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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숙 “‘조영래평전’은 나와서는 안될 책”
[한겨레 2006-03-21 21:54]    

[한겨레] 올해초 출판된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일생을 다룬 <조영래평전>(안경환 지음, 도서출판 강)에 대해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근거없는 사실 왜곡”이라며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나왔다.

조영래 변호사는 1986년 부천서 사건 당시 수감중이던 권인숙씨의 변론을 맡아, 5공화국의 폭력성과 도덕성을 세상에 알리면서 이 사건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1990년 폐암으로 타계했다. 43살의 나이였다. 권인숙씨는 부천서 사건 이후 변론을 맡은 조 변호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저자인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는 조 변호사의 서울법대 1년 후배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조 변호사와 달리 영미법을 전공해 학계로 진출, 서울대 법대 학장 등을 맡아왔다.

권 교수는 <인물과 사상> 4월호에 “<조영래평전>에는 조영래가 없다”는 기고를 실어 “안경환 교수의 <조영래평전>이 <평전> 제목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형식과 내용 면에서 평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다”며 “출판되어서는 안 될 책이 출판되었다”고 밝혔다.

권인숙교수 “평전이 갖춰야 할 최소요건을 저버린 책,출판되어서는 안 될 책이 나왔다”

권 교수는 이 기고에서 안 교수가 “조영래와 함께 일했고, 조영래를 잘 아는 주변 인물들은 거의 인터뷰하지 않았고 인터뷰 요청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실취재 소홀을 지적하며, 이 책이 최소한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데다 조영래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권 교수는 자신이 당사자인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경우 안 교수가 한 장을 할애했지만 사건를 담당했던 변호사 누구와도 인터뷰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도 인터뷰 요청이 전혀 없었다며 취재 부실을 지적했다. 책의 나머지 부분도 조 변호사의 큰누나와 1시간, 부인과 2시간 인터뷰가 가족에 대한 취재의 전부라며 평전을 쓰기 위해 작가로서 최소한의 취재를 하지 않은 채 글을 썼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저자가 평전에서 조 변호사가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자 출신의 민주화운동가’라는 것을 강조해, 조 변호사가 자신의 일생에서 부정하고자 했던 ‘엘리트주의’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고인의 삶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권 교수는 이런 <조영래평전>의 서술이 조 변호사가 7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수배된 중에서 직접 저술한 <전태일평전>과 대조적인 방식이라고 <한겨레>에 밝혔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수배생활 도중 ‘익명’(전태일기념사업회 명의)으로 <전태일평전>(당시 책의 제목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저술한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평전>에서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자신이 노동법에 관한 도움을 받고 고민을 의논할 대학생 친구가 없다는 것을 한탄한 대목을 인상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수배생활중 ‘전태일평전’ 쓴 조 변호사의 태도와 너무 대조적인 집필태도 문제”

권 교수는 “<전태일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가 나에게도 자신이 그 책의 저자라고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라며 “엄혹했던 70년대 수배생활 시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전태일의 일기 하나하나를 찾아가며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통해 <전태일평전>을 기록한 사실과 <조영래평전>이 쓰인 방식은 너무 대조적”이라고 평가했다. 수배대학생 조영래가 쓴 <전태일평전>을 통해 ‘평화시장의 한 분신노동자’는 척박했던 한국노동현실과 선구적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생생하게 역사에 기록되었다.

평전은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에 이르게 된 고민과 판단의 근거, 그런 사상이 드러나는 에피소드 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권 교수는 “저자가 의견을 갖고 독특한 관점을 드러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조영래 평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평을 내릴 때 당시 그의 고민과 생각들의 근거들을 밝히기 위해 주변인물을 만나고 취재하는 진지한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저자의 현재 사상과 기준으로 보고 싶은 대로 그린, 단정적 평가가 문제”라고 밝혔다. 권 교수는 “안경환 교수가 자신의 새로운 시각을 제출하려고 했다기보다, 한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 들어가야 할 땀과 눈물, 애정이 없는 채 지명도에 의지한 채 책이 쓰여졌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 변호사가 부정하고자 했던 ‘엘리트주의’ 오히려 부각돼 왜곡”

권 교수는 “<조영래평전>의 상당 부분이 서울대 법대와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 놓은 것으로 메워져 있다”며 “서울대 법대와 관련된 분량은150쪽 정도로 책의 1/3에 해당한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권 교수는 안경환 교수에 대해 “진보적·양심적 학자라고 생각했으나 <조영래 평전〉에 나타난 안경환의 관점과 입장은 신보수 내지 뉴라이트에 가까웠다”고 글에서 비판했다.

