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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ㅣ 아침이슬 청소년 6
월터 모슬리 지음, 임경민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이름을 갖는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이름은 그 사람만을 상징하는 것들을 담고 있어서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다. 사람뿐일까.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름을 갖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47>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처럼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백인들의 소유가 되어 매매되고 착취당했던 수많은 흑인노예들이 그랬다. 그들은 이름대신 받은 번호 즉, "47번!"이라고 불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 번호마저 개인에게 주어지는 고유번호가 아닌, 백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가능할 때만 주어지는 번호에 불과했다. 즉 기계로 태어나 노동과 채찍으로 낡아가다가 폐기처분되는 흑인노예를 부르는 번호에 불과했다.
소년이 노예막사에 쇠사슬로 묶이는 순간 받은 번호 47은 노예 홀란드가 죽으면서 남긴 번호로 언젠가는 다른 흑인 노예에게 남길 번호에 불과했다.
뼛속 깊이 새긴 노예의 낙인
빅마마 플로어: "백인들은 네가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이를 먹지만, 노예들은 그저 네 살배기에 불과하단다. 말하자면 갓난아기에서 꼬마 동이, 늙은 꼬마 동이를 거쳐 시체가 되는 거지"
@BRI@소년을 낳다 죽은 살마 대신 엄마 역할을 하는 가사노예 빅마마 플로어는 흑인노예소년이 말을 알아들을 무렵부터 이런 말로 노예의 삶을 인식시켰다. 몸집이 커지면 목화농장으로 끌려 갈 것을 두려워하면서 소년에게 성장이 될 만한 것은 전혀 먹이지 않는 그녀의 바람은 오직 소년이 노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무난하게 늙어가는 것뿐이었다.
'노예는 임신을 하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규정을 어겼음에도 이 사생아 흑인 소년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살마(생모)가 농장주인 우나 부인이 아끼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살마가 소년을 낳다가 죽게 되자, 살마의 노래 소리를 위안 삼던 병약한 우나 부인은 죽게 된다. 이 때문에 농장주 토비어스는 소년이 눈에 띄면 화풀이를 하곤 했다.
14세가 된 소년은 마구간에서 노예들의 막사로 거처를 옮겨 목화 따는 일을 했다. 막사에서 백 명에 가까운 노예가 함께 지냈는데 종이처럼 얄팍한 벽으로 뜨거운 열기는 그대로 스며들었고 온갖 벌레들이 부패한 짐승의 몸을 노리듯 흑인노예들의 불결한 몸을 공격했다. 원인 모르는 악취는 코를 찔렀으며, 눈조차 쉽게 뜰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가 주로 먹는 음식은 쓰디 쓴 푸성귀들을 넣고 끓인 곡물 죽이 전부였다. 어쩌다 고기를 구경한다 해도 반쯤은 썩은 고기였고, 돼지 사료를 먹는 노예들에게는 포크도 스푼도 주지 않았다. 음식은 손으로 집어 먹어야 했다. 우리는 노예일 뿐 결코 문명화 된 인간 축에는 낄 수 없었던 것이다"
"열네시간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목화밭에서 돌아온 것은 해가 서산너머로 넘어간 뒤였다. 그것은 1832년 당시 노예의 99퍼센트가 영위하던 삶의 방식이었다. 해가 뜨면서 시작된 노동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것도 쉬는 날 없이 일주일 내내, 그리고 일 년 365일 내내 계속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예들은 자유를 몰랐고 백인들의 부당한 횡포와 자신들의 굴종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열심히 한 노예는 죽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백인들의 말을 신의 말처럼 믿으면서 오직 주인님을 위하여 일을 하다가 늙어 죽는 것이다.
주인님의 소유인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도 있는 ‘노예정신’이 뼛속까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주인공 47번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면서 노예였던 소년은 농장을 떠나면서 얻게 되는 자유도 자신의 정체성인 자아도 전혀 몰랐다. 소년은 농장을 떠나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두려운 다른 노예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소년에게 어느 날 또 다른 노예 12번 '톨 존'이 앤드루 파이크의 농장에서 도망쳐 와 이렇게 말한다.
“주인님이란 말도 깜둥이란 말도 쓰지 마! 그 누구도 또 다른 누군가를 노예로 부릴 수 없어!”
자유를 향한 소년 47의 이야기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자유의 땅 미국에서 노예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부분은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노예제도가 버젓이 실시되었다는 것일지도. 하지만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났던 분명한 현실이었다고."
<47>은 평화로운 아프리카 땅에 침입하여 흑인들을 사냥, 노예로 부리거나 팔아먹었던, 불과 170여 년 전 미국 목화농장들의 흑인노예들의 처참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1932년에 미국의 코린트농장 47번 흑인노예인 화자가 자신의 경험, 즉 노예생활의 처참한 시절을 회고하면서 진정한 자아와 자유의 의미를 묻는 소설이기도 하다.
<47>은 표면적으로는 흑인노예의 처참한 실상을 말하고 있지만 등장인물을 살피면서 읽으면 의미는 훨씬 깊어진다. 무엇보다도 악의 화신인 윌이 농장주 앤드루 파이크로부터 도망쳐 와서 코린트 농장의 노예들에게 자유의 존재를 알려주고 갖게 하는 '톨 존'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도 연관되고 있는 것 같다.
47: "나는 노예들을 묶고 있는 진짜사슬은 그들의 피부색과 마음속의 패배의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2번 노예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면서 진정한 자아와 자유의 의미를 깨달은 주인공 47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참된 자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나 조건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묻고 그 답을 찾아 애쓰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자. 사람, 혹은 물질이나 학문과 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또 다른 존재를 자신의 노예로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왜? 앤드루 파이크에게 스며들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악의 화신 '윌'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 우리가 안일과 자만, 욕심, 불의와 타협하는 순간 우리의 어깨에 노예라는 낙인을 찍고 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는 없어졌지만 '돈의 노예'나 '권력의 노예'는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