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죽음 - 오래된 숲에서 펼쳐지는 소멸과 탄생의 위대한 드라마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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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갈나무 투쟁기>를 통하여 식물의 치열한 생존을, <숲의 생활사>를 통하여 숲 속 생명들의 위대함을 감동 있게 보여 준 '숲 학자 차윤정'의 새 책 <나무의 죽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나무의 또 다른 면들을 보여 준다.

저자는 "큰 나무의 죽음은 숲에 주어지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말한다. 나무는 죽고 쓰러지고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과정을 거칠 뿐이지만, 죽은 나무 한그루는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생물들에게 먹이로서, 주거지로서 활용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제 수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나무. 이 나무는 단지 5%의 살아있는 세포로 유지되다가 완전히 죽는 순간 40% 이상의 살아 있는 세포로 채워지게 된단다. 죽어 쓰러진 나무 한 그루는 썩어서 흙이 되거나, 기껏해야 땔감으로 밖에는 쓰이지 않을 것 같은데….

이 나무 한 그루의 죽음은 숲과 또 다른 생명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딱따구리의 막중한 임무는 나무를 죽이는 것?

 "고요한 숲에 뒤영벌 한마리가 긴 산란관을 나무줄기에 꽂습니다. 이 작은 벌의 산란이 곧 나무에게 어떤 일을 야기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맵시벌 또한 나무줄기에 산란관을 꽂고 알을 낳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무속의 애벌레 몸속에 산란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줄기에 산란관을 꽂는 곤충들은 참 많습니다. 왜송곳벌의 소름끼치는 송곳은 어떤 단단한 나무도 비켜갈 수 없습니다. 목질 속의 애벌레가 깨어나면서 나무속을 갉아먹기 시작할 것입니다. 유지매미의 애벌레는 나무속에서 깨어나 나무 굴을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 나무뿌리를 먹고 자랍니다. 나무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런 시련들은 언젠가 큰 나무를 쓰러뜨리게 될 것입니다." - 책 속에서

나무에 산란관을 꽂고 알을 낳는 수많은 곤충들의 애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딱따구리는 단단한 나무를 뚫기에 적합한 특수한 뇌 근육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속 20~25km의 속력으로 나무를 두드려도 정교한 연골로 이루어진 뇌 근육은 충격을 흡수하여 머리가 부서지는 것을 막아준다.

딱따구리는 왜 하필 딱딱한 나무를 통해서만 먹이를 얻는 생존 방식을 선택한 걸까? 그 이유를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여하간 딱따구리에게 걸린 나무는 재수가 없어 보인다. 인간들이 연장으로 구멍을 뚫듯,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에 모질게 구멍을 뻥 뚫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을 깊이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얄팍한 생각일 뿐이다.

딱따구리는 아무 나무나 좋아하지 않는다. 구멍을 내려면 우선 부피가 커야 하는데, 그렇다고 부피가 크다고 모두 좋아하진 않는다. 재미있게도 딱따구리가 좋아하는 나무는 오래된 숲의 부피가 큰 나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나무에만(우리들 눈에는 살아있는 나무로 보일지라도 이미 죽은) 구멍을 뚫는다. 그것도 최근에 죽은 나무를 우선적으로.

더욱 명백한 사실은 죽어가는 나무의 본격적인 분해는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으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딱따구리의 부리에는 나무를 부패시키는 다양한 곰팡이 포자가 묻어 있고, 깃털에는 목재에 구멍을 내고 썩히는 다양한 곤충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딱따구리가 나무에 앉는 순간, 이 균들은 나무에 상륙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숲 속에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죽은 나무'

새나 바람을 통해 날아든 이끼 홀씨와 지의류 균에 몸의 일부를 내어 준 나무, 그리하여 이끼가 파랗게 돋은 나무는 이미 죽었거나, 오래전부터 죽음을 향하고 있던 나무다. 이런 나무 중에서 딱따구리에게 선택받은 나무는 죽음을 훨씬 앞당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무의 남은 힘이 쇠잔해질수록 나무에는 훨씬 많은 생물들이 깃들 수 있게 된다.

죽은 나무는 딱따구리에게 선택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제 몸을 완전히 다른 생명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죽은 나무를 차지한 수많은 생물들에 의해 나무는 산산이 부서지면서 흙으로 흡수되어 새로운 생명들의 원천이 된다. 나무로서도 자연으로서도 딱따구리의 부리는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죽은 나무가 수많은 생물들에게 제 몸을 내어 준 후, 땅으로 몸을 누이는 순간, 이제까지는 나무를 스치기만 했던 새로운 생물군들이 주변으로 몰려든다. 나무가 수평으로 서 있을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작은 곤충들이 몰려들고, 심지어는 너구리나 뱀처럼 큰 생물들이 나무 등걸을 터전으로 삼기도 하면서 쓰러진 나무 주변에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넘어진 나무 등걸이 썩어 가는 동안 또 다른 나무들의 낙엽이 쌓여 언덕을 이루면서 숲에는 새로운 지형이 형성되기도 한다.

땅위에서만? 계곡에 쓰러진 나무는 물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또 길게 누운 나무 등걸에 새로운 것들이 걸리고 쌓이기를 되풀이 하면서 물속에 작은 섬과 같은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나무 한그루가 만들어낸 새로운 지형은 이제까지 살던 생물군과는 또 다른 생물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죽은 나무 한그루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생명의 드라마다.

<나무의 죽음>은 수명을 다한 나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나무가 어떤 과정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지를 감동스럽게 보여 준다. 숲 박사 차윤정은 오래된 나무 한그루가 선채로 죽고, 쓰러지고 분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나무 한그루의 죽음을 전후한 주변 생물들 간의 관계, 죽은 나무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는 그러나 축복 받은 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는 죽어 다양한 생물들에게 자신을 내어줄 때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목이 사는 고지대는 건조하고 추워서 자신을 쪼개 흙으로 돌려보내 줄 조력자들이 부족합니다. 나무는 그저 세월에 풍화되어 하얀 백골로 버틸 뿐입니다." - 책 속에서

낙엽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자연'

산림자원학과 산림환경학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생명의 '숲 가꾸기 운동본부'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가 들려주는 생생한 환경 생태계 관련 지식도 재미있지만, 이런 지식들을 뒷받침 해주는 150여 장의 관련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만만찮다.

처음으로 보았다. 딱따구리의 다양한 구멍들과 나무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들, 그리고 나무의 수많은 모습들을 말이다. 더불어 나무를 둘러싸고 수많은 생물들이 벌이는 치열한 생존의 모습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단지 5% 정도의 살아있는 세포로 유지되던 죽은 나무가 본격적인 분해가 이뤄지기 시작하면 40% 이상의 살아있는 세포로 채워진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무는 죽는 순간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끊임없이 진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오래된 숲을 더 이상 적막하고 음산한 공간이 아닌, 새로운 생물들의 터전이 되게 한다. 이런 과정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나무의 죽음>은 이제까지 우리가 만나 온 자연 생태계 관련 책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 그런 책이다.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닌 죽은 나무를 통해 만나는 자연과 생명계는 훨씬 숭고하고 강렬하였다. 그동안 죽어가는 나무를 보면 마음이 안타까웠었다. 또 죽어 넘어진 나무 등걸을 썩으면 그만인 하찮은 것으로만 봤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시각이 지극히 단순하고 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낙엽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것이 자연이라는 사실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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