권 교수는 평전에서 집필자인 안 교수의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관점, 70~8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시각, 조 변호사가 헌신한 민주화운동을 폄하하려는 시도, 여성 비하적 관점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고 밝혔다.

권 교수는 저자가 “조영래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삶을 구성하려 노력했는지 갈등요소는 무엇인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이 평전으로서 최소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변화의 방향에 대해서 남달리 깊은 고민을 늘 하던 조영래의 모습은 단 한 차례도 그려져 있지 않다”며 “안경환 자신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근거도 없이 조영래를 뜯어 맞추고 있다”고 비판했다.

안경환 교수 “당사자 고통에 미안하다…조영래의 다른 장점 드러내려 했다”

한편 권 교수의 문제제기에 대해 저자인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는 “당사자로 고통을 받은 분이 상처받고 가슴아픈 부분은 이해하고 결과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필자로서 염두에 둔 것은 민주화운동사에서 조영래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지만 나는 조 변호사의 시대를 모르는 세대에게 조 변호사의 다른 장점, 즉 그의 통합적 지성을 드러내려 했다”고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밝혔다.

안 교수는 “책 집필은 조영래추모사업회에서 나를 필자로 추천해서 시작되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나의 조건이 시대사를 쓰겠다는 의미에서 양해된 것으로 이해하고, 유족을 제일 나중에 만났다”며 “(책이) 추모의 이름으로 가기에는 적합지 않다는 의미에서 개별사실을 생각지 않고 사회전체적 방향에서 조 변호사의 통합적 지성을 드러내려 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조 변호사의 1년 후배인 내가 그 분과 같이 지내온 사람이 아니었고 시차가 있는 등 일정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개인의 이름이 들어가서 쓰려면 적합한 필자가 아니었으나 옛날 이야기를 쓰면서 회고 못지않게 조 변호사를 만나지 못한 후세대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필했다”고 밝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아래는 권인숙 교수가 <인물과 사상> 4월호에 기고한 내용이다. 권 교수의 동의를 얻어 <인터넷한겨레>에 전재한다.

[권인숙 교수 <인물과 사상> 4월호 기고] <조영래 평전>에는 조영래가 없다

안경환 교수의 근거없는 사실 왜곡을 비판한다

“허명(虛名)이 실명(實名)을 능가하는 사람은 단명(短命)한다.”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에 이만큼 경종이 되는 경구는 드물다. 대학의 수석 입학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엄청나다.(86쪽)


안경환 교수가 쓴 〈조영래 평전〉의 ‘법대생 조영래’라는 장을 시작하는 글이다. 물론 안경환은 서울대 수석입학으로서 누린 명성의 허함을 말하고 싶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단명한 사람을 앞에 놓고 이런 말을 하면서 인생 전체에 대한 평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할 수 있을까? 짧은 인생이었지만 깊은 성찰과 실천적 삶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었던 조영래 변호사의 삶에 대한 있을 수 없는 모독적 평가이다. 허명(虛名) 또는 실명(實名)은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개념이다. 겉으로 알려진 명성보다 실제의 모습은 더 훌륭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통찰력과 사람의 약점과 단점을 감싸안는 소박함과 관대함, 그리고 지도자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히려 안경환 교수가 쓴 〈조영래 평전〉을 읽으면서 이 책 자체를 평가하기 위해 허명과 실명보다 더 적절한 개념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유족과 추모사업회는 출간 자체를 반대했다

