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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가 바깥에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 안에서 폭발해야 한다. -클라크 피녹    

 

 

창대한 결말이 아니라 작은 시작. 김규항의 <예수전

이 책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인문MD님과 출판사 관계자분과 3자 회담(-_-;)이 있었습니다. 김규항의 저작이니 인문사회 쪽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 공감했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문사회 쪽 독자들이 아닌 종교 분야의 독자들에게 더 열심히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는, 제가 했습니다만, 도박같아 보였습니다. 확신하지 못했어요.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기독교 책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해 볼 때, 김규항의 <예수전>에는 일단 지엽적인 문제들이 있으며('하느님'이라는 용어 선택, 인민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예수님...), 급작스럽게 영향력이 축소된 해방신학 계열의 메시지가 과연 얼마나 먹힐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또한 이 책은 반대의 측면에서도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닌가?'라고 되물을 분들이죠. 이 책에서 새롭고 신선한 해방신학의 돌파구를 찾으시려던 분들은 다소 낙담하실 확률이 큽니다. 로쟈 님께서 '소프트'할 것이라고 예상하신 부분은 (아마도 기대하신 부분에서) 사실로 보입니다. <예수전>에서는 치열한 지적 공방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혁명가 예수의 흔적을 북돋우는 정도에서 선을 긋습니다. 역사적 예수, 핍박받는 민중의 지도자이며 반권력을 지향하는 혁명가의 초상은 이 쪽의 도서를 탐독하시던 분들께는 이미 익숙한 모습. 심지어 현재의 '적들'에 대한 신랄한 공격도 그 강도가 생각보다 낮습니다. '김규항이 각잡고 썼다'고 기대하신 분들은 정말 소프트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전>은 바로 이 '소프트함' 때문에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는 단어를 굳이 쓴 이유는, 근래 출간된 민중/해방신학 계열 책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못해서지요. 예수도 대중들에게는 비유로서 쉽게 설명했는데, 진보적인 신학계에서 쉬운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이고 또 슬픈 일인지.(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예수전>은 아직 이 계열의 목소리를 접하지 못한 분들께 권할 수 있는 쉬운 난이도와 친절한 풀어쓰기를 자랑합니다. 어려운 용어나 인문학적 개념은 등장하지 않고, 난해한 교리적 사고도 없습니다. 뉴스 정도의 시사상식만 가지고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론은 지금의 편향된 복음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종교계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p.187-188
 


물론 <예수전>에 특징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게 눈에 띕니다. 지식인이자 체제 개량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논쟁이 자주 부각되죠. 머리에 든 것 많고, 정의를 이야기하기 좋아하지만 결국 어느 이상 자신을 던지지 않는 입바른 존재들과의 논쟁. 여기서 비로소 B급 좌파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진보세력 내에도 곧잘 불편을 유발하는 김규항 씨의 비타협주의 글쓰기죠. <예수전>은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 같은 개념이야말로 체제에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봉사하는 눈속임이라고 단언해 버립니다. "일체의 억압이 없는 혁명의 시공간이 천국이라 불리울 수 있다면 당연히 예수는 거기로 인도해야 할 목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로마 식민지 개량'의 여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은 일단 유효합니다.

결국 <예수전>의 예수 그리스도는 김규항 씨가 말하는 비타협주의 노선의 영웅입니다. 예수는 어떤 권력(그것이 진보적이어 보인다고 하더라도)에도 힘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 권력이 상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의 체계와 모종의 합의를 했기 때문이지요. 예수 자신은 죽음을 예견하면서까지도 비타협주의를 고수합니다. 심지어 그의 열두 제자들이 그의 비현실적인 면모에 실망하는 기색을 보일 때도 어떠한 현실적 권력을 구축하는 노선을 거부합니다. 

