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검둥개 > 용서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인에게 공지영의 신작소설을 읽었다고 했더니 이 작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그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냥 그렇게만 말했으니 망정이지 곧이곧대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질질 짜며 읽었다고 했으면 무지하게 민망할 뻔 했다. 읽기는 무척 빨리 읽었는데 읽고 나서는 감정이 복잡했다. 뭔가 신파에 속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가 그렇게 쉽게 무장해제가 되었는지도 영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렇게 휘둘려서 읽은 책을 어떻게 평가를 하나 싶었다.

인기작가라서 그런지 이 작가의 작품들에는 몇가지 편견들이 따르는 듯 하다. 나 자신도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과거 작품들에 대해 지나치게 감동/감상과 신파에 치중한다는 불만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눈이 팅팅 붓도록 울면서 읽은 이 책을 (그리고 그랬던 나 자신까지를) 나는 수상스런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다 냉정한 머리로 (그러나 역시 두 번 눈물을 찔끔하긴 했다) 재독을 마치고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다.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 이 책의 미덕은 여러가지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가난과 범죄 & 아동학대와 범죄와의 상관관계, 성폭력/강간과 그에 대한 가족 혹은 사회 단위에서의 무관심 및 폭력, 사형제도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많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하지만, 결코 그에 이론적 사변을 들이대지 않는다. 이 책의 주변적 등장인물들은 대개 전형적이지만, 그럼으로써 흔하게 널린 문제들을 소설 중간중간에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소설 속의 여자들 특히, 가족소유 대학재단 덕에 교수직을 꿰어찬 문유정과 전직 영화배우 출신으로 교수 아내가 된 문유정의 셋째 올캐 서리나/서영자는 일반적으로 그런 배경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품을만한 예상을 벗어나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주인공인 사형수 정윤수의 과거는 거의 주말드라마스러울 정도지만 작가의 치밀한 묘사력에 힘입어 현실성을 획득한다. 공지영의 문장들은 아름다우며 또 빨리 읽힌다.

이 책은 상처, 증오와 불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굳이 꼽으라면 나는 가난한 노파가 자기 딸을 살인한 자를 용서하겠다고 구치소로 찾아와 정윤수와 대면하는 장면과, 문유정이 정윤수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을 강간했던 사촌오빠를 그리고 강간당한 딸에게 등을 돌렸던 제 어머니를 용서해보려고 죽을 힘을 쓰는 장면을 들겠다.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상처라는 것이 있다. 그런 상처는 무릇 네게 돌 던진 자를 용서하라, 따위의 어설픈 경구로 쉽게 아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런 종류의 상처라는 게 무엇인지를 소설에서 잘 그려낸다. 어설프고 쉬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문유정의 어머니는 끝내 딸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병원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고, 두 아들을 두 번씩이나 버린 정윤수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무의탁노인 신세로 발견된다.

"착한 거, 그거 바보 같은 거 아니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거 무른 거 아니야. 남 때문에 우는 거, 자기가 잘못한 거 생각하면서 가슴 아픈 거, 그게 설사 감상이든 뭐든 그거 예쁘고 좋은 거야. 열심히 마음 주다가 상처 받는 거, 그거 창피한 거 아니야......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 하는 법이야.  ....(중략)...  아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는 거는 그런 의미에서 모르는 것보다 더 나빠. 중요한 건 깨닫는 거야. 아는 것과 깨닫는 거에 차이가 있다면 깨닫기 위해서는 아픔이 필요하다는 거야."

