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이 엉망이더라도 그냥 재미로 보심이.

 

   봉건사회의 성씨姓氏의 전제성이 표현되는 한 가지는 바로 성명姓名에 대한 “피휘避讳”이다.  

   피휘避讳는 상고 시대의 “감히 호칭하지 않음으로써 존경을 나타내는” 습관에서 변화 발전하여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민간에서 전하는 습속이었는데 종종 존자나 장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에서 시작되었으며 저절로 직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통치자가 자기의 권세와 지위를 이용하여 강제로 신하들에게 모든 장소에서 자기와 조상들의 명자名字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감히 어기는 자에게는 무겁게 징벌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었고 점차로 제도로 형성되고 황가皇家의 권위의 상징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점점 지나침이 생기게 되었고 예측하지 못한 화祸를 입을 수도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서 관찰해 보면, 늦어도 춘추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이미 “경외피명敬畏避名”의 제도 규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소호帝少昊(?)는 사공司空의 관직을 만들었는데, 천하의 수리 토목 공사를 전적으로 관리하였다.  그의 후예들은 대대로 계승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 “사공司空”이라는 성姓이 생겨났다.  하지만 춘추시대에 이르러, 송무공宋武公의 명名이 “사공司空”이어서 이 성姓을 “사성司城”으로 바꾸어 무공武公의 명자名字를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项羽는 대군을 거느리고 진조秦朝를 멸망시키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하였는데 한동안 아주 광대한 통치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명名은 적籍이었다.  따라서 그의 통치 지역 안에서는 “적籍”성姓의 민중들은 강제로 “석席”으로 성姓을 바꾸어 그의 위세를 범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피휘避讳제도가 엄격하게 실시된 때는 한조汉朝가 시작되고 난 후이다.  서한 초기의 몇 대의 황제 중에는 명휘名讳를 피하려고 자연自然의 명칭을 바꾼 사례가 있었다. 한문제汉文帝의 명名은 항恒이어서 항산恒山을 상산常山으로 바꾸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성姓과 명名을 바꾸게 하였다고 기록될 지는 미처 몰랐다(?).  서한 중기 이후에는 피휘避讳제도가 점차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동한东汉 여요인馀姚人 엄광严光 (명名은 준遵이고 자字는 자릉子陵이다)은 汉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어린 시절의 친구로, 그의 본래의 성姓은 장庄이었는데 유수劉秀의 아들인 유장劉庄(명제明帝)의 휘讳를 피해 성姓을 엄严으로 바꾸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엄자릉严子陵이라고 칭하지, 이 이름이 사방에 알려진 대 명사名士가 생전에는 장자릉庄子陵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사회에서는 또한 한동안 이미 죽은 수백 년 전의 장자庄子도 “엄자严子”라고 고쳐 불렀다.  한조汉朝가 패망하고 나서 위진魏晋시대에 와서야 사회적으로 “엄严”성姓이 비로소 “장庄”성姓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의 가족들은 “엄严”성姓을 사용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다시 “장庄”성姓으로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보게 되는 “엄严”과 “장庄”의 성姓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은상殷商 시대에는 맹인 악관乐官을 사师라고 불러 나중에 사성师姓을 형성하여 많은 음악세가音乐世家가 되었다. 상대商代에는 사연师延이 있었고, 춘추春秋 시대의 晋에는 사광师旷이, 노魯에는 사을师乙이, 위卫에는 사연师涓이, 정郑에는 사리师悝, 사융师融, 사패师茷, 사혜师慧 등이 있었다.  