기꺼이 투신하는 혁명(유혈투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양심에 가책이 없을 정도의 적당한 움직임과 입바른 훈수를 즐기는 다수의 '좌파 세력'들이 '뻔한 나쁜 놈들'보다 더 나쁘다는 주제는 저자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가장 반가운 점이었을 겁니다.  네. 이 책은 '김규항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김규항 씨는 이 책이 자신의 <예수전>이며, 책을 읽은 모두가 각자의 <예수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무자비한 각주도 미주도 참고도서 목록도 없는, 증명을 위한 학술서가 아닌 이 '이야기' 책이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내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옳고 누가 정답인가는 일단 시작하고 볼 문제입니다. 리스도교인들이 좀 더 폼나게 시끄러워졌으면, 그래서 건강한 논쟁들이 더 많이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가 아직 낯설은 분들께는 놀라움을, 그에 익숙하신 분들께는 토론 혹은 반격의 기회를 기꺼이 열어놓은 이 텍스트를, <예수전>을 기꺼이 '더욱 열심히 팔아보'기로 했습니다. 복음서 속의 예수조차 방법론을 발견하지 못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자본주의 사회와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떻게 양립해야 할 것인지, 사회적 빈곤과 개인의 영성 간에 균형은 어떻게 맞출 것인지,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한다기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께서 읽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떠들고 행동해 주시기를!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예수의 네 가지 얼굴> 

-따끈따끈한 새 책입니다. 저널리스트 특유의 분석적인 태도로 4대 복음서들을 해설해주는 책이죠. 특별히 정치적인 편향은 없으나 복음서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우파 복음주의 계열(특히 성경 무오류설)에서 보자면 불편할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비록 4대 복음의 내용을 해설하고 있긴 하지만, 저자 자신이 밝혔듯 이 책은 성경에 대한 본격 학술서는 아니고, 저자 역시 성경학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아직 그리스도교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기에 좋아 보입니다. 특히 <예수전>과 함께 읽기에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예수전>이 필요하니까요. 말하자면 이 책은 게리 윌스 버전의 네 가지 예수전입니다.

쉬운 교양서 수준이라 복음서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기에 좋습니다. '순진하지는 않지만 쉬운' 책들은 어째서인지 심도있는 책들보다 만나기가 훨씬 어려운 것 같아요. 솔직히 C.S.루이스정도만 해도 쉽지는 않잖아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언젠가 이 책을 '기독교 버전 <탐욕의 시대>'라고 소개드린 바 있지요. <예수전>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책이야말로 개량주의의 온상이며 숨겨진 악의 축입니다 ㅎㅎ. 

중도 복음주의 노선인 로날드 사이더의 이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뉘어져 있는데요. 전반부는 '물질에의 끊임없는 욕망'과 그리스도교의 신념이 왜 양립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물질의 소유는 어디까지가 정당한가를 다룹니다(이 글의 맨 위에 있는 클라크 피녹의 문구는 이 책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종교 서적으로는 다소 놀랍게도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우호적 시선 등, 분석의 정확도는 전문서에 비하면 다소 떨어질 수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결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예수전>과 좋은 비교/대조 지점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 중 하나를 쓴 짐 월리스의 책들도 더불어 접해보시면 좋겠네요. 

 

