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내가 월간조선 1999년 5월호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
우리 집에는 월간조선이 딱 한 권 있다. 이번에 마루 책장을 대대적으로 손보면서 책을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인데, 딱 그것 한 권뿐이다. 월간지건 계간지건 본래 잡지 형태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책은 뭐든지 단행본을 선호하는 취미이지만 유독 이 책 한 권만은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다. 왜냐하면 이 월간조선 1999년 5월호에 특별히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기사가 하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이나 신동아 같은 월간지를 보면 과월호건 최신호건 간에 항상 언급되는 몇 가지 주제가 있는데 --- 대표적인 것이 한국전쟁(육이오), 김일성/김정일, 호남(전라도), 김대중, 박정희 등등 ---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표지를 들여다보면 "금융권 대인사 추적! : 호남 인맥이 요직 석권," "한국의 4대 결속력 연구 : 경북고 동창회, 고대 교우회, 해병대 전우회, 호남 향우회," "확인취재 : 인육 먹는 공화국," "조갑제의 역사적 인터뷰 16시간(원고지 500장) : 노태우 육성회고록," "민족사 제1인물 김유신과 그의 시대" 등의 요란한 제목들이 나와 있다. 이번에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보면서도 문득 "내가 왜 이런 걸 갖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해답은 표지가 아닌 책등에 나와 있었다. 흥미롭게도 메인 기사 제목은 표지에,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부수적인 기사 제목은 책등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5월호의 책등에 나온 두 가지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특별조사: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감은 누구인가," "인물연구: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규태의 기자 40년." 물론 이중에서 내가 관심있어 하는 내용은 바로 나중의 기사였다.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의 칼럼니스트 이규태에 관한 기사 말이다.
따지고 보면 392쪽부터 408쪽까지, 불과 16쪽에 불과한 기사 한 권 때문에 무려 656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을 한 권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잡지류를 싫어하는 까닭도 이때문이다. 불과 10쪽, 혹은 20쪽짜리 기사나 논문 하나 때문에 최소 200에서 300쪽이 넘는 책을 한 권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책 한 권만은, 그것도 사방팔방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잡지이지만, 유독 이 하나만은 예외로 둘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뒤적여 본 이규태 관련 글 중에서는 유일하게 그의 개인사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뚝배기와 장맛>(문음사)이라는 자칭 "이규태 자전적 에세이"가 출간된 적은 있었지만, 그리고 무려 100여 권에 달하는 저서와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기자 생활 동안 그 절반인 23년간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면서도, 정작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그의 박학과 습관에 대해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딱히 매체를 통해 알려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는 한" 없었거나, 혹은 "내가 몰랐기" 때문이었는지도.) 그래서 언젠가 우연히 월간조선에 "이규태 인터뷰"가 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롭게 생각하던 차에, 어찌어찌 이 책을 한 권 구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곧바로 서점에 달려가 구입한 것은 아니고, 월간지의 경우에는 보통 그 해당월이 보름쯤 지나고 나면 헌책방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다음 달이나 다다음 달 즈음에 느지막히 단골 헌책방에서 집어들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산 월간조선인 동시에, 별 예외가 없는 한 아마 내가 마지막으로 산 월간조선일 확률이 높다.