서진西晋 시기에 이르러,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马炎은 그의 백부인 사마사司马师를 존경하여 진경제晋景帝로 삼고, 천하에 명령을 내려 사师를 성姓으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의 사성师姓은 강제로 수성帅姓으로 바꾸었으며, 진晋이 망한 후에야 비로소 일부의 가족들이 다시 사성师姓으로 바꾸어서 이때부터 사회에서는 “사师”와 “수帅” 양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서한西汉 시기의 피휘避讳는 또한 “불피혐명不避嫌名”이었는데, 즉 동음同音은 피휘避讳하지 않았다.  동한东汉 이후에는 점차로 비슷한 자음字音조차도 피휘避讳하여 사용할 수 없었다.  나아가 피휘避讳가 사람들이 읽는 서적书籍에까지 연장되어 죽은 사람도 성姓과 명名을 바꾸어 피휘避讳의 요구에 맞추어야 했다.  한선제汉宣帝의 명名은 순询인데 순询과 순荀은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순询”성姓은 “손孙”성姓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재앙이 선현先贤에게도 미쳐 전국战国 시대의 저명한 사상가인 순자荀子는 한인汉人들의 붓 아래 “손경孙卿”으로 변해 버렸다.  동진东晋의 사람들은 진문제晋文帝 사마소司马昭의 휘讳를 피하여, 변방으로 보내 화친한 왕소군王昭君을 왕명군王明君으로 고쳐 불렀다.  북송北宋  대의 왕안석王安石의 시 중에는 이러한 관습을 답습하여 왕소군王昭君을 “명비明妃”라고 부르고 있다.  당대唐代 사람들은 고조高祖 이연李渊의 휘讳를 피하여 분별 없이 도연명陶渊明을 도천명陶泉明으로 바꾸어 버렸다.  당현종唐玄宗 융기隆基는 “기基”와 “희姬”가 독음读音이 같다는 이유로 전국의 “희姬”성姓을 “주周”성姓으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려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문무주공文武周公의 성씨姓氏를 언급할 때 어쩔 수 없이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당헌종唐宪宗은 조부를 본받아 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의 명名은 순纯이다.  진한秦汉 시대의 많은 유명한 “순우淳于”성姓은 “우于”성姓으로 바뀌었고 원래의 성姓은 이 때문에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무자비한 “피휘避讳” 제도는 봉건 사회의 통치자들의 전제 권위의 체현이었고, 봉건 통치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인민 대중들이 그들의 권위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경외와 순종을 표시하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높디높은 특수한 지위를 유지하고 보존하였다.  동시에, 이 제도는 봉건 사회의 예의 제도의 핵심이며, 그것은 역대 통치집단들에 의해 사용되어 봉건적인 계급관계와 존비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였고 사회적으로 널리 시행되었다.  기나 긴 봉건 사회에서 비단 황제만 피휘避讳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대부 계층에서도 “피휘避讳”의 습속이 유행하였다.  당대唐代의 시인诗人 두보杜甫의 모친은 명名이 해당海棠었다. 두보杜甫는 일생동안 시诗를 쓰면서 해당海棠을 읊지는 않았다.  소식의 조부의 명名은 서序이다.  소식苏轼은 매번 다른 사람의 책에 서序를 쓸 때 의식적으로 “서序”자를 “인引”자로 바꾸었다.  이하李贺의 부친은 명名이 진숙晋肃인데 평생 진사进士 고시考试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벼슬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오대五代 시기의 재상인 풍도冯道는 이도李导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람이 보기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도导”를 “도道”로 잘못 듣고는 바로 분개하며 그 사람을 쫓아버렸다.  이 때문에, 봉건사회에서는 친구를 방문하거나 사회적 교제 활동을 할 때는 교제 상대의 부친과 조부의 명휘名讳와 가족들이 피휘避讳하는 상황을 먼저 잘 살펴서 무의식중에 상대방의 기휘忌讳하는 바를 범하여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죄를 짓는 일을 면하여야 하였다.  『당오림唐浯林』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시인 두보는 사천四川에서 엄무严武의 막료로 초빙되었다.  엄무의 부친은 명名이 엄정지严挺之였는데 첫 번째 연회에서 술이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져서 두보가 갑자기 입을 열어 “不谓严挺之乃有此儿”라고 말하였다.  엄무는 당장 얼굴색을 바꾸고는 “杜审言(두보의 조부) 孙子捋虎须耶”라고 말했다. 