 <아담, 이브, 뱀> 

-성경 역사학자들의 저서는 늘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구요. 로마의 종교가 되면서 막강한 혜택을 입은 그리스도교가 성, 자유, 원죄라는 개념의 조절을 통해 체제 순응적 종교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습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 과연 문제는 자유의지였는가 아니면 성적 요소(특히 '열등한' 여성의 유혹)가 개입되어 있었는가, 그렇다면 방종과 자유의지는 어떤 관계인가?" 같은 논쟁점은 성경 속에서 수도 없이 나타나고, 각자 차이가 뚜렷했던 초기 기독교의 계파들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의견들을 쏟아냅니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주류 그리스도교와 영지주의자들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설전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구분짓는 중요한 지점이니까요. 이는 곧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위치를 점할것인가라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예수전>을 더욱 여러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 본격 종교 역사서 중에서는 난이도도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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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급 좌파,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를 소개합니다
    from 고장난 자본주의 대안을 말하다 2009-07-03 17:03 
    김규항 씨는 7월 26일(일) 오전 11:50 ~ 오후 1:10에 “이명박 장로 치하, 예수의 삶을 통해 진보의 희망을 찾다”라는 주제로 강연하십니다.(맑시즘 홈페이지 주요 연사 소개 가기) 맑시즘2009 연사 리스트를 보고 만세를 불렀던 건, 제가 김규항 씨의 강연을 몹시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죠. 대학 시절, 학생회가 누구 강연을 듣고 싶냐고 설문조사를 할 때면 항상 ‘김규항’ 이름 석 자를 적어넣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치니 2009-07-3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예수전을 읽고 뒤늦게 이 추천글을 읽었는데, 오 ~ 역시 ~ 입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09-07-30 17:29   좋아요 0 | URL
뭘요. 치니님이야말로 고물상옆보물창고의 보물이십니다. (어머나;)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이사야 58,6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계몽주의의 오래된 사상적 무게를 다시 획득하게 된다. 이는 천국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안개가 현혹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다는 인기의 유용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현혹의 이데올로기는 고대에서는 의도적이고 주관적 요소를 드러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객관적, 사회적 강제성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종교가 이제 역사적으로 계급사회와 결부되었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교회의 권력 이데올로기를 간파함으로써 계몽주의 시기에서 파생된 어떤 보편성이 관철되었다. 

(중략)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일하게 막강했던 사회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른바 교회라는 체제를 비판함으로써 가능해졌다는 사항 말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마르크스주의는 인민의 아편인 신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18세기의 천박한 유물론자들이 맹목적으로 비난하던 경우와는 달리 경제적 분석이라는 첨예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p.118-119 



  신은 어느 쪽에 서 있는가. 멋진 질문이지만, 시시하게도, 성경에 따르면 그 답은 명백하게 '낮은 자들의 자리'입니다. 낮은 자들의 자리는 상호 겸손과 연대 외에는 어떤 대외적인 권력도 뿜어낼 수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은 그 자리에 임재했지요. 유대인들이 신의 이름을 입에 담기를 꺼려한 이유 중 하나 역시 그 이름을 남용하며 휘두를 파괴력-권력에 대한 자발적인 경계였습니다. 그러고보면 신의 이름을 걸고 획득한 재화야말로 악마가 가장 사랑하는 함정 중 하나라고 증언한 유명한 악마도 있었드랬죠(그 악마의 이름은 스크루테이프라고 합니다. 글 하단 참조).

   이렇듯 성경(특히 신약)의 텍스트가 아래로부터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얘기는 언제부턴가 조용하지만 꾸준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에 68혁명 세대가 열심히 탐독한 기독교(그리스도교)-사회서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킵니다. 종교의 세속적 위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사회가 위로부터의 질서를 숭상하게끔 강요(혹은 그에 대한 자발적인 숭상)하며, 거기에 저항하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세계... 이 책의 발간은 마치 다시금 자신의 시대를 찾아 어딘가로부터 '호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68혁명의 동지였던 이 책은 소위 교조주의 좌파 역시 비판합니다. 배타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자체 내 역량의 확장(이런, 각종 파시즘이 얼마나 애용하는 단어였는지!)을 통해 세계를 변혁-통일시키겠다는 개념 역시 또다른 억압의 싹을 키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문구 때문에 종교 자체를 단번에 반지성적이고 반진보적인 시스템으로 매도하는 자들 역시, 다른 이름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현재 권력과 '현재 권력의 단점을 답습한 대항권력'이라는 두 가지의 '적'들을 동시에 돌파하기 위해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는 성경을 비롯한 서양 문명의 토대를 재구성함으로써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인간들이 발견했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드러내 보입니다. 또한 그 발견들이 왜 늘 권력의 힘으로 인해 왜곡되었는지, 왜 역사 속의 권력은 늘 배타적이었는지 역시 추적합니다. 과연 신좌파의 탐독서군요. (물론 그양반들도 결국엔 엇비슷한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만...)