이것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구절, 나로 하여금 이 작가 특유의 감상성에 보다 너그러운 시선을 보내게 만들었던 구절이다. 종종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이 작가 작품들의 감상성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발전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흠을 하나  들자면, 소설 전반부에 문유정이 정윤수에게 감정이입되는 부분의 템포가 지나치게 빨라 독자에게는 되려 감정이입이 덜 되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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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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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유효성’을 믿는가? 무라카미 류는 <러브 & 팝>의 후기에서 문학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문학의 유효성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가?’라고.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또 다른 세계를 맛보게 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테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닥거려주는 것이 또한 문학의 힘일 테고 그것이 문학의 유효성일 테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여전히 그것이 유효할까? 한 권의 책보다 인터넷 사이트의 패러디 동영상이 더 큰 위력을 보여주는 지금, 문학작품보다 실용서가 월등히 팔려나가고 있는 지금 그 문학의 유효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기대는커녕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은 모든 작가들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화두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공지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들을 연달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렸던 작가일수록 더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저자의 글에서 이 화두를 직접 확인해보기란 어려웠다. 그러던 중에 작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작년 <별들의 들판>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말을 전하려고 했던 그것도 문학의 유효성을 말하려는 작가의 몸짓이 아니었겠는가. 그 몸짓에 이어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 공지영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한 걸음 더 앞에서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서로’를 비추면서 또한 ‘보는 이’들을 비추는 거울 같은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비추는 첫 번째 거울은 이른바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화려함 속에서 빈곤을 허덕여야 했던, 가수가 되어 화려한 무대에 올랐지만 사는 동안 죽고 싶어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미대 교수 ‘유정’이다.


두 번째 거울은 세 명의 사람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은 ‘윤수’다. 유정과 윤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정의 고모이자 윤수를 달래주려는 모니카 수녀 덕분에 다른 차원의 이들을 서로의 눈을 보게 되는데 그 ‘마주침’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독자들의 ‘마주침’과도 같다.


‘몰랐다’고 외면했던 어두운 곳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나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서글픔과도 같은 그것은 윤정이 윤수를 보며 눈시울이 불거지듯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것은 신파조의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죄인의 억울한 인생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강요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감동’과 부조리한 세상의 어긋난 정의 때문에 만들어진 ‘아픔’이 신의 장난처럼 비극적으로 서로를 찾아갈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강간에 당한 피해자가 다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 사실이나 자본 때문에 밤새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있는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사형제도’로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또한 오해 속에서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있다는 혐의 때문일까? 작품 속에서 사형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이 알베르 까뮈나 빅토르 위고의 그것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건 그 탓일 테다.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고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던 그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여기게 된다. 그 과정은 세속적인 해석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또한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더불어 또 하나의 위대한 정신적 행위인 ‘용서’가 등장해 사형수인 윤수는 천국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처럼 보이고 윤정은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오늘을 맞이하게 된다.


윤수가 윤정을 보며 느끼듯, 윤정이 윤수를 보며 느끼듯 이들은 서로 닮아 있다. 그것은 거울과도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그 거울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품 밖의 사람들에게도 보여 진다. 무슨 뜻일까? 상처 입고, 눈물 흘리고,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우리네 사람들이 우리와 닮은 그들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랑과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인가.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다는 것이겠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인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불편한 책이다. 이 점은 이전에 발표됐던 작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별들의 들판>도 읽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더하다.


허나 신영복 교수가 ‘서경’을 해석하며 말했듯이 불편한 것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것이 오늘날 문학이 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곳을 보게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촉구했을 뿐이다.


저자는 작품을 책상 앞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회 구석구석을 보려고 했던 그 노력, 설사 그곳이 더러운 거품들이 들 끊는 하수구일지라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펜 끝에서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작품을 통해 말을 토해내는 인물들의 절박함을 자신의 것인 양 느낄 수 있는 것도 작품이 지닌 가치 중 하나다.


장편소설로는 7년 만에 발표한 공지영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전에 발표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건드렸다면 이 작품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작가의 작품 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만큼 격동적으로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적은 없었다. 광고 같은 말이지만 이 작품을 두고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허튼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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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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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7년 만에 쓴 장편소설이란다. 인터넷 서점 메인 화면에 떡하니 뜨는데 익숙한 이름이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카트에 담아버렸다. 그녀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던 것일까? 제목이 끌렸던 것도,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글도 안 읽고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렇게... 만나야만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하던데, 어쩌면 책도 그와 같은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보다. 읽어야만 하는 책은 언젠가 읽게 마련이라고 할까나.


우리 모두는 아직 죽음을 경험치 못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태도는 각자 다를 것이다.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자 안간힘 쓰는 이들이 있는 반면 혹자는 스스로 ‘끝’을 결정지으려 든다. 자살, 스스로 생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많은 종교에서는 이를 ‘죄’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와 같은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불문하고 말이다. 아니,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태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기에 우리는 아직 너무 어리니 말이다.