    봉건 사회의 피휘避讳제도는 특히 마음대로 행동하는 황제의 “피휘避讳”가 있는데 성씨姓氏들의 정상적인 발전을 중단하거나 바꾸도록 강압하였으며 부분적인 성씨姓氏의 혼란을 조성하고 후대 사람들이 성씨姓氏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려움을 더하였다.  동시에, 통치자들이 “피휘避讳”를 위해 무책임하게 옛 서적을 삭제하여 고치고, 마음대로 고인의 성명姓名을 바꾸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생활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역사를 연구하고 고적을 읽는 일에 한 겹의 짙은 안개를 덮어 버렸다.  현재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역사사의 “피휘避讳” 현상이 남아 있어 유일한 좋은 점은, 우리가 현재에 고서 중의 피휘하여 글자를 고친 경우를 분석하여 고서의 연대와 작가 등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고 고서의 판본을 확정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바로 당초에 “피휘” 제도를 제정하였던 통치자들이 처음에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통치계급이 강제로 시행했던 “피휘”제도와 상반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것은 죄를 얻어 화를 당한 신하와 기타 통치계급의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강제로 “화를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꾼 것(避祸改姓)”이다. 

   화를 피해 강제로 성姓과 명名을 바꾸는 일은 상고시대부터 자두 봐서 신기하지도 않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요皋陶의 후예인 이정理征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여서 주纣에게 죄를 얻어 죽을 지경에 놓이자, 그 아내는 아들인 이정利贞을 데리고 이후伊后의 허墟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살구나무 아래에서 쉬게 되었는데 살구를 따서 허기를 채워 살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성姓을 이李로 바꾸었다.  다른 한 명의 전설 속의 유명한 인물인 공공共工은 부락전部落战에서 패하여 망한 후에 자손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어지럽게 성姓을 바꾸어 해를 피했다.  진한秦汉 시대에 이르자 이미 홍洪, 공龚 등으로 성姓이 나누어져 버렸다.  상조商朝 말년에 주왕纣王이 아홉 제후를 죽이자, 그 후손들이 화를 피하여 여러 곳에서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성姓을 구仇로 바꾸어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전국战国 시대 후기에 연국燕国 사람인 전광田光이 연태자燕太子 단책丹策을 도와 형가荆轲가 진왕秦王을 살해하는 사건을 계획하였다.  사건이 실패로 드러난 후 그의 후손들은 진秦 정권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성姓을 광光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책에 나타나고 있으며 다만 선진시대에는 사람들의 성씨姓氏가 다변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어 새로운 성姓을 만들고 옛 성姓을 바꾸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 성씨姓氏의 변경은 그다지 커다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선진 이후 가족의 성씨姓氏가 안정되어 가고, 다시는 수대가 지나도록 바꾸지 않게 되어 성姓을 바꾸는 것은 사당을 버리고 근본을 잃는 큰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봉건 사회는 잔학한 전제 통치가 실행되고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9족이 연좌되어 한 대에서 해를 입으면 몇 대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잔학한 현상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재난에 부닥친 가족의 후예들이 할 수 없이 명名과 성姓을 바꾸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바꾸고, 어떤 경우는 일가족이 바꾸고, 어떤 경우에는 같은 성姓응 가진 전체 동족이 성姓을 바꾸었다.  서한 초기에 한신韩信은 여후呂后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소하萧何는 비밀리에 괴철蒯彻에게 분부하여 한신의 아들을 남오南奥로 보내어 성姓을 위韦(한韩자의 반을 취하였다)로 바꾸게 하였다.  지금 광서广西 위성韦姓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을 한신의 후예로 칭한다. 또한 서한의 역사학자인 사마천司马迁의 후예는 『사기史记』가 초래한 화 때문에 박해를 받아 전족이 의견을 모아 2글자인 사마司马를 쪼개어 획을 첨가하여 글자를 바꾸기로 하였다.  일부는 성姓을 “동同”으로 바꾸었고, 일부는 성姓을 “풍冯”로 바꾸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韩城의 사마천의 원적지에는 “동同”, “풍冯” 양성兩姓이 무리를 지어 사는 촌락이 있다.  한원제汉元帝 때에 음악가인 경방京房이 죄를 지어 잡혀서 감옥에서 죽었다.  그의 후손들은 도망가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어서 성姓을 경经으로 바꾸었다.  선제宣帝 때에 평통후平通侯 양운杨惲은 죄를 지어 허리가 잘리었는데 그의 자손들은 산림에 숨어살며 부친의 명名인 운惲를 성姓으로 삼았다.  동한 말기 영제靈帝 때에 안정태수安定太守 기광杞匡은 일처리 때문에 동탁董卓에게 죄를 지어 박해를 받을 위험에 놓이자 관직을 버리고 도망가서 성명姓名을 포광抱匡으로 바꾸었는데 이후 대대로 답습하여 포성抱姓이 생겨났다.