  마치 반 종교책인양 출발하는 이 책은, 그러나 성경의 텍스트를 하나둘 풀어헤치며 기독교의 진보적 성향을 발견해 냅니다. 그리고 서양 문화의 또다른 뿌리들인 각종 신화들과 철학들을 불러와 조합을 시도합니다. 바로 이 점이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당시 최전선에 있던 마르크시즘은 물론이요 신계몽주의 철학과 기독교의 결합은 때늦은(?) 신선함을 안겨줍니다. 대부분의 진보적 종교 담론이 신학적 구조 안에서 활로를 찾고, 때로는 알랭 바디우의<사도 바울>처럼 현대 철학의 성과를 삽입한 경우도 볼 수 있었지만, 저 열렬한 혁명기의 최전선에 있던 철학과 기독교의 접점이라는 건 참 가슴 뜨거운 데가 있으니까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등장했으나 서로 너무 다른 존재처럼 보였던 두 힘이 융합하는 장면은 퍽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수정주의자(?)들은 열렬히 환영받아 마땅합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최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므로(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 종언설을 철회했다고 들었습니다), 역사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더 고민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것에서 긍정의 힘을 찾아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한 사례로서, 냉철한 시야와 뜨거운 가슴으로 구원의 두 가지 방향을 하나로 엮어내려는 이 담대한 저작 역시 일독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앞서 레닌의 反 반동론을 언급하며) 여기서 뒤바뀌어서는 안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레닌-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적 태도 속의 일차적인 탈신화적 태도는 오래전에 나타난 이른바 종교적 반역이라는 원형과 직결되고 있다는 점 말이다. 예컨대 모든 신화 속에 나타나고 있듯이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태도, 억압하는 모든 신화를 모조리 파괴하려는 의향, 억압의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분쇄하는 행위 등을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권력자로서 신을 모시는 교회는 이로써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 (중략) 

자유의 원형들은 오로지 모든 달콤한 거짓을 떨쳐버림으로써 관철될 수 있다. 입으로만 모든 것을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결코 정당성으로서의 자유를 실천할 수 없다.(중략)  <너희는 무엇보다도 수확하는 결실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 가거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꺾쇠 인용구는 마태복음 7장 20절 이하),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p.452-453 



 

-그리고 기독교를 다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하여, 또다른 책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어쩌면 가장 뛰어난 기독교 우화. 기독교의 본질을 역추적하는 악마의 서간집.

성경 왜곡의 역사 -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 신의 책에 나의 한 줄을 추가하는 것.

세계 종교 올림픽 - 5대 종교와 무신론의 대표가 벌이는 가상의 종교 토론. 그들은 의외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 성경 공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초기 기독교 계파간의 권모술수. 게다가 외경들은 아름다웠다.

 

                

예수의 독설 - 한국 민중신학, 역사주의 신학의 현주소. 지금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정치 - 종교는 비폭력이며 복지이고 반전이어야 한다. 무종교 좌파와 극우 종교인을 향해 던진 '극 중도 복음주의'의 일격. 

사도 바울 - 현대 사회라는 매트릭스 속에서 붉은 깃발을 치켜들고 싸우는 전사 바디우, 지행일치의 혁명가 바울을 소환하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30여년 전에 쓰여진, 그러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기독교발 <탐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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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들을 하나로 묶으면 좋아하고 싶지 않으니까가 됩니다. 왜 좋아하고 싶지 않냐고 물으면 또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들을 다시 하나로 묶으면 내가 원하지 않거나, 혹은 미워하기를 원하니까가 됩니다. 물론 이 질문을 뒤집어 왜 사랑합니까? 라고 물어도 같은 길을 걷게 되지요.

나는 어떤 존재이기에 세상의 다른 존재들에게 호불호를 가릴까요. 내 욕망은 그 호불호를 보증할만큼 정확하거나 옳거나 혹은 '좋은' 것일까요. 사회적인 생물이라는 인간이 만든 '민주주의'는 그 보완책이 될 수 있을까요? 미셸 우엘벡의 놀라운 소설 <소립자>가 떠오릅니다. 세계는 발전했지만, 사랑에 고뇌하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않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가 거기까지이며, 영원히, 영원히 그 고뇌를 재생산하면서 살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니까요.