이규태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려면 "이규태 코너"라는 그의 칼럼을 빼놓을 수 없다. 나 역시 처음으로 접한 그의 글이 바로 조선일보의 그 장수 칼럼이었기 때문이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때였나, 아니면 대학 때였나, 이전까지는 거의 펼쳐보지도 않았던 신문 읽기에 재미가 들린 시절이 있었는데, 다른 웬만한 기사나 연재소설보다도 유독 재미있었던 것이 바로 "이규태 코너"였다. 세로쓰기 시절 조선일보를 앞에서부터 펼치면 (그러니까 당시로선 "TV 편성표"의 반대편부터였다) 제1면을 딱 넘기자마자 2면이나 3면에 익숙한 그 칼럼니스트의 캐리커처와 함께 길지도 짧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물론 "이규태 코너"의 매력은 그 놀라운 박학과 입담이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잘도 찾아냈다 싶을 정도로 온갖 고사와 일화가 인용되어서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정말 매일매일 그 기사만큼은 챙겨 읽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사에서는 "이규태 코너"를 비매품 책자로 제작해 배포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는데, 그중 초기에 나온 두 권짜리와 중기에 나온 두툼한 한 권짜리 양장본, 그리고 이후에 나온 한 권짜리 단행본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사서 읽은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외에도 <개화백경>과 <한국인의 인맥> 같은 연재기사를 훗날 10여 권짜리 전집으로 만들어 내놓은 것도 있었고, 그 유명한 "한국인의 의식구조" 시리즈 20여 권도 단행본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솔직히 이규태의 그런 다른 글에 대해서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내게 있어 이규태는 어디까지나 "이규태 코너"의 이규태로 기억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이규태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일단은 박학이었다. 어디서 가져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궁무진한 일화의 보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그의 "코너"를 통해 처음 안 경우는 부지기수였고, 내가 안다고 자처했던 사실마저도 그의 "코너"를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측면을 깨닫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과연 이규태란 사람이 지닌 이런 엄청난, 일견 무한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보의 원천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없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방대한 지식이 대부분 "한국학" 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또 매력이었다. "이규태 코너"를 열심히 읽던 시기는 내가 난생 처음 우리나라의 역사나 고전문학 등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시기와 겹쳐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규태 코너"를 읽고 나서 머지않아 그의 초기 저서인 <민속 한국사>라든지, 다른 민속이나 문학이나 역사 쪽의 책을 뒤져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칼럼이나 저서야말로 나로선 이른바 한국학 분야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물론 이규태의 한국학은 어디까지나 "저널리즘 한국학"으로 치부될 뿐, 학계에서 정식으로 대접받는 "정식 한국학"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이규태 코너"나 "한국인의 의식구조" 시리즈가 보여주듯이 그에겐 어떤 체계나 철학이 없다. 다만 이런저런 흥미로운 일화와 정보를 소개하고 또 소개할 뿐이다. 게다가 그런 일화적이고 파편적인 "한국학"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 즉 자칫하면 원래 맥락과는 다른 견강부회가 되거나, 사실과는 다른 왜곡의 우려가 있으며, 언젠가 김용옥이 따끔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벌어지기 쉬운 것이다. (김용옥은 첫 저서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자신이 미국 유학 시절에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거창한 제목이 달린 책을 보고 호기심에 읽어보다가, "한국인의 완질(원 세트)주의"를 미국인의 경우와 비교한 대목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런데 막상 조선일보의 이규태 부고 기사에는 "김용옥도 유학 시절 이규태를 탐독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잘못 나와 있었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가진 월간조선 1999년 5월호에서 이규태를 인터뷰하고 기사를 쓴 인물이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이한우였다.(그는 이번에 부고 기사도 집필했는데, 그 내용은 이 인터뷰 기사의 축약판이나 다름없었다.) 