하필 세종대왕이 창제해야만 했을까? 훈민정음의 미래는 어떠한가? 에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창제를 도운 핵심 공로자들, 보급의 일등공신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사대부가, 최만리와 세종과의 논쟁 등으로 살을 더하는 식이다.

저자: 이제 훈민정음이 한국인만의 문자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한글 민족주의가 아니라 훈민정음 보편주의 누리가 펼쳐진 것이다. 존 맨은 "훈민정음은 모든 알파벳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중략) '훈민정음 해례본'이 '서울대 고전 200선'에도 끼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워 책을 소개하고 해설하는데 힘을 쏟았지만, 그 뒤 방향을 틀어 문자를 둘러 싼 거대한 맥락을 파헤치는데 주력했다.(하략) - 머리글 중에서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훈민정음을 연구해 온 저자 김슬옹의 훈민정음에 대한 논리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애정이 녹록하게 녹아있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1986년 한글관련 학사학위를 시작으로 박사학위, 한글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발가벗은 언어는 눈부시다>,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외 여려 권의 관련 책을 쓰기도 했다.

몇 번이고 거듭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일화들도 재미있었지만, 훈민정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일반 백성들을 위해 허울뿐인 제도를 만들기보다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며칠 만에 깨우칠 수 있는 백성들의 뼈와 살 같은 문자를 만들고 싶어했던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의 꿈도 깊은 울림이 되고 있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최근 몇 년간 활발하게 출판된 우리말 관련 책들에 관심을 두고 읽었으면서 왜 단 한 번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존 맨은 독일 연구와 과학사를 전공한 영국의 역사가이다. 몽골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알파베타>, <고비 사막을 따라가며>, <서기 1000년의 세계 지도>,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구텐베르크 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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