사형. 초등학생 때도 이 주제를 놓고 토론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이는 충분히 토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그만큼 특정 결론을 선택하기 힘듦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의 삶은 고귀하고 다른 누구의 삶은 저속한 것이 가능한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 그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 등등. 수많은 사례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각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지배적인 사고는 존재할 것이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혹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 그들의 삶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이고, 그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악을 긁어모은 것에 불과한 듯 하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그곳을 드나들며 작가는 깨달았던 것 같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100% 착하거나 100% 악하진 않다는 사실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범죄인으로 지목된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그린 ‘윤수’라는 인물은 그러했다.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강간한 파렴치범, 사회는 그의 가슴에 빨간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경직된 눈빛의 내가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학까지 마친, 어떻게 보면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겐 감당하기 힘든 상처가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그래도 나만은 감싸줄 것이다 믿었던 어머니마저도 창피하게 여기며 외면하게 만든... 이미 세 차례나, 타인 아닌 나를 살인하기 위해 애썼던 인물. 나는 타인을 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가 허락한(?),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 윤수의 얼굴을 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지난 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인물을 마주 대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치고자하는 강한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상처 입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윤수였기에, 그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동생마저도 앗아간 지독한 가난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 그는 외로웠다. 냉소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사형은, 타인이 자신의 삶을 멈추게 해준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가 자신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죽음은 축복이었다. 밑바닥만을 기어다니던 자신이 이유야 어찌되었건 유명인이 되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윤수 못지않게 내 안에도 상처가 많았다. 신뢰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 듯 했다. 힘겨워 비틀거릴 때마다 오히려 그런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게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다. 그것도 아주 짜릿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과 상대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발견했다.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자기 자신을... 그것은 삶을 포기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들을 손가락질 한다 할지라도, 그들 스스로를 ‘꼴통’이라 정의한다 할지라도...


감정 몰입이 너무 심했던 것일까. 아니,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 존재하는 상처들을 헤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겨우 딱지가 생겼는데 그 딱지를 잡아뜯어버리고는 그 자리에 맺힌 선홍빛 핏물을 대하는 듯, 그렇게 한 움큼 눈물을 쏟아냈다.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고 싶을 땐 울어야만 하는 거라며...


언젠간 나도 죽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진 나 역시도 하루하루 불안히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일지도 모른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가장 맑은 영혼을 발견하는 것이 나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 결코 끌어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궁극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버려왔던 내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것... 이 숙제들을 완수할 수 있을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는진 잘 모르겠다.


크게 한 번 울고 또 한 번 웃자. 지저분히 쌓인 복잡한 감정들을 잠시 접어두고, 그렇게 나를 치유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행복이 뭔지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는 말을 뱉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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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몇 가지 지적해 본다.

1. 다른 (alternative)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12쪽)==> 누군가의 책을 번역한 것도 아닌데 왜 괄호에 영어를 적었을까?  이 현상은 바로 밑에 또 나타난다. '지지해준다(empower)' 내가 가진 상식으론 독자가 오해할 수 있는 말에 괄호속에 한자를 적는 경우는 보았지만 - 예를들면, 사실(史實)같은 경우 -이런 경우는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독자가 잘 모르는 개념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의 경우는 이 경우와는 다르다.

2. 빈부 격차, 폭력, 인종 증오, 근본주의 같은 인류가 직면한...(13쪽) ==> '인종 증오'라는 말은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게도 영 낯설다. '인종 차별'이 낫지 않을까?

3.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화되고 있는 .... (18쪽) ===> 아마도 globalize나 globalization을 염두에 두고 쓰신 말로 보이는데, 세계화라는 일반적인 용어가 있을 경우는 그대로 쓰는 게 나아 보인다. 물론 특별히 용어를 달리 부르고 싶을 경우라면 조그만 주석을 달아 주면 좋겠다. 물론 '지구화'와 '되다'는 동어 반복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4.  계급, 인종과 같은 여성과 여성의 차이, 남성과 남성의 차이는 남녀 성차별 문제와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고 있다. (19쪽) ==> 이 문장에서 주성분을 골라 보면, '차이는 (문제와) 작용하고 있다' 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작가는 '계급, 인종과 같은 여성과 여성의 차이, 남성과 남성의 차이는 남녀 성차별 문제와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끼치고/주고 받고 있다'라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무슨 작용을 긴밀하게 하는 지를 명기해야 할 것이다.