이 책의 허명적 요소는 출판되어서는 안 될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출발한다. 이 책의 초고를 읽어본 사람들은 저자와 가까웠던 사람이든 면식이 없던 사람이든 일치된 의견을 냈었다. 평전 집필을 위한 최소한의 취재도 하지 않은 채 쓰여졌기에 조영래에 대한 내용 자체가 별로 없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왜곡과 조영래에 대한 왜곡이 심각하여 ‘조영래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도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조영래추모사업회(대표 홍성우) 측의 정영일 변호사와 유가족 측의 이옥경 선생을 통해 분명하게 안경환 교수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조영래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평전이 안경환에 의해서 나왔다는 소식은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소설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알려진 공인을 기념하는 의미가 큰 평전을, 그것도 첫 평전을, 사실 왜곡이 너무 심각하기에 출판되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조영래추모사업회와 유족들의 강력한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왜곡된 사실을 수정하려는 어떠한 적극적 시도도 없이, 유족과 기념사업회에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발간한 이 행위가 벌써 이 책의 허명적 측면을 웅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이 책의 출판사에서 배포한 언론 보도자료는, 여러 신문 등 언론 매체가 왜 이 책을 조영래추모사업회 공식평전으로 보도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보도자료는 기념사업회 활동의 연속선상에 이 평전 출판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고, 누가 보기에도 기념사업회의 사업으로 보기 쉽도록 쓰여져 있다.

최소한의 취재,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안경환의 〈조영래 평전〉은 ‘조영래 평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형식과 내용 면에서 평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다. 저자는 조영래와 함께 일했고, 조영래를 잘 아는 주변 인물들은 거의 인터뷰하지 않았다. 조영래 변호사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 요청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평전의 한 장을 할애해서 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경우 그 사건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들 누구와도 인터뷰하지 않았으며, 그 사건의 당사자인 나에게도 아무런 인터뷰 요청도 없었다. 다른 장(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족 중에서 조영래 변호사 큰누님과 1시간, 사모님과 2시간 정도 인터뷰한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평전 작가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취재도 하지 않은 채 책을 쓴 것이다. 책 후반부의 조영래 변호사가 담당했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조영래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에 포함된 각 사건에 대한 평가와 해설을 많은 부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적어놓았다. 이 책의 저자가 인터뷰한 것 같이 그려진 부분은 상당부분 추모사업회에서 제작한 다큐 <진실의 불꽃>에서 인용없이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반적으로 평전에서 기대하는 (평전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공인의 사회적으로 드러난 행적 속에 숨겨진 인물과 사상에 대해 충실한 기록적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조영래와 관련된 부분도 조영래의 이름을 내건 평론으로서 의아할 정도로 적다. 책 전체에 걸쳐 조영래와 관련된 사실은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자유언론실천운동’ 부분에서 조영래에 대한 내용은 단 3줄이다. 인권변론의 부분도 총 11쪽 중 조영래 관련 내용은 총 10줄이고, 조영래 변호사가 세웠던 새로운 개념의 법률사무소였던 ‘시민공익법률사무소’라는 제목의 부분에서는 총 10쪽 중 조영래 관련 내용은 2쪽뿐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안경환의 서울대 법대와 관련된 스케치를 산만하게 적어놓은 것으로 메워져 있다. 서울대 법대와 관련된 분량은 대략 훑어보아도 150쪽(책 전체의 1/3) 정도의 분량이다.

조영래 변호사의 삶에서 서울대 법대라는 틀이 차지한 비중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의 그를 알고, 그와 함께 일했던 주변 사람들을 조금만 인터뷰했더라도 이러한 식의 내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조영래에게 법대는 형식이고 틀일 뿐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게 고려할 공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주의 또는 특권의식 등에 경계심을 많이 가졌던 조영래의 삶의 방식과 지향성에 얼마나 어긋나는 방향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저자의 사상적 틀에 짜 맞춰진 평전

이 책의 초고를 보기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안경환의 이미지는 일정 정도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학자였다. 적어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의 민주화운동 정신에 공감하고, 노동자·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진보적’ 지식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조영래 평전〉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안경환의 이미지가 허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조영래 평전〉에 나타난 안경환의 관점과 입장은 신보수 내지 뉴라이트에 가까웠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관점, 1970~198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과 부정적 시각, 심지어는 조영래 변호사가 평생을 바친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여성 비하적 관점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이 평전으로서 최소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안경환은 조영래의 인물됨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성장기부터 시작해서 학생운동을 거치고 수배생활 이후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영래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삶을 구성하려 노력했는지 갈등요소는 무엇인지 안경환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변화의 방향에 대해서 남달리 깊은 고민을 늘 하던 조영래의 모습은 단 한 차례도 그려져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안경환이 조영래의 인물됨을 이해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었다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경환 자신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근거도 없이 조영래를 뜯어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안경환 교수 자신의 사상적 틀에 조영래를 끼워 맞추고자 하는 작업은 여러 군데에서 반복된다.