이 기사에는 그의 어린 시절과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된 경위, 그리고 기자 초년병 시절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이후 "개화백경"과 "이규태 코너"로 이어지는 승승장구 시절의 일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최초의 히트작인 연재기사 "개화백경"을 연재하던 시절, 원래 글을 쓰기로 했던 박종화, 이은상, 함석헌 등의 원로들이 모두들 "못한다"고 하기에 얼떨결에 "인사동의 고서저이란 고서점은 다 뒤져 가면서" 자료를 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회고한 부분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 대목에서 그의 장서벽이랄까, 자료의 수집 및 정리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장서가 1만 권이 넘자 "자료가 없어서 못쓰는 게 아니라,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쓰는 사태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이나 일본의 자료들은 비교적 정리가 잘 돼 있어 찾기가 쉬운데, 우리 문헌은 전혀 그런 게 없어. 두어 시간 찾아도 찾는 자료가 나오지 않으니 혈압이 올라가더군. 그래서 분류법을 만들게 됐지."(403쪽) 그 분류법이란 다섯 가지 색깔로 책을 구분하는 것으로, "녹색은 자연, 적색은 인생, 흑색은 종교, 청색은 제도, 황색은 의식주다. 그리고 각 색깔별로 1백여 개의 소분류가 있다. '이규태 한국학'을 지탱해 주는 '이규태 도서분류법'인 셈이다."(403쪽) 물론 단순히 그런 분류만 가지고 "혈압이 올라가지 않도록" 원하는 자료를 금세 찾아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의 서재 사진이 실려 있는 것도 아니므로 선뜻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우면서도 역설적인 것은 "비교적 정리가 잘 돼 있어 찾기가 쉬운" 문헌을 선호했던 이규태 자신의 저서야말로 색인 하나 없는 혼란의 도가니라는 사실이다. 가뜩이나 일화 중심의 파편적인 글을 쓰는 상황에 주제별 색인이나 인명 색인 하나 없는 단행본이 부지기수이니, 이규태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그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는 언젠가 분명히 "이규태의 글"에 나온 내용을 뒤늦게 떠올리더라도, 그게 과연 100여 권이나 되는 그의 책 가운데 어디에 들어있는지 몰라 막막한 느낌을 받는 경우 역시 허다하다. (나 역시 몇 번인가 그런 경우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당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유명했던 펄 S. 벅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규태가 펄 벅의 한국 관광에 따라나섰다가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는 회고였다. 즉 우리에겐 무척이나 낯익은 볏짐이나 까치밥 같은 풍속에 대해 펄 벅이 유난히 흥미를 느끼는 걸 보고는, 자신도 문득 "사물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깨달았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본격적인 "이규태 한국학"의 계기가 된 것은 당장 펑크가 나게 생긴 특집기사를 메꾸어야 하는 현실적이고도 다급한 필요성 때문이었고, 그의 한국학이란 것이 어떤 체계나 철학을 결여한 일화중심의 파편적인 지식에 불과하다는 한계와, 때로는 틀리는 부분도 있고 견강부회적으로 막 끼워맞추는 부분도 있으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민속"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일깨웠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의 공을 어느 정도라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그가 구사한 방대한 학식의 경우, 동서고금의 갖가지 일화 가운데 대부분은 아마도 일본 측 자료 가운데서 참조한 것이 많아 보이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겠는가?) 한편, 막상 한국 관련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내서 인용한 솜씨 하나만으로도 그의 노력 또한 아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런 다양한 자료를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체계가 있었다거나, 혹은 그가 발굴한 자료들이 좀 더 활용 가능하게 제공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는 학자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기자였고, 따라서 흥미 위주의 이야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한계 또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당시 조선일보의 문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어느 인사는 그가 무척이나 "뻥이 센 양반"이었다고 사석에서 회고한 바 있다. 즉 무슨 기사든지 "좀 재미있게 쓰란 말이야! 뻥도 좀 팍팍 섞어 넣어가면서!"라고 주문했다나?) 그러니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 되지만, 사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언젠가 강준만이 이규태를 평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반세기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규태 코너"를 20여 년이 넘도록 연재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역시나 강준만스럽게)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에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입을 다문 것이 아쉬움이자 한계라고 지적한 글이었다. 