   이와 같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姓을 바꾸는 현상은 오랜 봉건 사회에서 끊임없이 생겨나서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천년을 이어왔다. 명청明清 양대에 이르게 되어도, 봉건사회의 전제적인 박해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참혹하였다.  사회에서는 법망의 비밀로써, 문인이나 유자孺子가 화를 당하여 해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명名과 성姓을 바꾼 사람의 수가 많아 이전 여러 조대朝代를 초과하였다. 명초明初의 유명한 문학가인 방효유方孝孺는 “정난의변靖难之变1)” 후에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위하여 황제를 칭하는 조서를 기초하기를 거절하여 저자 거리에서 사지를 찢겨 죽었고 십족이 죽임을 당하여 죽은 자가 8700여 명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형부상서 위택魏泽은 “录方孝孺家时, 藏其幼子, 以故方氏有遗胤”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아들과 기타 요행히도 생존한 사람들은 감히 방方을 성姓으로 삼을 수 없어 혹은 시를 성姓으로 삼고( 파자하면 “방인야方人也”이다) 혹은 성姓을 “육六”(글자 모양이 방方과 비슷하다)으로 바꾸어서 명조明朝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와 그 중에 몇몇은 다시 방성方姓으로 바꾸었다.  청조清朝의 강희제康熙帝와 옹정제拥正帝 연간에 문자옥文字狱이 크게 일어나 멸족을 피하여 자손들이 성姓을 바꾼 경우도 어찌 한 두 집에 그치겠는가?

   장구한 중국의 봉건 사회에서, 매번 조대朝代가 바뀔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姓을 바꾸어야 했다.  어떤 사람은 원래 왕실의 성원이었고 어떤 사람은 예전 조대朝代의 명문 세가였다.  진조秦朝 이후 한조汉朝가 들어선 이후 400여 년의 양한兩汉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강성한 성姓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의 왕실 자손은 진한 교체기 성씨姓氏의 혼란기를 틈타서 성씨姓氏를 바꾸었다.  당대 후기에 전란이 그치지 않자 이씨李氏 일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여 성姓을 바꾸어 화를 피했다.  지금의 환남皖南2)의 적계绩溪와 이현黟县에는 적지 않은 호성胡姓이 이씨李氏의 조상의 위패를 공양하고 있으며, 당소종唐昭宗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명조 초기에 주원장은 일찍이 성지를 내려 송나라 말기에  성姓을 바꾼 조씨赵氏의 후예들에게 원래의 성姓을 회복시켜 주었다.  뜻밖에도 수 백년 후에 청조의 강희황제는 주원장의 자손들에게 원래의 성姓을 회복시켜 주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인 석도石涛나 팔대산인八大山人은 모두 명나라 말기에 명名과 성姓을 바꾼 주성朱姓의 종실이다.  1911년 청조가 와해된 이후 중원 각지에 머물러 있던 만주족이 사람들은 대량으로 한족의 성姓으로 바꾸어 버려, 우리가 지금 이미 한 사람의 성명姓名으로는 그가 한족의 사람인지 만주족의 사람인지 분별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 