실인즉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면서도 조영래는 노동자를 사회 변혁의 주체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익명으로 노동자의 투쟁을 촉구하는 시를 쓰고 전태일 정신의 확대 계승에 깊은 정성을 쏟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못 배우고 힘없는 노동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려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법적 상식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명령에 따랐던 것뿐이다. 대학생 출신으로는 장기표만이 비교적 일찌감치 노학연대를 통한 사회 변혁을 꿈꾸면서 노동자의 친구인 대학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일생의 승부를 걸었다.(219쪽)

이런 부분은 평전에서는 핵심적으로 논의가 되어야 할 부분이다. 평전의 저자가, 평전의 주인공 인물의 삶에서 중요한 활동영역을 차지했던 부분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하고 객관성, 타당성을 실으려 노력해야 한다. 조영래 자신이 어떤 글에서 이런 사상적 측면을 비추고 있는지,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증언하는지 등 다양하게 접근을 해서 내려야 하는 결론이다. 이런 조심스러움 대신 안경환은 다른 장에서 주장했던 조영래가 노동자라는 특수계급(무엇이 특수계급인지? 안경환이 ‘계급’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시키려 한다. 아마도 조영래도 안경환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며 그의 노동자에 대한 인식에 타당성과 정당성을 키우고 싶었던 것도 같다.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하자고 말하여 주변의 빈축과 경탄을 샀던 조영래”(448쪽)라는 대목도 그렇다. 박정희 시해 당시 수배 중이던 조 변호사가 누구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도 불분명하고 누구에게 빈축과 경탄을 샀는지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밝히지 않고 있다. 안경환이 원하는 조영래의 모습이 박정희에게 조의를 표하는 조영래였던 게 아닌가 싶다.


조영래가 가부장적?

자신이 그리는 인물을 안경환 자신의 수준에 맞추고 싶었던 그의 의도는 조영래 변호사가 담당했던 변론 활동을 그리면서도 나타난다. 변론 선집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가져다 쓴 ‘여성 조기정년제’를 다룬 장을 보자. 여성의 평생노동권을 거부하는 당시 현실에 큰 변화를 유도했던 1985년의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안경환은 그 장의 시작단계에서 다음과 같이 조영래를 그린다.

같은 시대의 여느 남성이나 마찬가지로 조영래에게 여성은 남성과 다른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공고한 가부장제의 틀 속에 갇혀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이 깊은 조영래라고 하더라도 시대적 상식과 여건의 제약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 옥경을 만나서 여성에 대해 크게 개안했고, 〈전태일 평전〉을 쓰면서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목도했지만 여전히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보통사내였다.(352쪽)

조영래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삶의 행적을 통해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내가 아는 조 변호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가부장적 틀에 매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알았던 그는 사회활동을 하는 부인을 고려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아들을 평일이나 주말의 각종 행사나 모임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종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그런 남자를 나는 조영래 변호사말고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주변의 누구도 그를 가부장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당시 기준에서는 놀랄 만큼 여성문제에 진보적이었던 사례만이 무궁무진하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여성 조기정년제 같은 선구적 사건을 기꺼이 맡고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균열을 시도한 인물을 평가할 때, 무엇이 그를 가부장적 편견에서 벗어나게 했는지를 살펴보는 게 더 합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인물의 실제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안경환이 조영래를 자기 기준이나 수준으로 맞추기 위한 것이거나, 조영래라는 인물을 폄하하고자 하는 시도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조영래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

근거 없이 허한 주장이 너무 많은 이 책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어떤 대목에서는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영래와 불교라는 장에서 김동리의 등신불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뒤 그는 이런 주장을 한다.

“후일 영래는 기회가 닿는 대로 불교의 역사를 더듬으며 분신의 미학을 탐구하곤 했다.”(143쪽)

이 위험한 발언을 하면서 그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조 변호사가 쓴 글이나 행적 또는 주변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은 없고, 본인의 무리한 추측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물론 조영래 변호사는 분신의 미학을 연구한 적이 없다. 안경환의 이러한 주장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형태의 투쟁방법에 대한 책임을 묻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조영래 변호사는 그러한 죽음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고 그러한 투쟁방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어떠한 의도로 안경환은 이러한 ‘사실 조작’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대목이다.

‘분신의 미학’ 외에도 그가 무엇을 조영래에게서 보려 했고 그리고 싶었는지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은 여럿 있다.

