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목소리는 온화하고 명랑했다. "클라보 양인가요?"
"예."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아니요."
"친구예요."
"저는 친구가 아주 많아요." 클라보 양은 거짓말을 했다.
때로 어떤 작품들은 시작부터 독자의 턱을 붙들고 책에 고정시켜 버린다. 수많은 '새로 나온 책들' 속에서 그런 매혹적인 오프닝을 발견하는 건 도서MD만의 은밀한 기쁨이다. 근래 가장 빛나는 출발을 보인 소설은 마거릿 밀러의 심리 스릴러 <내 안의 야수>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오프닝 오타쿠의 고백 같은 건 없었다.
한 단어도 뺄 것 없이 완벽하게 다듬어진 출발. 건조하고 선명한 글쓰기 이면에 꿈틀거리는 불안함. 인물 묘사조차 따로 문단을 할애하지 않고 대화와 캐릭터들의 반응을 통해 드러낸다. 작가는 완전히 숨은 채, 작품 전체가 하나의 사건 뿐이다. 그 뜨겁고 건조하고 단단한 느낌이 바로 하드-보일드다. 뜨겁게 달구어진 '빈 양철냄비'다. 냄비는 비어 있기 때문에 터진다. 하드보일드를 표방하는 많은 소설들, 폼나는 컨셉트에 우쭐우쭐 말이 많은 스릴러들은 뜨겁기는 하지만 안에 수프라거나 족발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결코 터질 것 같지는 않다. 진짜 하드보일드는 조용하고 간결하다.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팽팽하게 이어진 작품이 끝날 때, 비로소 처음으로 브래지어 후크를 푸는 듯한 탐미적인 문장 몇 개. 더이상 바랄 게 없다.
이제 고전이 된 <내 안의 야수>의 반전은 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건 오히려 좋은 기회다. 그 기회가 무엇인고 하니, 고전은 소재만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이다.
내 안의 야수 (마거릿 밀러, 1955)
미국 추리작가협회 에드거상 최우수 장편상 (1955년)
미국 추리작가협회 선정 100대 추리소설
영국 추리작가협회 선정 100대 추리소설
독일 추리문학회 선정 20세기의 추리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