이에 수많은 이론과 학문이 수천 년간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거대한 사변의 강줄기를 따라가면 발원지 즈음에서 꼭 이 분을 만나게 되죠. 부처님입니다. 불교라는 것이 나로부터 출발해 우주까지 다다른 뒤, 다시 그 우주를 지워내기까지의 과정이니까요.

아는 분들께는 사족에 불과할 뻔한 불교 소개를 부득이 한 이유가 있습니다(양해를...).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책이 불교를 막 탐구하려는 분들께 참 좋은 책이라서요.

 

                                <-- 요 독송집은 자매품

부처의 신화를 보지 말고 그의 말씀을 들으라 -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이번에 소개드릴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은 매우 뛰어난 입문서입니다. 우선 빠알리 경전 자체가 담백합니다. 붓다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구전되어 왔기 때문에 상상력이 첨가될 여지가 없지요. 그래서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이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매우 유명한 전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거나 하는 일화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요건 다른 본격 경전들도 그렇긴 하지만요). 대신에 수많은 대화와 사색의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불교 신화가 아닌 불교의 철학과 세계관을 배우기 위한 발원지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일아 스님의 요약은 '한 권으로 보는' 류의 다이제스트를 싫어하시는 분들조차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문장도 일반 산문처럼 평평하게 다져져 있고요. 쉬운 문장으로 경전을 풀어내기란 어렵기도 하거니와 꽤 위험한 시도입니다만, 일아 스님은 무심결에 흐르듯 쓴 것처럼 편안한 글을 선사합니다(그런데 사실은 2년 여를 두문불출하면서 매우 어렵게 써 내셨다고 하지요). 진입 장벽이 높은 원전은 커녕, 해설집조차 그 내용의 알참과 읽기 수월한 문장을 함께 갖춘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의 소중함이 더합니다.

물론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부처님의 인생, 팔정도나 사성제와 같은 세계 인식, 수행과 그에 따른 계율 등이 촘촘히 들어차 있어요. 입문서의 자격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성과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책은 여타 해설집들과는 달리 (각주를 제외하면) 일체의 첨언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경전 요약본이죠. 갑자기 인생 에세이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초심자용 경전 해설집들에 비해 참 깔끔합니다. 이 깔끔함 또한 원래 텍스트가 담백한 빠알리 경전을 바탕으로 삼았기에 가능했으며, 그 경전을 일아 스님이 풀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참 행복한 만남입니다. 텍스트와 편역자의 콤비 플레이가 이렇게 죽이 잘 맞다니! 읽는 중에 기분이 다 좋아졌어요.

책 이야기를 더 해 봐야 상찬을 반복하는 일만 되지 싶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겉핥기 불교 지식만 가진 저같은 범인은 무릎을 탁탁 치며 행복하게 읽었다는 말씀까지만 드릴께요. 발췌한 부분은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기본 태도를 말하는데, 흥미롭게도 똘레랑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것만 가지고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붓다의 말씀이구요. 왠지 앞에서 언급한 소설 <소립자>가 생각나서 저는 또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분 함께 보시면서, 이 다음을 또 기약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

p.s:  <-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입니다. 관심가는 분은 함께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까빠티까라는 브라흐민 청년이 있었다. 그는 (중략)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님, 구전으로 내려온 고대 베다의 찬가와 경전에 대하여 브라흐민들은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들은 다 가짜다.' 라고 합니다. 고따마 존자님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중략) 브라흐민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면 브라흐민의 스승 가운데서 7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승의 스승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중략)

"이와 같이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브라흐민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고따마 존자님, 브라흐민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써 존경합니다."

"어떤 것은 믿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잘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또한 어떤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그러므로 진리를 지키는[보호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진리를 보호하는 길-

"그러면 고따마 존자님, 어떻게 진리를 보호합니까? 우리는 고따마 존자님께 진리의 보호에 대하여 여쭙니다."

