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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아이 - 에드워드 고리 시리즈 ㅣ 에드워드 고리 시리즈 10
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지음, 강은교 옮김, 에드워드 고리 그림 / 두레아이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줄어드는 아이>의 주인공 트리혼은 어느 날 자신의 몸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꼭 맞았던 옷소매가 많이 남게 되고 바짓단에 걸려서 넘어지는 일이 많아진 것. 막대사탕 같은 것을 쉽게 꺼내먹던 벽장 안 시렁에도 손이 닿지 않아 의자를 놓아야만 한다.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엄마에게 이 위기를 하소연하지만 반죽 부푸는 것이 더 중요한 엄마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아빠 역시 마찬가지라 키가 줄어든 트리혼이 식탁이 보일락 말락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앉아라!"할 뿐이다.
"네가 꼭 줄어드는 체하고 싶다면, 맘대로 하려 무나"(엄마)
"줄어드는 사람이란 없어"(아빠)
이는 엄마 아빠만이 아니다. 담임 선생님이나 스쿨버스 아저씨 등 매일 만나는 다른 어른들도 마찬가지. 그래서 몸집만 줄었지 얼굴은 그대로인 트리혼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무시한다. 그럴수록 트리혼의 외로움과 상처는 점점 깊어진다.
"그렇지만 내일까지는 다시 늘어나는 거다. 우리 반에서 줄어드는 법이란 없어."(담임)
"여기 이 말(줄어든다는)을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구나. 무슨 게을러 빠졌다는 소리 같아 보이는데."(교장 선생님)
"세상에 작아지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어."(스쿨버스 기사 아저씨)
'사랑과 관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전
<줄어드는 아이>는 어린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어느 날 갑자기 투명인간이 된다거나 몸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소재로 한 동화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자 고민하던 트리혼은 우연히 침대 밑에서 <커지고 싶은 어린이들을 위한 굉장한 게임>을 발견하고 결국 스스로 고민을 해결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몸이 연두색으로 변하는 '이상야릇한' 일을 겪게 된다.
'어? 이번에는 연두색으로? 트리혼은 왜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걸까? 혹시 어떤 마법이 씌었는지도 몰라! 불쌍한 트리혼,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등등의 상상으로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동화다.
게다가 트리혼이 불안해 하는 등 부모들의 무관심에 상처 받는 트리혼의 마음 상태 등을 에드워드 고리가 워낙 세심하고 생생한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즐거움까지 맘껏 즐길 수 있다.
"하이드의 익살맞은 유머와 고리의 그림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 워싱턴 포스트
"특별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끊임없이 사랑받는 고전"-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
이 동화에는 이같은 격찬이 좀 많이 붙었다. 출간된 지 30년 동안 '사랑과 관심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고전'으로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또 미국도서관협회의 '주목할 만한 책', 뉴욕타임스의 'Best Illustrated Book'을 비롯한 여러 도서협회에서 우수도서로 선정됐다고 한다. 단지 재미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워낙 유명해서?
주변의 한 아이일 수도 있는 줄어드는 존재 트리혼
주인공 트리혼은 좀 특별한 아이다. 하지만 책 속 등장인물들은 트리혼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내성적이어서 친구 하나 없는 아이로, 있으나 마나한 존재다. 콘플레이크를 다 먹고 경품에 응모하라는 엄마의 말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을 만큼 착한 아이니까.
말썽이라도 피우면 표가 날 텐데 <톰 소여의 모험>(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처럼 모험심이 강한 것도 아니고 <악동일기>(빅토리아 빅터)의 주인공 '조지 하케트'처럼 악동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말썽도 전혀 피우지 않는다.
하지만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56가지나 되고, 콘플레이크로 늘 혼자 아침을 먹는데 콘플레이크보다 콘플레이크 상자에 적혀 있는 경품에 더 관심이 많아 어느 때는 경품 때문에 콘플레이크를 억지로 먹어치우기도 한다.
이렇게 얻은 온갖 경품들로 보관 장소는 미어터질 정도다. 트리혼에게 하나도 소용없는 것들인데도 계속 경품에 집착하고 엎드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텔레비전만 볼 뿐이다. 그래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별함은 어른으로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건…… 아무한테도 얘기 않는 게 낫겠어. 내가 아무 소리 않으면 아무도 그걸 알아채지 못할 거야.'
이런 트리혼이 이번에는 몸이 연두색으로 변하지만 더 이상 황당해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웅크리고 만다. 부모가 나를 무시하듯 내가 부모를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결국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포기하고 스스로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마는 것이다. 앞으로 트리혼은 어떻게 살아갈까?
짧은 동화지만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
작가는 자신이 줄어들고 있는 사실을 알아달라고 하소연하는 부분까지는 주인공을 '트리혼'이라고 하고 상처 받은 주인공이 사랑과 관심을 포기하고 스스로 세상과의 소통단절을 선택한 이후부터는 버젓한 이름 대신 '꼬마'라고 지칭한다.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트리혼은 이제 정체성의 상징인 이름까지 필요 없게 된 존재, 즉 '꼬마'가 된 것이다. 이름을 잃은 트리혼이 점점 줄어들어 먼지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저자 플로렌스 하이드는 수십 권의 아이들 책을 쓴 노장답게, 명성에 걸맞게 관심을 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맛을 숨겨두었다. <줄어드는 아이>의 주인공 트리혼의 이야기를 그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 옮겨 놓아 보자.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 트리혼은 우리 주변의 아이일 수도 있고 등장인물들 역시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트리혼은 단지 동화속의 아이에 불과할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잔소리가 귀찮아 스스로 길들여지는 것을 선택하면서 아이는 개성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
<줄어드는 아이>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세월과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랑과 관심'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히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 아닐까? 백 번을 강조해도 여전히 강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