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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코끼리
스에요시 아키코 지음, 양경미.이화순 옮김, 정효찬 그림 / 이가서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가 면허를 따겠다는 생각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하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겠지만 솔직히 매사에 어설프고 덜렁대는 엄마가 면허를 딴다는 게 겁이 난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나나가 아기였을 때, 유모차 하나도 제대로 밀지 못해 도랑에 빠뜨린 적도 있는 엄마가 정말로 면허를 딸 수 있을까. 차라리 초등학교 5학년인 내가 어른이 되어 면허를 따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노란아기코끼리가 다가왔다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 나는 11살 소년이다.내 이름은 '요'. 사람들은 요군이라고 부른다.
요즘 우리 집은 철지난 장마전선이 턱 버티고 있는 것처럼 칙칙하고 우중충하다. 장마 중에도 햇볕은 종종 나기 마련인데 우리 집 장마 전선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손님이 왔을 때만 겨우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엄마의 느낌은 예전과 달랐다. 아무래도 뭔가 굉장히 근사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근사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보다 크고 멋진 집으로 이사를? 굉장히 근사한 물건을 사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멋진 일일지도 몰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뭔가 근사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거창한 기대를 하고 있는 내게 엄마는 운전면허를 따서 직접 운전을 하겠다는 뜻밖의 말을 한 것이다.
엄마의 말은 너무 뜻밖이었다. 게다가 염려스럽다. 통조림 하나 따는데도 손가락을 베고야 마는 덜렁이 우리 엄마, 기계치인 엄마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면허도 따기 전에 작고 노란, 상처투성이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온다. 노란 아기 코끼리다.
노란코끼리가 온지 한 달 후에 엄마는 면허를 간신히 딴다. 하지만 덜렁이 초보운전 엄마가 오죽하겠는가! 폼 재면서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다 돌아오다가 열쇠를 꽂아둔 채 문을 닫아 가족은 몇 시간동안 고속도로에서 고생한다. 주차를 잘못해 견인당하기도 하고 작은 사고로 라이트가 박살나는 등 온갖 일들이 정신을 쏙쏙 빼놓는다.
이 가족의 마지막 이야기는 '노란 코끼리와의 이별'이다. 가족들은 3년 전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 추억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멋진 저녁을 먹고 펜션으로 돌아오다가 엄마는 치명적인 사고를 내고 말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 덜렁대다가 낸 사고다. 노란 코끼리는 멋진 차를 들이 받고 나가 떨어져 콘크리트 벽에 부딪치며 심하게 파손됐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엄청난 사고였다. 나나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얼어붙어버렸고 엄마도 나도 덜덜 떨고 있는데 이런 가족에게 피해 차량의 운전자가 다가와 필요이상의 짜증과 모멸스런 훈계를 장황하게 한다. 운전자가 여자인 것을 알고 여자가 쓸데없이 차를 끌고 돌아다닌다느니 집에 쳐 박혀 살림이나 하라는 등등.
"엄마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고 낸 사람이 아빠였으면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을 텐데…."
소년은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슬프기만 하다. 사고의 충격으로 운전할 자신이 없어진 엄마가 아는 사람들에게 구원요청을 하지만 당장 달려와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엄마는 용기를 내어 차를 끌고 간신히 돌아온다.
거대한 코끼리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간신히 돌아오는 상처투성이 노란 아기 코끼리.
"엄마는 노란 아기 코끼리를 타고 있을 때면 늘 기분이 좋았단다. 엄마노릇도 잘 못하고 아내로서도 부족했지만, 복잡한 도로에서 다른 차량의 물결에 함께 섞여 달라다보면 '어때, 나도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잘 하잖아'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엄마가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노란 아기 코끼리 덕분이야. 우리도 이젠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어떻게든 씩씩하게 살아가야해.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놀란 고슴도치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말이야. 엄마는 이제 가슴을 펴고 씩씩하게 나아 갈 거야" - 마지막 이야기에서
희망과 용기의 노란 코끼리는 오늘도 씽씽 달린다
이 책은 폐차 직전의 작은 차 <노란 코끼리>가 우리 집에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11살 요군의 성장 소설이다. 그리고 바람을 피운 아빠에게 이혼을 당한 엄마가 이혼의 아픔을 이겨내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희망과 용기를 상징하는 노란 코끼리다. 나무에 매달려있던 수많은 노란 리본처럼!
자유기고가인 엄마는 '알뜰 수납법' '아이 제대로 키우는 법' 등 엄마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기사를 주로 쓰기 때문에 늘 힘들어 한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는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 엄마는 늘 바쁘고 집안 살림은 지저분하여 소년은 투덜대지만 엄마가 안쓰럽고 늘 염려된다. 11살 소년의 눈에 비친, 이혼을 했지만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엄마 이야기다.
<노란 코끼리>를 읽다가 저자의 또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세상을 향하여 새로운 삶의 눈을 떠가는 11살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니! 이 책을 좀 더 일찍 만났다면 두해 전부터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마음을 한번이라도 더 들여다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잔소리와 꾸지람보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마음이 더 앞섰을 것이다.
훔치고 싶도록 좋은 문장도 많고 감동적인 부분도 많은,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 <노란 코끼리>다.
"나는 가방에서 나나의 팬티를 한 장 꺼내 갈아입혀 주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오줌 좀 싼 걸 가지고 울면 안 돼. 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야 한단 말이야.'" (동생 나나에게 주인공이)
지금쯤 엄마는 낯선 고장의 호텔 침대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짓을 싫증날 정도로 곱씹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 한 곳이 이상하게 찌릿찌릿하며 안 된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정신이 없는 건 덜렁대는 성격 때문이지만 요즘 들어 더 심해진 거, 어쩌면 전보다 일을 더 많이 해서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빠가 없어서 두 사람 몫을 혼자 하다 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 가슴에는 이제 어두운 기운이 드리워졌다. 마치 유리창을 신문지로 막듯이.-엄마의 실수로 낯선 도시에서 미아가 될 뻔했던 어느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