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이사야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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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계몽주의의 오래된 사상적 무게를 다시 획득하게 된다. 이는 천국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안개가 현혹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다는 인기의 유용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현혹의 이데올로기는 고대에서는 의도적이고 주관적 요소를 드러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객관적, 사회적 강제성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종교가 이제 역사적으로 계급사회와 결부되었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교회의 권력 이데올로기를 간파함으로써 계몽주의 시기에서 파생된 어떤 보편성이 관철되었다.
(중략)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일하게 막강했던 사회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른바 교회라는 체제를 비판함으로써 가능해졌다는 사항 말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마르크스주의는 인민의 아편인 신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18세기의 천박한 유물론자들이 맹목적으로 비난하던 경우와는 달리 경제적 분석이라는 첨예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p.118-119
신은 어느 쪽에 서 있는가. 멋진 질문이지만, 시시하게도, 성경에 따르면 그 답은 명백하게 '낮은 자들의 자리'입니다. 낮은 자들의 자리는 상호 겸손과 연대 외에는 어떤 대외적인 권력도 뿜어낼 수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은 그 자리에 임재했지요. 유대인들이 신의 이름을 입에 담기를 꺼려한 이유 중 하나 역시 그 이름을 남용하며 휘두를 파괴력-권력에 대한 자발적인 경계였습니다. 그러고보면 신의 이름을 걸고 획득한 재화야말로 악마가 가장 사랑하는 함정 중 하나라고 증언한 유명한 악마도 있었드랬죠(그 악마의 이름은 스크루테이프라고 합니다. 글 하단 참조).
이렇듯 성경(특히 신약)의 텍스트가 아래로부터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얘기는 언제부턴가 조용하지만 꾸준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에 68혁명 세대가 열심히 탐독한 기독교(그리스도교)-사회서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킵니다. 종교의 세속적 위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사회가 위로부터의 질서를 숭상하게끔 강요(혹은 그에 대한 자발적인 숭상)하며, 거기에 저항하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세계... 이 책의 발간은 마치 다시금 자신의 시대를 찾아 어딘가로부터 '호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68혁명의 동지였던 이 책은 소위 교조주의 좌파 역시 비판합니다. 배타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자체 내 역량의 확장(이런, 각종 파시즘이 얼마나 애용하는 단어였는지!)을 통해 세계를 변혁-통일시키겠다는 개념 역시 또다른 억압의 싹을 키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문구 때문에 종교 자체를 단번에 반지성적이고 반진보적인 시스템으로 매도하는 자들 역시, 다른 이름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현재 권력과 '현재 권력의 단점을 답습한 대항권력'이라는 두 가지의 '적'들을 동시에 돌파하기 위해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는 성경을 비롯한 서양 문명의 토대를 재구성함으로써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인간들이 발견했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드러내 보입니다. 또한 그 발견들이 왜 늘 권력의 힘으로 인해 왜곡되었는지, 왜 역사 속의 권력은 늘 배타적이었는지 역시 추적합니다. 과연 신좌파의 탐독서군요. (물론 그양반들도 결국엔 엇비슷한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만...)
마치 반 종교책인양 출발하는 이 책은, 그러나 성경의 텍스트를 하나둘 풀어헤치며 기독교의 진보적 성향을 발견해 냅니다. 그리고 서양 문화의 또다른 뿌리들인 각종 신화들과 철학들을 불러와 조합을 시도합니다. 바로 이 점이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당시 최전선에 있던 마르크시즘은 물론이요 신계몽주의 철학과 기독교의 결합은 때늦은(?) 신선함을 안겨줍니다. 대부분의 진보적 종교 담론이 신학적 구조 안에서 활로를 찾고, 때로는 알랭 바디우의<사도 바울>처럼 현대 철학의 성과를 삽입한 경우도 볼 수 있었지만, 저 열렬한 혁명기의 최전선에 있던 철학과 기독교의 접점이라는 건 참 가슴 뜨거운 데가 있으니까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등장했으나 서로 너무 다른 존재처럼 보였던 두 힘이 융합하는 장면은 퍽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수정주의자(?)들은 열렬히 환영받아 마땅합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최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므로(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 종언설을 철회했다고 들었습니다), 역사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더 고민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것에서 긍정의 힘을 찾아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한 사례로서, 냉철한 시야와 뜨거운 가슴으로 구원의 두 가지 방향을 하나로 엮어내려는 이 담대한 저작 역시 일독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앞서 레닌의 反 반동론을 언급하며) 여기서 뒤바뀌어서는 안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레닌-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적 태도 속의 일차적인 탈신화적 태도는 오래전에 나타난 이른바 종교적 반역이라는 원형과 직결되고 있다는 점 말이다. 예컨대 모든 신화 속에 나타나고 있듯이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태도, 억압하는 모든 신화를 모조리 파괴하려는 의향, 억압의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분쇄하는 행위 등을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권력자로서 신을 모시는 교회는 이로써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 (중략)
자유의 원형들은 오로지 모든 달콤한 거짓을 떨쳐버림으로써 관철될 수 있다. 입으로만 모든 것을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결코 정당성으로서의 자유를 실천할 수 없다.(중략) <너희는 무엇보다도 수확하는 결실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 가거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꺾쇠 인용구는 마태복음 7장 20절 이하),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p.452-453
-그리고 기독교를 다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하여, 또다른 책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어쩌면 가장 뛰어난 기독교 우화. 기독교의 본질을 역추적하는 악마의 서간집.
성경 왜곡의 역사 -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 신의 책에 나의 한 줄을 추가하는 것.
세계 종교 올림픽 - 5대 종교와 무신론의 대표가 벌이는 가상의 종교 토론. 그들은 의외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 성경 공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초기 기독교 계파간의 권모술수. 게다가 외경들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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