〈조영래 평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실제 내용에 비해서 명성이 헛되게 화려하게 쌓여진 이들이 단명하듯 쉽게 사라지는 데 있지는 않다. 적어도 사필귀정의 정의는 이루어진 것이니까. 오히려 실제 내용은 없으면서 겉으로 쌓여진 명성이 과한 이들이나 작품이 오래 생명을 유지하고 내용에 맞지 않는 평가에 의지하여 이득을 취하고 힘을 휘두른 데 있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가 허(虛)가 실(實)을 누르는 일이 빈번해서 이번 일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어떤 이는 체념적으로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허명과 실명의 간극이 극도로 큰 책이 바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조영래 변호사의 첫 번째 평전이라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무엇보다도 서울대 법대교수라는 무게의 저자가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에 대해 쓴 글이라는 이유로 쉽게 ‘좋은 책’이라 인정받고, 대접받게 되는 현실이 두렵다.

실(實)이 허(虛)를 눌러, 안경환이 쓴 〈조영래 평전〉이 그 내용에 걸맞은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요즈음 가장 절실한 나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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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1> 연재를 시작하며(고종석)

2006. 3. 7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3/h2006030719473382000.htm

 

[말들의 풍경] <1> 연재를 시작하며
시간과 공간을 아우른 우리말, 그것 또한 '욕망의 풍경'일수도
김현 선생님, 제목 훔쳐갑니다!
말의 진경을 빚어놓은 그의 유고집 '말들의 풍경' 내 글의 8할은 고인의 그늘 슬쩍 눈감아 주시겠지…
정치공동체가 묶어 준 서울말-제주말… 문학언어 보다는 말에 관한 말들 겨냥

 

오늘부터 수요일마다 독자를 찾을 ‘말들의 풍경’은 지난 한 해 동안 본보에 연재된 ‘시인공화국 풍경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 ‘시인공화국 풍경들’이 언어의 풍경 가운데 한국 현대시의 풍경만을 들여다본 데 비해, ‘말들의 풍경’은 그 살핌의 대상을 언어 전반으로 넓힐 것이다.

앞서 엿본 시(詩)의 말까지 포함해, 말들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앞으로 독자들이 살필 풍경은 바로 이 물음에 거칠게나마 답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새 연재물의 관심사는 언어의 생태학이랄 수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을 언어라는 기호체계 일반에 균질적으로 쏟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관심은 근본적으로 (인공언어가 아니라) 자연언어로 쏠릴 것이고, 또 이 연재물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쏠릴 것이다. 인공언어는 자연언어와의 비교 맥락에서만, 그리고 자연언어 가운데 외국어들은 한국어와의 비교 맥락에서만 눈길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필 풍경은 대체로 한국어의 풍경이 될 것이다.

자연언어들이 으레 그렇듯, 한국어의 풍경도 다채롭고 입체적이다. 다시 말해 한국어는 그 내부가 동질적인 기호 체계가 아니다. 한국어는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출신지역이나 세대, 교육적 직업적 배경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미세하게 살피면, 출신 지역이나 세대나 교육적 직업적 배경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도 한국어를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말씨를 자잘하게 갈라나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개인어(idiolect)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것은 수천만 개인어들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그 수천만 개인어들을 한국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근거는 의사소통 가능성이다.

한 화자와 또 다른 화자가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을 때,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동일한 언어는 균질적이지 않다. 화자의 정체성과 발화의 맥락을 반영하는 크고 작은 이물질(異物質)들이 그 언어의 내부를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 자연언어들이 으레 그렇듯, 한국어도 수많은 변이체(變異體)들의 뭉치인 것이다.

한 쪽 끝에 (예컨대 한국어라는) 언어(language)가 있고 다른 쪽 끝에 개인어가 있다면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방언들(dialects)이다. 방언은, 좁은 의미로 쓰일 땐, 지리적 방언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지역에 따라 분화한 언어 변이체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캐고 드는 분야가 언어지리학 또는 지리언어학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넓은 의미로 쓰일 때, 사회적 방언까지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나이나 직업이나 교육 배경이나 성별 같은 사회적 조건들에 따른 언어변이체들까지를 포함한다.