   중화민족은 부계 혈통을 매우 중시하고, 가족의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이다.  성씨姓氏를 바꾼다는 건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상을 배반한 것과 같으며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봉건 통치 집단의 함부로 쓰는 세도 아래에서 가족이 멸문을 당하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매 시기마다 적지 않은 가족들이 성姓을 바꾸어 어려움을 벗어났다.  여러 세대가 지나고 나서 시대가 바뀌어 어쩔 수 없이 성씨姓氏를 바꾼 가족들이 종종 다시 원래의 성씨姓氏로 돌아가기가 이미 너무 어려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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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허접한 서재에 방문한 분들이 13명이나 되다니!  이거 내가 들어온 것도 카운팅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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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트에 가도 알라딘에 와서도 '덤'으로 무엇을 준다는 유혹에 아주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이런 나의 치기와 충동성이 아마 내가 이 세상을 아주 힘들게 살고 있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  서승, 서준식, 서경식 형재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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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주말 자투리 시간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읽었다. 4/5쯤 읽었는데, 번역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다. 어쨌거나 저자의 과감하고 열성적인 문제제기가 반가웠고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의 새삼스러움에 착잡했다. 번역 문제에 '감'이 없는 교수들이나 관료들께서 많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하지만, 젊은 인문학도들이 이 책을 읽는 건 말리고 싶다(우리의 '착잡한' 현실에 도전욕보다는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문득 번역 문제의 한 파트인 오역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써둔 게 생각이 나 여기에 옮겨둔다. 재작년 5월에 쓴 것인데,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우연한 계기가 읽다가 눈에 띈 오역들을 지적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자의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독자의 반응이었다.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일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하여 이 자리에서 '재탕'해둔다. 당시에도 적었지만,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에 대해서 (반)공개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신 역자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나의 의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은 (1)(공동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3년간에 걸친 단독번역이라는 것과 (2)(작품명 등의 혼동/혼란에 대해서) 편집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 (3)(그럼에도) 모든 오역에 대한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는 것, (4)(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재판을 낼 경우, 오역들이 수정될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 건의하겠다는 것, (5)(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지적을 바란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먼저, (1)에 대해서는 역자의 ‘고투’ 대해서 사의를 표한다. 아마도 눈치 빠르게 이 책의 판권을 입수한 출판사측에서(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지젝은 그 ‘난해성’과 무관하게 ‘상종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책이 앞으로 번역/소개될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의 역자를 번역의 적임자로 낙점했던 듯싶다. 소위 지젝 전문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런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2001년 하반기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다(그건 ‘번역이 그다지 나쁘진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으로선 비교적 쉽다는 ‘영화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이고(해서 어떤 경우에도 지젝의 책이 촘스키의 책처럼 팔리거나 읽히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에 대한 책이라 하더라도), 거의 ‘고공비행’ 수준의 이론적 담론을 제대로 포착해서 격추하기란, 즉 제대로 소화해서 번역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지젝을 읽는 즐거움은 그러한 난해한 이론/담론들의 ‘액츄얼리티’를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하여간에 비록 오역들을 지적하긴 했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라도 이 번역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부르디외 번역이 상식 이하라거나(그래도 부르디외 연구서를 낸다!) 크리스테바 전문가의 크리스테바 번역이 기대 이하(그래도 크리스테바 연구서를 낸다!)라는 것이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충 ‘존경’받을 교수들이 굳이 번역이란 ‘고투’에 나선 데 대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물론 이런 경우 못 믿을 건 번역서들보다도 그 ‘놀라운’ 연구서들이지만).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공자’나 ‘전문가’란 타이틀의 ‘허명’에 대한 부수적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러한 오역들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속된/헛된 ‘분별’에 나서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저작권 보호법이 걸려 있기에, 한번 출간된 인문 번역서가 재번역/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다시 손써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역자들로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고전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이브하게 말해서, 엉터리 번역서들이 난무해도 된다(나는 이 책들의 오역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사회적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 ‘이론서’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국역본은 정말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았지만(그런 사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도 들 수 있다) 내차버린 경우이다(역자도 번역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둘째는 인문학 자체/전체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며 존중이다.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커녕, 짜증(‘고뇌’ 대신에)과 장벽(‘높이’ 대신에)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언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따금 이런 염치없는 오역서들을 통해서 젊은 대학생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경우 그들은 인문학을 포기하거나(“그 책 너무 어렵던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봐요.”) 무시하게 된다(“인문학? 맨날 괜히 밥 먹고 알지도 못할 소리나 해대는 거 아닌가요?”). 서로 짝패인 이 포기/무시가 이들의 탓인가?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지게 된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말로는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학의 배덕자들에게…

다시 <히치콕>의 경우. 내가 앞에서 얘기한 것은 오역의 일반론이지 이 책이 오물의 범벅이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명 이전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의 범주에는 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서 특별히 오역이 많은 것은 아니란 점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번역본(‘러시아어본’이나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류하자면,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물론 나쁜 번역의 경우에도 반면교사로서, 오역의 교보재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든, 아무리 ‘적임자’에다가 ‘경험자’라 하더라도 ‘영화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젝의 ‘영화책’을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철학 전공자, 심지어 정신분석 전공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작년 내한 강연 때의 번역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그 번역문들이 올 가을쯤에 어떤 모양새로 출간될지 나는 (벼르면서) 기다리고 있다(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물론 곧 쏟아져 나올 ‘지젝들’에 대해서도 나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요컨대, 지젝의 책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역을 한다는 것은 역자 개인의 ‘역량’에서만 비롯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건, 현단계 우리 인문학 수준, 조금 좁혀서 인문서 번역 수준의 문제이고(지젝을 번역할 만한 지적 토양과 ‘언어’가 아직 우리에겐 잘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 출판계의 총체적인 번역 여건과 (출판)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인문학계와 출판계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이미 ‘관행’이 되어 있으므로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고(북매거진 <텍스트>의 지적을 옮기자면, “(우리 학계는) 다른 지식인의 논문이나 외국 문헌을 베끼는 ‘표절’은 예사이고, 응당 책임져야 할 ‘번역’도 나 몰라라 하면서 숨겨둔 무공비급인양 ‘원전’을 활용한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힘써야 할 학회는 조폭처럼 치열하게 지역(나와바리)을 관리하고 소속원을 비판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비판자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 대해 침묵하는 ‘기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패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출판계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까?