물론 강준만이야 언젠가 김성우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 바 있지만, 사실 그렇게 비판하자면 그의 눈에 차는 언론인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규태"라는 이름을 정치나 사회면의 핫 이슈를 다루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단지 한국학이나 문화 부문에서 조선일보의 간판 칼럼인 "이규태 코너"라는 재미있는 칼럼을 연재하는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즉 이규태라는 인물이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의 이름 석자에서 어떤 정치적인 의미는 이미 탈색되어 버린 지 오래라는 (혹은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그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가 조선일보나 이후 주간조선 등의 계열사에서 요직을 거치면서 조선일보의 "간판급" 언론인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며, 그 와중에서 강준만 같은 진보 인사들이 화들짝 놀랄 만한 음모의 주역이나 조역으로 활동한 바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리고 얼핏 보기엔 그저 무해해 보이는 "이규태 코너"를 통해 보수우익적 가치관을 더욱 굳히게 된 젊은 독자들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이규태는 "탈정치색"의 이규태, "한국학"의 이규태, 그리고 "이규태 칼럼"의 이규태가 오히려 본색인 것만 같다. 적어도 그의 생애에서 후반기를 직접 목격한 독자의 한 사람인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건강 악화로 2월 11일에 연재가 중단된 후, 사망 직전인 23일에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구술한 감사의 글을 "이규태 코너"의 마지막 회로 싣고 25일에 사망했다는 사실 앞에서는 누구라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미국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리즈 틸버리스의 사후에 출간된 자서전에서, 그녀의 사후에 나온 하퍼스 바자에 미국의 대표적인 의류 및 화장품 기업들이 각자 수록한 추모 광고가 화보로 실려 있는 걸 보고 감동받은 적이 있다. 솔직히 조선일보가 정말로 이규태를 자신의 "간판"으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저자가 떠난 것을 추념하기 위해 이규태 코너를 앞으로 한 회쯤은 텅 빈 자리로 내보내는 것도 멋진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그렇게 멋진 생각을 떠올릴 사람이 과연 조선일보 내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한때 내 꿈은 이규태처럼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일화를 인용할 수 있는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린 시절에 품을 수 있는 박학다식과 박람강기를 향한 유치한 욕망인지 몰라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나로선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지식을 우르르 쏟아붓는 그의 머리가 부러웠고, 이런저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실들을 요리조리 꿰어맞춰 짧지만 인상적인 하나의 칼럼으로 빚어내는 그의 말솜씨가 부러웠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가 책을 얻어서 찾아내는 새로운 지식과 일화에 열광하는 것도 그때문인지 모른다. 아니, 꼭 무슨 글을 쓸 때마다 이런저런 일화를 하나씩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혹은 끝내는 버릇도 거기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규태를 무턱대고 존경하거나 우러러보는 것은 아니다. 한때 그에 대해 품었던 생각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해 버렸고, 막상 읽을 때면 달콤하지만 어디까지나 일회성이고 지속적인 인상을 주지는 못하는 그의 글에 어느새 물려버린 감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사망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월간조선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고, 그에 관한 이런저런 개인적인 감상들을 떠올려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대단하다"는 뜻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사망 소식이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또 "한 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숙연해지는 까닭은, 그 역시 종이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또 종이매체를 통해 지식을 퍼트리던 구세대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에 인터넷이 무척이나 활성화되긴 했지만, 심지어 "이규태 코너"의 캐리커쳐 역시 그가 펜을 손에 쥐고 있는 것에서부터 나중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진화"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종이에서 얻은 지식을 종이 위에 적는 구세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연 앞으로 어느 누가 이규태에 필적할 만한 "xxx 코너"를 그렇게 연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의 빈 자리는 더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강준만의 시원시원한 비판이나, 진중권의 능수능란한 재치나, 홍세화의 진지한 주장이나, 김훈의 단내나는 미문이나, 고종석의 섬세한 감수성 등에 익숙해진 세대가 보기에 이규태의 글은 그저 이런저런 "잡학"을 전면에 내세운 글로 폄하되어 보일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방대한 지식, 혹은 독특한 일화에 걸핏하면 매료되기 쉬운 나로선 제아무리 더 능수능란하고 설득력 있는 문인이나 언론인이 있더라도, 정작 "이규태 코너"의 매력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겨우 16쪽에 불과한 그 기사 하나를 보관하기 위해 두툼한 책, 그것도 월간조선 한 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놓을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