"바라드와자(까빠띠카의 가문 이름),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나의 믿음은 이와 같다.' 라고 말할 뿐 '나의 믿음만이 진리이고 다른 믿음은 전부 가짜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받아들일 때 '나는 구전을 받아들인다.' 라고 말할 뿐 '구전만이 진짜이고 다른 것은 엉터리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견해를 찬성할 때 '나는 그 견해를 찬성한다.' 라고 말할 뿐 '그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p.260~262

이어 -진리를 깨닫는 길- ... 까지 하려니 너무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한 권 구입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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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시면 저는 사랑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人 소립자를 읽고있습니다만.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랑이 있을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08-12-1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른다는 것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해야겠지요. 사실 사랑을 논리게임화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겠습니다. 그저 분명한 정신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1. 넘기셔도 좋을 고백

책을 잘 소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특히 인터넷 서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입장도 아니고, 사적인 공간도 아니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니까요. 눈 감고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균형을 어디서 잡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저로서는 처음 해 보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늘 유혹에 휩싸입니다. 무게추를 조금만 더 진지한 쪽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죠. 고백하자면, 애시당초 고물상 옆 보물창고라는 컨셉트가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자리였으니까, 거기에 쉽고 편한 책이 들어갈 확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MD로서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거죠. 그러나 그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줄 상대가 누구에서부터 누구까지인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겨우 몇십 분 전, 막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무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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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끝에서 시작되다>

12월 25일에 1쇄가 나왔다는, 실수 치고는 아름다운 책 말미의 서지정보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자랑할만한 특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책이 괜찮았는데 왜 괜찮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입소문을 타고 종교분야 1위(11/26 현재 리뷰 209개)를 석권했다거나 하는 얘기는 홍보 문구로는 몰라도 제가 추천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문구는 아닙니다. 드라마틱한 실화라는 점도 진부한 자랑입니다. 스토리는 특별한 반전 없이 평탄하게 펼쳐지며, 두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얘기하는 구조 역시 특출난 것은 아닙니다.

눈에 띄는 특징이 보이지 않는 매력. 그렇다면 그 매력은 평범함이겠죠. 그제서야 미스테리가 풀립니다. 이 책의 매력은 난 체하지 않는 무덤덤함에 있습니다. 온갖 풍파를 겪은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그들 특유의 무덤덤함을 통해 색깔을 불어넣습니다.

"아니, 그냥 론이라고 부르세요."

"아니에요, 론 씨."

댄버는 단호하게 '씨'를 붙이더니, "부인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라고 물었다.

"데보라예요."

"데보라 부인." 댄버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난 부인을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p.172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의 한 장면같은 이 무뚝뚝한 대화는 노숙자로 살아온 흑인과 자수성가한 중년 백인 남성이 만난지 몇 달만에 처음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시종일관 이 둘의 대화는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건드리는 식으로만 진행됩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도 없고, 신에 대한 절절한 찬양도 없습니다. 그 찬양의 역할은 백인 남자 론의 아내인 데보라의 몫이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이 끝날 때까지 두 남자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죽음이 가져온 비극조차 신의 뜻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담겨 있지만, 왜 항상 비극이 은총의 씨앗이 되어야 하는지는 결국 알지 못합니다. 현명하게도 이 책은 여기에서 멈춥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것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책을 쓴 시점은 (당연히) 책에 쓰여진 모든 사건이 끝난 뒤지만, 직접 글을 쓴 두 주인공은 거기다 가타부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매 순간의 자기자신을 충실히 복기하는 데서 그칩니다. 그들은 겸손합니다. 신이 무엇이고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정으로 시련을 극복했고 감사를 통해 기뻐했을 뿐입니다.

론 홀과 댄버 무어가 직접 쓴 <끝에서 시작되다>는 이러한 단순함으로 인해 빛을 발합니다. 놀라운 우정과 신앙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자신들이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우리 곁의 사람들임을 고백합니다. 무리하게 신을 직접 끌어들여 운명의 깨달음을 지도 편달하려는 보통의 신앙 간증서들에 비해 이 책이 더욱 와닿는 이유입니다.  함부로 말을 던지지 않는 두 남자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평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C.S.루이스나 존.R.스토트 같은 인물들의 저작은 찬연히 빛나는 별과 같지만, 그 책들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별처럼 어떤 방향을 지시해주는 길잡이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평신도들의 곁에서 따뜻함을 발하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의 이름을 쉽게 빌어오지 않고, 무지한 자기자신으로부터 저 위를 향하려는 무뚝뚝한 의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이 책에 달린 아마존의 리뷰들을 떠올립니다. 209개, 평범한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 리뷰들이야말로 이 책이 누구의 가슴과 믿음을 위한 책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끝에서 시작되다>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완성 없이 영원히 걸어갈 뿐이라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각을 안겨주는,