<히치콕>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책이 재판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3,000부를 찍었다고 할 때, 역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번역 인세(대박이 안 날 만한 책들은 다 인세이다)는 17,800원(도서정가)*0.07%(인세)*3,000(부수)=3,738,000원이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실제로는 훨씬 적은 액수의 인세를 받았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역자의 예상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대략 400만원 이하의 번역료를 보수로 받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에 이 책의 번역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수지’를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견적은 최소한 하루에 10시간씩 두 달 꼬박이다. 그것도 영화학과 근대철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예비학습’이 얼마간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물론 번역 중에라도 구할 수 있는 히치콕의 영화들은 다 구해서 보는 편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줄 것이다(물론 이 비용은 역자 부담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을 이 책에 전념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수가 한 달에 200만원이 안된다(대개의 인문서 번역 형편이 그렇다). 당신이라면 이 ‘자원봉사’ 수준의 번역을 하겠는가?

따라서, 3년에 걸쳐 <히치콕>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역자의 고백을 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이 번역은 “아내와 엄마로서, 선생이자 학생으로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는 옮긴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과 아빠로서, 선생이자 연구생으로서의 분열적인 삶을 정상인양 살아온” 나는 5년 전에 맡은 번역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게으름’으로만 치자면 내가 한 수 더 위이지만, 거듭 말해서, 그건 ‘게으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건’의 문제이다. 아주 실제적으로 말해서, <히치콕> 같은 경우 적어도 6개월간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될 경우에나 번역에 전념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물론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번역지원 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1년간 지원총액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에 머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가령,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박사연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공모하는바, 채택될 경우 매월 200만원씩 1년간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지원에 대한 의무는 등재학술지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히치콕> 번역(400쪽)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논문’(30쪽)이 년간 과연 몇 편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논문을 쓰는 대신에) 누가 (바보같이!) 번역을 하는가? 번역이나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여건 때문에 ‘악순환’이 생기는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상징계의!) 무관심과 ‘부적절한’ 보수 때문에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며(책을 사보질 않는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그래서 책을 많이 찍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번역자에게 제대로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고. 해서 또 ‘저렴한’ 보수에 맞춘 때우기식 번역이 양산될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나?

내 생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여건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여건이 문제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아예 번역학과가 생기고, 번역가가 최고 유망직종이 되는 등)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지(그래서 번역자들이 다 외제차를 타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무관심을 딛고’ 여전히 고도(Godot)를 기다려 볼 수는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번역자들이 알아서(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듯이) ‘어려운 여건을 딛고’ 번역의 질을 좀 높이는 것이다(이런 걸 ‘살신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이로운’ 번역서들을 턱턱 내놓음으로써, 독자의 발길을 되돌림과 동시에 번역을 무시하던 이들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전에 번역자 조합을 만든다는 전제하에서) ‘번역자 조합’의 조합원 결의를 통해서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나 또한 번역을 했고, 또 하고 있으므로 그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번역자 인권과 제대로 된 보수를 보장받기 위해서. 번역자 시국선언과 양심선언이 뒤따르고, 한 번역자가 한강에 투신하는 등등…

어느 쪽이 더 리얼하고, 덜 리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가지가 상호 상승작용하는 것이다. 가령, 번역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가 TV에 방영되고, 거기에 연이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면서 번역자들을 위한 성금(지원금)이 물밀듯이 기탁되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기폭제가 번역자들의 ‘고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단계 부실 번역의 책임을 사회적 여건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번역자들의 책임 또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료 번역자들의 노고에 경의와 동정을 표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는 말끼리 서로 더 채찍질을 하는 것은 더 잘 달려보자는 뜻이지, 가긴 어딜 가냐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2)에 대해서. <히치콕>의 경우에 동일한 영화명이 다르게 번역된다든가 하는 실수는 역자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편집/교정 과정에서 다 체크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편집/교정자가 눈대중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건’의 탓이 크다. 편집/교정자들이 극빈층의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그들의 ‘직업적’ 매저키스트 성향은 사회심리학적 분석대상이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두 눈 부릅뜨고 책을 볼 만한 여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교정자들에게도 다른 방도는 없어 보인다. 눈 빠지게 일하면서 빨리 그들만의 조합을 만드는 수밖에.