예컨대 과학자나 법률가들이 쓰는 전문용어, 범죄조직 내부에서 통용되는 은어, 허물없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속어, 인터넷 공간에서 어지럽게 춤추는 이른바 통신언어,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대체로 어색하게 들리는) 한국어 따위가 한국어의 사회 방언들이다. 이런 사회 방언을 파고드는 분야가 사회언어학과 언어사회학이다.

지리적 방언이나 사회 방언만이 방언의 전부는 아니다. 방언은, 더욱 넓게 해석하면, 한 언어 내부의 변이체들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어의 문어와 구어,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 무대의 언어와 객석의 언어, 선동가의 광장 언어와 연인들의 밀실 언어, 방송 언어와 신문 언어 따위는 서로 일정하게 구별되면서 한국어의 방언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여러 수준과 기울기의 방언들은 문체론이나 화용론 같은 분과학문의 일감이 된다. ‘말들의 풍경’은 이렇게 다채로운 방언들로 이뤄진 한국어의 켜를 하나하나 들추어보려 한다.

나는 앞에서 한 화자와 또 다른 화자가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을 때라야 그들은 동일한 언어를 쓰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언어학 차원의 판단일 뿐이다. 정치가 개입하면, 이 원칙은 쉽게 훼손된다. 제주 토박이와 서울 토박이가 그들의 고향말로 의사를 소통하는 것은 퍽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한 언어의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의 긴 세월 동안 이들이 동일한 정치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이 이런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반면에 코펜하겐 토박이와 오슬로 토박이와 스톡홀름 토박이는 앞서 예로 든 동아시아인들보다 한결 더 쉽게 자기들끼리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문법체계와 어휘목록이 서로 거의 일치하고, 음운 수준에서만 자지레한 차이를 보인다. 사실, 순수하게 언어학적으로만 뜯어보면, 노르웨이어란 덴마크어의 한 방언과 스웨덴어의 한 방언을 아울러 이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깊은 생각 없이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를 별개 언어로 간주한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분리 역시, 이들 북유럽인들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라는) 서로 다른 정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과 깊게 관련돼 있다. 만약에 역사의 우연이 제주도의 분리주의를 부추겨 그 섬에 별개의 정치공동체가 세워졌다면, 우리는 지금의 제주도말을 한국어와 다른 별개 언어로 분류했을지 모른다.

정치가 직접 참견할 때만이 아니라 시간축(時間軸)이 끼어들 때도 이와 비슷한 난점이 생긴다. 의사소통 가능성이 어떤 자연언어의 경계를 획정하는 기준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소쉬르(1857~1913) 이후 언어학의 몸통 노릇을 하고 있는 이른바 공시(共時)언어학 안에서 뿐이다. 지난 500년 남짓 한국어는 어휘목록을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문법 규칙들을 새로 보탰다.

게다가 15세기 한국어는 지금 한국어와 달리 성조(聲調)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인과 지금의 한국인이 자신들의 모어(母語)로 의사를 소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15세기 한양 사람들이 쓰던 언어와 지금의 서울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똑같이 한국어라 부르고 있다.

비록 저쪽을 중세한국어라 일컫고 이쪽을 현대한국어라 일컫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에도 눈길을 건넬 터인데, 이런 관행에도 근본적으로는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말들의 풍경’은, 소통가능성이 있든 없든, 한국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모든 말들의 풍경을 살필 것이다.

연재의 첫 자리에서 독자들과 함께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있다. 바로 이 연재물의 제목을 처음 발설한 문학비평가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김현(1942~1990)이다. ‘말들의 풍경’은 그가 돌아간 해 세밑에 나온 유고평론집의 표제다. 김현은 문학이 다른 무엇에 앞서 언어의 예술이라는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말들의 풍경을 탐색하는 데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말들의 풍경을 탐색하는 그의 말들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이루고 있다. 김현이 문학제도 안에서 활동한 시기는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스물여덟 해다.

그의 소박한 독자로서, 김현이라는 이름을 뺀 그 시기의 한국문학을, 아니 그 시기의 한국어 문장을, 말들의 풍경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니라 비평가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김현은 한국문학사에 사뭇 드물었던 말의 진경을 빚어놓았다.

오늘 시작하는 ‘말들의 풍경’은 김현의 유고평론집과 달리 문학언어를 집중적 대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 연재물은, 김현의 ‘말들의 풍경’처럼, 말에 관한 말들이다. 김현이 자주 내비쳤듯 말들의 풍경이 결국 욕망의 풍경이라면, 이 연재물은 욕망의 풍경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풍경을 그리는 내 말들 역시 또 다른 욕망의 풍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서, ‘말들의 풍경’은 말들의 말이자 욕망들의 욕망이자 풍경들의 풍경이 될 것이다.