 2006-02-23

 처음부터 약간의 오류(?)가 보이니까 좀 신경을 쓰고 보고 있다.

5. 정체성의 정치가 문제적인 것은 .....(20쪽) ==> 내가 아는 상식의 범주에는 '문제적이다'라는 말은 어색하다. 뒤의 서술어와 호응관계를 살펴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이나 '문제가 되는 이유는' 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6. 그는 나보다 피부색이 '희었지만' 자신을 흑인으로 강하게 정체화하고 있었다.(21쪽) ==> '희었지만'은 '희지만'으로 바꾸는 것이 좋아 보인다.  여기서 굳이 '었'의 문법적인 기능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정체화'라는 말은 생경하다.  전문적인 용어여서 그러한가? 만약에 여기서 쓰인 '정체화'라는 낱말이 영어의 'identity'와 상관이 있는 말이라면, '자기의 정체성을 흑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라든지 아니면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7. 또한 그러한 요구는,...생략, 남성 스스로가 자신을 여성과 동등한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마치 '성장이 멈춘 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42~43쪽) ==> 문장의 뼈대만 보면, '요구는 ... 주장하는 것이다.'이다. 뭔가가 많이 이상하다. 사실 나의 독해력으로는 '그러한 요구'가 무엇을 말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차치한다면,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주장하는 것과 같다.' 라고 쓰는 게 낫겠다.

8. 어머니는 대단한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지닌 픽션이며, (65쪽) ==> 여기서는 '대단한'이란 수식어가 무엇을 꾸미고자 하는 지 분명하지가 않다. '대단한 목적'인지 '대단한 픽션'인지가 불분명하다.

9. "그러니까, 너는 질그릇이고 나는 본 차이나(Bone China)네!"(70쪽) ==> 도자기의 뜻이라면 본 차이나에서 차이나는 China가 아니라 china로 써야 한다.  이것은 japan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본 차이나(bone china)라고 써야 한다.

- 이제 겨우 90쪽을 읽었는데... 오류라고 생각되는 문장이 많아서 약간은 두렵다.  하긴, 다른 누군가가 이 글을 읽을 확률은 아주 희박하니까 쓸데없는 걱정일게다.

- 하나더 추가하자면, 나는 도무지 이 책의 제목조차 분명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라??? 무슨 말인가? 나는 조사 '~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마구 사용하는 것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의 생각이 무슨 대세에 영향을 끼치겠냐마는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위의 1번 문장(아래 참조)에서 쓰인 '눈의 이물감'에서도, '눈이 지각하는/느끼는 이물감' 이라고 풀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다른 (alternative)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12쪽)

나름대로 제목에 대한 풀이를 해 본다. 지은이나 편집자께서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지만 그건 기대할 바가 아니겠다.  이 글을 볼 리가 없을 것이므로...

1)  무릇 말이나 글은 크게 보면 명사(Noun)와 동사(Verb)로 구성되어 있다.  '페미니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명사'이고, '도전'은 꼴은 명사의 꼴이지만, 동사의 성향이 강하다.  일단 위의 전제에 동의한다면, 동사와 명사의 (의미상의) 결합/관계는 일반적으로  2가지의 경우가 가능하다. 즉, '명사가 동사한다(S+V)'와 '명사를 동사한다(V+O)' 가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페미니즘의 도전'의 경우는 억지로 보자면 마찬가지로 2가지로 이해가 가능하다. 1. 페미니즘이 도전한다.  2. 페미니즘에 도전한다. (도전하다라는 동사는 조사 '~을'과 어울리지 않고 '~에'와 어울린다.) 하지만 이 책의 성향으로 볼 때 2가지 모두 그리 확실한 믿음응 주지 못한다.  