 

 

 



가령, <히치콕>의 46쪽에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로 출시돼 있다는 은 전부 <스트레인저>로 옮겨지고 있는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열차 속의 이방인>으로 번역돼 있다(사실 이게 더 맘에 들지만). 이런 사례들 때문에, 나는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그건 알고보니 ‘분열적인’ 역자 한 명의 ‘오점’ 혹은 ‘얼룩’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역자가 이런 영화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번역과정에서는 그냥 원어로 놔두었었는데, 나중에 (자료조사 등을 한 다음) 알아서 처리해야 할 편집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역자가 불우한 여건 속에서 정신없이 번역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옮긴 것을 편집진에서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

사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잘된 번역에서라면, ‘즐거운’ 옥의 티에 불과하다), 번역이 꼬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를 무섭게 잠식해가는 계기가 된다.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요컨대 역자나 교정자가 독자만큼도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물론, 편집/교정자들이 박봉에 ‘고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수’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건 책임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 완벽하다고 내가 자신할 수 없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 그게 ‘자존심’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장 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3), (4)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안면도 없는 역자를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까 한편으론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바라건대, 개정판을 찍었으면 하지만(그러자면 역설적이게도 많이 읽혀야 한다!), 많이 팔린다는 ‘지젝’이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결자해지,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독해’는 계속될 것이다(*실제로 계속됐었다). 다만, 다른 사정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5)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조만간, ‘히치콕의 서스펜스’와 ‘너무 많이 알았던 관객’ 등의 장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물론 한두 장씩 읽으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 실감하고 있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한 독자의 반응. 그것은 (1)(오역에 대한 지적들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것, (2) (하지만 번역을 기피하는 풍조 속에서) 자칫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는 지나친 비판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박상익 교수도 이런 문제는 조용히/넌지시 처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짤막하게 나의 의견을 밝혔지만, 보다 상세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번역/오역을 ‘응시’하는 나의 자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1) 같은 번역자, 즉 동업자로서의 자리와 (2) 일반 독자로서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자리들에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공식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번역/오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분열적인가? 언젠가 밝혔지만, 나는 (별로 안 팔린 책이지만) 번역서를 낸 바 있고(러시아 소설이다), 또 현재 번역중인 책이 있으며(러시아 소설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여건도 좋아져야겠지만!)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인문서 번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서너 권 정도 검토중에 있다). 또 이전에 번역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한바 있으며(가다머와 리쾨르, 에코, 굿맨 등의 번역이었는데, 완역/출간되지는 않았다), 교정이나 잡스런 번역에도 적잖게 동원되었었다(바흐친, 로트만 등). 요컨대,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옆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나서보지 그러느냐”는 식의 간혹 ‘뒤로 듣는’ 비아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나는 뒷짐지고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에크리>(라캉)와 <피네간의 경야>(조이스),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르네 톰) 등의 ‘숭고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만 아니라면(그건 나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마치 박상륭의 <칠조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처럼. 대신에 ‘교정’해 볼 생각은 있다. 그럴 만한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떤 번역에도 도전해볼 의사를 갖고 있다(번역이란 언어를 통한 존재의 전이라는 ‘사건’이다. 그러한 ‘전이’에, ‘사건’에 어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번역자’의 입장에서라면, 가급적 ‘동료’의 ‘실수’ 등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는 것이 ‘의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다. 동료 의사의 실수를 의사들이 눈감아주고, 동료 변호사의 비리를 변호사들이 눈감아주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만한 일로 낯을 붉히는 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나도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번역자’가 아닌 ‘독자’의 자리로 오게 되면, 전혀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번역자는 같은 업종의 ‘공급자’로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만(간혹 불일치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 ‘공급자’인 번역자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물론 일치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독자로서 내가 읽는 책은, 누구한테 기증 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산 책이다(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에 나는 더러 수모도 당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 가서 주워온 돈이 아니다(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라)!

