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는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p.178

-시몬 베유(시몬느 베이유)의 책이 재간되었습니다. <중력과 은총>입니다. 절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을 만날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기독교적 진리가 넘쳐 흐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성경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욥이 자주 등장합니다. 욥이야말로 버려짐과 비워짐의 신비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입니다.

비움의 신비란, 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줌으로써가 아니라 가져감으로써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우리들 자신의 '존재'라는 개념은 온갖 이미지와 욕망을 소유하려는 탐욕의 결정체, 그러므로 비극을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것들을 마음 속에서도 놓아 줌으로써 신의 본래 의지에 접근하자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 본래 의지란 곧 비어 있음, 공(空)입니다. 이 비어 있음은 (실존주의적으로) 세계 자체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그러한 세계의 본질에 다다르려는 수단이 됩니다. 닮아감으로써 알게 되기. 그러나 모두 비워버리고 나면 어느새 닮아가기라는 목적마저 사라지며, 그때 그 수단으로서의 비움은 곧 완성 자체로 변합니다. 수단과 목적-원인과 결과가 하나가 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 곳이야말로 허투른 천사의 이미지로 왜곡되지 않은 초극의 천국입니다.

치밀하게 쓰여진 논고가 아니라 단상들을 그러모은 아포리즘이라는 사실이 왠지 더 적합해 보입니다. 행간 사이의 넓은 틈이 그 빈 공간을 웅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파편들은 독자가 손쉽게 압축시킬 수 없으며, '나의 것, 나의 깨달음'이라고 손쉽게 말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듯이 망연히 손을 뻗는 정도에서 그치게끔 만듭니다. 그러나 별들은 손에 쥘 수 없기에 아름답지요.

갑자기 찾아온 가을에 걸맞는 종교 이야기이며, 철학 이야기이며, 인생과 잃어버림과 내려놓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인문 MD님이 먼저 편집자 추천을 걸어버렸습니다. 편집자 추천을 두 번 걸 수는 없네요)

 

 

 

예전에 무착문희 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문수보살을 직접 만나뵈었다고 대중을 모으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저었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후려치면서 말했습니다.

문수는 그저 문수일 뿐이며 무착은 나 무착일 뿐이다.          -원택, <성철 스님 화두 참선법> p.19

 버린다는 것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욕칠정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순간에 '자부심'이 찾아오고, 비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어있음을 즐겨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온갖 함정이 도사리는가 하면, 비록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꿈 속에서 똑같이 깨닫지 못하면 '고작 잠에서 깨서 깨달아 보아야지 하고 노력할 때에나 깨닫는 인간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고 일갈이 떨어집니다. 해학스러운 말투 안에 심어진 용맹정진의 심이 무섭습니다.

비교적 쉽게 풀이된 화두 참선법인 이 책은 화두 하나 꼭 붙들고 가라는 가르침을 위한 몇 가지 힌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성철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나눈 화두 이야기도 실려 있고(아주 말 씀씀이가 걸출하십니다), 입문서 답게 용어 풀이도 최대한 상세히 하려는 친절함도 엿보입니다. 그러나 성찰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깨닫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쉽게 설명해준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한 것이, 또 돌려서 보면 불법스러운 묘가 이런 것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설법이며 일화며 무릎을 치게 하면서도 즐겁다는 점이 좋습니다.

(큰 스님 찾아 용담원에 온 주금강이 용담원에 다다라 얘기하기를) "오래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습니다.

"자네가 참으로 용담에 왔구먼."                         -p.167에서

이런 센스쟁이들...

 

 

 

 

 그런데 재미있게도 위의 두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훈련하는 책이 또 마침 나왔습니다. 티베트 밀교의 방식입니다. 이 또한 수행법이며, 숙면일여로서의 꿈명상, 그리고 역경과 고난을 진리 수행으로써 긍정하는 역경 전환의 명상을 담고 있습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사색과도, 한국 선불교와도 다른 방향이지만 '진리로 가는 길은 여럿으로 보이되 어디로 걸어가도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문화사적으로도 흥미로워 일독을 권합니다.

 

 

 

발췌로 만나보는 비움과 사회적 의미를 둘러싼 한 판 대결.

성자 vs

     

폭력을 면전에 두었을 때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에 대한 시야를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중략)...폭력은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의 상황을 현실주의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거짓된 낙관주의일지라도 배제하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폭력의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안다...(중략)...우리 안에 심기었고 우리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를 둘러싼 세력보다 더 강하다. 이는 '우리는 승리하리(we shall overcome)'라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날에 주님이 승리하리라는 의미다. 폭력의 권세의 자만에도 불구하고,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그분의 통치를 시작하셨다.     -짐 월리스, <회심> p.163~164
"전쟁은 언제나 더 큰 악이다"라는 신조는 유물론적 윤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적 윤리에 따르면 죽음과 고통이 가장 큰 악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저급한 종교가 고등 종교를 억압하는 것, 또는 저급한 세속 문화가 고급 세속 문화를 억압하는 것이 더 큰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쓰러지는 상당수 개인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에도 제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중략)...이기심은 그 어느 때보다 작아지고 희생정신은 커져 가는 상태에서 사심 없는 전투를 치르다 서로를 죽이는 일이 이 끔찍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끔찍한 일은 결코 아닌 듯합니다...(중략)...물론 전쟁은 아주 큰 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전쟁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인지, 그래서 항복을 통해 어떤 상황을 맞게 되더라도 전쟁보다는 나은지가 문제입니다.        -C.S.루이스, <영광의 무게> 중 '나는 왜 반전론자가 아닌가?', p.70

<회심>은 <하나님의 정치>로 최근 큰 주목을 받은 짐 월리스의 81년작입니다. 성경적이고 선언적이며, 참여와 행동을 중시하는 특유의 메시지가 (여전히) 강렬합니다. 월리스는 메아리쳐 부르는 목동들을 위한 전략가입니다. 모든 양들은 서로를 사랑해야 할 것이며, 그 어떤 유혹과 협잡(심지어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도 그 절대원칙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권세는 빈 주먹으로부터 온다는 오래된 비폭력의 신념을 성경과 현대 미국의 비교를 통해 드러냅니다.

<영광의 무게>는 저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C.S.루이스의 설교/강론집입니다. 루이스가 보는 그리스도는 인자하지만 완전한 권위 위에 있는 왕입니다. 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찾아온 소년을 앞에 두고 말없이 돌아선,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왕 아슬란을 떠올리게 하죠. 루이스는 계시적이고 선언적인 기존의 강론집과는 다르게 치밀한 논증을 통해 종교적 원리를 구축합니다. 다른 기독교 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독특한 풍채를 발하며, 진정한 보수적 복음주의가 무엇인가를 당당히 보여주고 있죠.

 

 

-연말이 다가오면서 기독교를 위주로 책들이 나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네요. 다들 좋은 책이겠으나, 자신과 맞는 책을 고르기가 그만큼 까다로워질 듯합니다. 연말 성수기가 지날 때까지 좀 더 다양한 소개를 바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조금씩만 내려놓으세요. 그럼으로써 내내 더 평안하시기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08-11-0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위에 외침이 아니고 회심인뎁쇼.

외국소설/예술MD 2008-11-02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죄송합니다 -_-;;; 그렇지만 리플이 반가우니 앞으로도 오타를 종종 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