한 편의 소중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p.s: 이 책에 인용된 책 중에 C.S.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 있습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종교와 아픔에 대해 써내려간 사색록이죠. 논리정연한 루이스의 다른 책들에 비해 절절한 고통과의 사투에 가까운 <헤아려 본 슬픔>이 <끝에서 시작되다>에 인용된 것은 단지 그 내용의 유사함 때문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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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는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p.178

-시몬 베유(시몬느 베이유)의 책이 재간되었습니다. <중력과 은총>입니다. 절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을 만날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기독교적 진리가 넘쳐 흐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성경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욥이 자주 등장합니다. 욥이야말로 버려짐과 비워짐의 신비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입니다.

비움의 신비란, 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줌으로써가 아니라 가져감으로써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우리들 자신의 '존재'라는 개념은 온갖 이미지와 욕망을 소유하려는 탐욕의 결정체, 그러므로 비극을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것들을 마음 속에서도 놓아 줌으로써 신의 본래 의지에 접근하자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 본래 의지란 곧 비어 있음, 공(空)입니다. 이 비어 있음은 (실존주의적으로) 세계 자체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그러한 세계의 본질에 다다르려는 수단이 됩니다. 닮아감으로써 알게 되기. 그러나 모두 비워버리고 나면 어느새 닮아가기라는 목적마저 사라지며, 그때 그 수단으로서의 비움은 곧 완성 자체로 변합니다. 수단과 목적-원인과 결과가 하나가 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 곳이야말로 허투른 천사의 이미지로 왜곡되지 않은 초극의 천국입니다.

치밀하게 쓰여진 논고가 아니라 단상들을 그러모은 아포리즘이라는 사실이 왠지 더 적합해 보입니다. 행간 사이의 넓은 틈이 그 빈 공간을 웅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파편들은 독자가 손쉽게 압축시킬 수 없으며, '나의 것, 나의 깨달음'이라고 손쉽게 말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듯이 망연히 손을 뻗는 정도에서 그치게끔 만듭니다. 그러나 별들은 손에 쥘 수 없기에 아름답지요.

갑자기 찾아온 가을에 걸맞는 종교 이야기이며, 철학 이야기이며, 인생과 잃어버림과 내려놓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인문 MD님이 먼저 편집자 추천을 걸어버렸습니다. 편집자 추천을 두 번 걸 수는 없네요)

 

 

 

예전에 무착문희 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문수보살을 직접 만나뵈었다고 대중을 모으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저었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후려치면서 말했습니다.

문수는 그저 문수일 뿐이며 무착은 나 무착일 뿐이다.          -원택, <성철 스님 화두 참선법> p.19

 버린다는 것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욕칠정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순간에 '자부심'이 찾아오고, 비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어있음을 즐겨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온갖 함정이 도사리는가 하면, 비록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꿈 속에서 똑같이 깨닫지 못하면 '고작 잠에서 깨서 깨달아 보아야지 하고 노력할 때에나 깨닫는 인간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고 일갈이 떨어집니다. 해학스러운 말투 안에 심어진 용맹정진의 심이 무섭습니다.

비교적 쉽게 풀이된 화두 참선법인 이 책은 화두 하나 꼭 붙들고 가라는 가르침을 위한 몇 가지 힌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성철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나눈 화두 이야기도 실려 있고(아주 말 씀씀이가 걸출하십니다), 입문서 답게 용어 풀이도 최대한 상세히 하려는 친절함도 엿보입니다. 그러나 성찰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깨닫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쉽게 설명해준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한 것이, 또 돌려서 보면 불법스러운 묘가 이런 것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설법이며 일화며 무릎을 치게 하면서도 즐겁다는 점이 좋습니다.