때문에, 내 돈 주고 산 책이 엉터리라거나 불성실하다면 그건 관용의 윤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공급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종의 ‘사기’니까. 내가 지젝을 샀는데(나는 지젝을 좋아한다!), 뜯어 읽어보니까 지젝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이 들어 있다면(그래서 ‘지젝’을 망쳐놓았다면) 관대한 당신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넘어가는가? 당신이 비싼 돈을 주고 이브닝 드레스를 샀는데, 알고 보니까 남대문 시장에서도 파는 ‘짜가’였다면, 그런데 반품도 안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넘어가는가? 있는 건 돈밖에 없으므로? 그냥 모르고 입고 다니는데, 그걸 굳이 ‘짜가’라고 옆에서 찔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못된 친구’와는 차라리 절교할지언정 그걸 만들어 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모르고 산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가?

해서 사정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주 단순하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 최종적인 책임은 번역자(피고용인)가 아닌 출판업자(고용주)에게 있다. 하지만, 역자 후기 등에 ‘사장님’에 대한 감사가 곧잘 언급되더라도,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함께 역자의 이름이 박힌다. 그건, 적어도 책의 만듦새는 출판사에서 책임지지만, 내용만큼은 역자가 책임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급자(번역자)-소비자(독자) 간에는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 거래에는 아주 기본적인 윤리가 개입한다. 제값을 치르고, 제값의 내용(읽을 거리)을 공급받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서로에게 제값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다(당신은 그냥 대충 이 정도 수준에서 읽고 떨어져라? 나도 어려운 책이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지 그래?).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비판은 그런 기만/모욕에 대한 대응이고, 응전이다.

오역에 대한 그간의 지적이 지나치게 신랄해서 간혹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의 반응 때문에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발단이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적인 차원’의 공격이라는 점이며(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또 그런 부실한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다니, 당신 바보 아니냐?”는 식의 어조는 내가 받은 ‘모욕’(이렇게 번역해도 바보들이 뭘 알겠어?)과 금전적 손실(수입만을 따지자면, 나는 빈곤층에 속하는 시간강사이다. 소위 '화이트 프롤레타리아'이다)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그래도 소심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이 생각을 하면 다시금 분노가 솟구친다. <킬 빌>을 다시 봐야겠다!). 고작 카페 한두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곳에 ‘의견’을 올리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 아닌가?

그로 인한 역효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역효과는 ‘인신공격’을 받은 번역자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적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부실 번역들을 계속 양산해내는 것이다(게으른 자들에게 축복을!).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나의 지적/비판의 정당성을 더 확증해 줄 것이기 때문에(“욕먹을 만하군!”)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거 같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 역효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잘못된 역자를 만난 몇 권의 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존심을 회복해서 더 좋은 번역서로 ‘컴백’한다면, 그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건 ‘역효과’가 아니라 ‘효과’이다.

나는 단지 (애서가로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책’에 대해서 근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오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제대로 된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혔다(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번역자도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건 번역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정상이다(독자의 입장에 서서 한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번역자 자신이 그 책을 가장 깊이 있게 읽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충 둘러대고, 틀어막고, 얼버무리고, 살짝 빼고 한 내용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번역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번역자로서는 수준 이하이고, 자격 미달이다(이런 번역자들에겐 ‘인신공격’도 부족하다).

거꾸로, 어느 정도의 수준과 자격을 갖춘 번역자에게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성의’이다(‘여건’이란 건 이 ‘성의’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뀐다거나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거나 고유명사 표기를 헷갈리게 한다거나 우리말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쓴다거나(통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는 따위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번역자들로서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이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쁜 번역서’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따라서, 한 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부실한 번역서들에 대해서까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예의를 갖출 생각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똘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태도이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참에 오역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결론은 독자에 대한 번역자의 예의란 것인데, 사실 거기에 덧붙여 ‘책에 대한 예의’ 또한 나로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기선 더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번역의 엉터리 책들은 도색잡지보다도 부도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고급 누드집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며, 그러해야 한다.

끝으로, 나쁜 번역서들만 판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 (드물긴 하지만) 좋은 번역서들에 대한 옹호도 곁들인다. 내가 직접 읽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나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책세상) 같은 건 좋은 번역서였다(후자는 내가 갖고 있던 영역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역자들은 모두, ‘관행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들이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들에서도 약간 미심쩍은 곳(동의하지 않는 곳)이나 오타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옥의 티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이들 번역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으며, 그들의 또 다른 번역서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그러한 역자들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06.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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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vs사람에 이어 정혜신의 책을 본다.

 

 

 

 

20060213 : 다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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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2-1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혜신의 글은 나의 이해 정도와 상관없이 무척 잘 읽힌다. 아마 오늘 중으로는 읽어 내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