2) 그럼 남은 방법은 단 하나이다. '페미니즘'과 '도전'을 모두 명사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참 어렵다. 도대체 독립된 낱말인 '페미니즘'과 '도전'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무언가 연결할 끈이 있어야 되는데 별로 없다. 좀 어지럽지만, 만약에  challenge of feminism이란 영어로 된 책이 있어 제목을 번역해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도전'이라고 기계적으로 번역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어떨까? challenge 와 feminism의 지시 대상이 같다고 보면 '페미니즘이라는 도전'이나 '(세상에) 도전하는 듯한 페미니즘' 정도의 번역이 더 원어의 의미에 가깝다고 본다.  아무튼 난 이 책의 제목이 무슨 말인지 아직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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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7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타지마할 2006-02-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 / 제 글에 댓글을 단 첫번째 분이시군요. 저 역시 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제 경우에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요.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를 테면 모순되는 단어들이 있다. 자유, 평등, 박애.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기본조항이라는 이 명제는 정확한 오역이다. `박애’라 함은 세상 모든 사람을, 귀족도 수용해야 할텐데 그들의 박애의 대상은 시또양, 혁명에 가담하는 시민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프랑스 동경주의에 젖은 저 번역은 자유, 평등, 형제애, 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 한다 해도 문제가 또 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이 중 자유와 형제애는 함께 할 수 있어도, 평등과 형제애도 함께 할 수 있지만 자유와 평등이 과연 함께 할 수 있는 개념이던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누를 수 밖에 없는 명제들 사이에서 잠시 멈칫해지는 사이 성폭행 사건들은 어김없이 일어나고 법의 울타리는 번복을 계속한다.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어찌보면 저자의 글이 약간 불안한 것은 응집력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책으로 엮어지기에는 문제의식은 가득하되 하나로 모아지는, 결집되는 목소리가 부족하다. 은근은 있되 끈기가 없다거나 끈기는 있되 은근이 없다거나, 둘 중 하나에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나의 눈높이에 알맞았기 때문에,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적 틀린 점이 적었기 때문에. 여성학과 페미니즘에도 얼마나 많은 분류가 있는데 어떤 목소리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보통 전투적 페미니즘의 과격함을 지양하거나 지향한다. 그리고 저자는 조용조용히(그녀의 음성은 참으로 조용조용할 것 같다) 그 사이의 격차를 지적한다. 이미 알고있으되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들, 예를 들면 국방의 의무를 지는 국민, 여우 같은 아내와 늑대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아이가 모여사는 것도 신기한데 이들이 모여살면 비둘기 가족이란다! 내지는, 여자가 남자와 같아질 수 있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는 점 들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던 말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덧, 아는만큼 행동한다, 를 그와 혼동했었나 보다. 비단 미혼인 지금에도 남자친구의 집에 가거나 결혼 생각을 하면 `가사노동’이 자연스레 따라 생각나지만 타인들은 결혼하고 나면 한국내의 여성의 위치를 절감하게 된다는 말도 무섭다. 결혼한 남자는 최소한 여자의 부모를 방문하며 저 집 설거지를 오늘 얼만큼 할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군대의 가산점이라든지 식민지 제도 하의 성폭행, 성폭력 사건이라든지, 한국사회 내에서는 내가 나열해도 이미 충분히 이야기되어 쉰소리 하나 보태는 것밖에 안될만큼의 슬프고 뻔한 사건들이 많다. 이들을 지적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공격하지 말고 낙후시켜라, 라는 명령어와 흡사하다.

 

 

 

나는 앞서 이 책이 나의 눈높이와 맞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할 줄 아는 작가들이 좋아졌다.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순전히 개인적인 딴소리를 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고 무라카미 류는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한다. 이것은 한 쪽은 통찰력이 있고 한 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통찰력을 지녔다는 것인데 이 작가가 딱 그러한 입장이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쉬운 목소리를 만나는 것은, 비록 구성에 있어서 약간 치우치거나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이야기하려 애쓴 탓에 산만함을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조목조목 쉽고 조용한 목소리를, 더군다나 여성학이나 페미니즘에서 만나기는 아스팔트 바닥 밟기만큼 그저 일상적이지만은 않은 일이니까.

 

 

 

하드웨어적인 물질에의 고찰-어떻게 만들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이 책은 참 가볍다. 얇지는 않은 기본적인 프레임과 두께를 유지하면서, 표지는 때를 탈 수도 있는 흰색이 들어가있지만 알맞은 정도로 빳빳하며, 생각보다 책이 참 가벼워서 들고다니며 읽기에 편했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가벼운 책이 보관하기에 편리해서 좋은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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