(큰 스님 찾아 용담원에 온 주금강이 용담원에 다다라 얘기하기를) "오래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습니다.

"자네가 참으로 용담에 왔구먼."                         -p.167에서

이런 센스쟁이들...

 

 

 

 

 그런데 재미있게도 위의 두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훈련하는 책이 또 마침 나왔습니다. 티베트 밀교의 방식입니다. 이 또한 수행법이며, 숙면일여로서의 꿈명상, 그리고 역경과 고난을 진리 수행으로써 긍정하는 역경 전환의 명상을 담고 있습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사색과도, 한국 선불교와도 다른 방향이지만 '진리로 가는 길은 여럿으로 보이되 어디로 걸어가도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문화사적으로도 흥미로워 일독을 권합니다.

 

 

 

발췌로 만나보는 비움과 사회적 의미를 둘러싼 한 판 대결.

성자 vs

     

폭력을 면전에 두었을 때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에 대한 시야를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중략)...폭력은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의 상황을 현실주의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거짓된 낙관주의일지라도 배제하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폭력의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안다...(중략)...우리 안에 심기었고 우리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를 둘러싼 세력보다 더 강하다. 이는 '우리는 승리하리(we shall overcome)'라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날에 주님이 승리하리라는 의미다. 폭력의 권세의 자만에도 불구하고,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그분의 통치를 시작하셨다.     -짐 월리스, <회심> p.163~164
"전쟁은 언제나 더 큰 악이다"라는 신조는 유물론적 윤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적 윤리에 따르면 죽음과 고통이 가장 큰 악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저급한 종교가 고등 종교를 억압하는 것, 또는 저급한 세속 문화가 고급 세속 문화를 억압하는 것이 더 큰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쓰러지는 상당수 개인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에도 제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중략)...이기심은 그 어느 때보다 작아지고 희생정신은 커져 가는 상태에서 사심 없는 전투를 치르다 서로를 죽이는 일이 이 끔찍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끔찍한 일은 결코 아닌 듯합니다...(중략)...물론 전쟁은 아주 큰 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전쟁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인지, 그래서 항복을 통해 어떤 상황을 맞게 되더라도 전쟁보다는 나은지가 문제입니다.        -C.S.루이스, <영광의 무게> 중 '나는 왜 반전론자가 아닌가?', p.70

<회심>은 <하나님의 정치>로 최근 큰 주목을 받은 짐 월리스의 81년작입니다. 성경적이고 선언적이며, 참여와 행동을 중시하는 특유의 메시지가 (여전히) 강렬합니다. 월리스는 메아리쳐 부르는 목동들을 위한 전략가입니다. 모든 양들은 서로를 사랑해야 할 것이며, 그 어떤 유혹과 협잡(심지어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도 그 절대원칙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권세는 빈 주먹으로부터 온다는 오래된 비폭력의 신념을 성경과 현대 미국의 비교를 통해 드러냅니다.

<영광의 무게>는 저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C.S.루이스의 설교/강론집입니다. 루이스가 보는 그리스도는 인자하지만 완전한 권위 위에 있는 왕입니다. 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찾아온 소년을 앞에 두고 말없이 돌아선,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왕 아슬란을 떠올리게 하죠. 루이스는 계시적이고 선언적인 기존의 강론집과는 다르게 치밀한 논증을 통해 종교적 원리를 구축합니다. 다른 기독교 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독특한 풍채를 발하며, 진정한 보수적 복음주의가 무엇인가를 당당히 보여주고 있죠.

 

 

-연말이 다가오면서 기독교를 위주로 책들이 나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네요. 다들 좋은 책이겠으나, 자신과 맞는 책을 고르기가 그만큼 까다로워질 듯합니다. 연말 성수기가 지날 때까지 좀 더 다양한 소개를 바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조금씩만 내려놓으세요. 그럼으로써 내내 더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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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1-0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위에 외침이 아니고 회심인뎁쇼.

외국소설/예술MD 2008-11-02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죄송합니다 -_-;;; 그렇지만 리플이 반가우니 앞으로도 오타를 종종 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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