무단으로 제목을 훔쳐온 데 대한 찜찜함을 추스르며, 오랜만에 고인의 ‘말들의 풍경’을 펼쳐보았다. 이 평론집에 묶인 글들을 쓸 때, 고인은 내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 언어는, 절망스러워라, 내가 한 생애를 더 산 뒤에도 다다를 수 없을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무르익어 있다. 김현이 살아있었을 때,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내 오롯한 즐거움이었다.

그가 산 생애만큼을 거의 살고 보니, 이젠 그 즐거움 저 밑바닥에서 질투의 쓰림과 쓴맛이 배어 나온다. 그가 지금 60대의 선배 글쟁이라면, 내게 이따위 질투심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내겐 이것만해도 그가 더 오래 살았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이것은 물론 그가 너무 일찍 가버린 것에 속이 상한 독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투정에는 고인을 향한 응석이 깔려있다. 사실 질투라는 말 자체가 가당찮다. 내 어쭙잖은 글쓰기의 8할 이상은 김현의 그늘 아래 이뤄져 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말들의 풍경’이라는 제목을 슬쩍 훔쳐온 것을 고인도 눈감아줄 것이다. 선생님, 제목 훔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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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시간을 역행하는 기차에 오른다.시간이 뒤로 뒤로 흐른다.때는 80년대 중반 아침등교길, 선도부들이 학교 앞에서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있다.마치 죄지은 사람들인 양 학생들은 명찰과 옷단속에 분주하다. 무언가 하나 빠진 친구들은 교문 100여미터 멀리서부터 정문을 통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자못 진지하다. 딴에는 자신있게 교문을 통과하다 무언가 걸린 학생들은 엎드려 뻗쳐 자세로 고개를 처박고 있다.위풍당당 선도부들의 머리 위에는 교문 전체를 덮어 쓸 만한 플랫카드가 하나 걸려있다.

"  경축!!  00고등학교 00년도 졸업생 개똥이, 소똥이,말똥이,새똥이 00차 사법고시 합격 "

선생님들이 엎드려 있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자랑스런 선배들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니들은 도대체 정신이 있냐 없냐.그 썩어빠진 정신상태로 뭘하겠다는거냐 ? 전부 일어나! 지금부터 운동장 끝까지 선착순 1명!! "

대한민국이 생겨나고 나서 아니 일제시대때부터 사법고시는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시험이었다. 옛날에 시골에선 한 마을에서 사법고시 합격하면 군수,경찰서장 이런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서 축하인사를 하고 갔다고 한다. 고시에 합격하면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어린 시절 그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감은 할머니가 부르는 할아버지 호칭인데 왜 20대 젊은이를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영감이라 부를까?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법은 사회적 강자들과 권력자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경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수도 없이 있었다. 이런 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재정권과 그의 수족 역할을 해 온 법조인들 때문이다.이 책 <헌법의 풍경>은  크게 두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는 뼛 속 부터 특권화된 법조인들의 모습이다.이들은 법 정신을 수호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의 위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 두번째는 헌법의 조문과 헌법의 정신이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되며 형식적으로만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두식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특권화된 법조인들의 모습을 살핀다.그는  법전 해석의 권한을 법조인들이 독점하면서 특권이 출발한다고 말한다.즉 법조인들은 일반어와는 다른, 난해하고 현실어와 동떨어진 이상한 말들을 공부하며 자신들의 장벽을 친다는 것이다.이건 누구나 동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에게 가장 밀접한 법인 < 주택임대차 보호법>같은 것만 보더라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몇번을 읽고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어떨때는 부동산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할 때도 있다. 생활과 관련된 법이 그 정도인데 다른 법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물론 법조계에서도 이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턱도 없이 멀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법연수원생들의 오버는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고시원에서 쩔쩔매던 시절에 대한 복수인양 자신들이 얻은 특권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들의 막나가는 특권은 아무도 못 이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배울 만큼 배웠고 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너희들보다 똑똑하니까 ... 이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공부하시느라 연애질도 제대로 못해보시고 인간사의 갈등과 인간에 대한 이해도 공부만(?)하신 판사님들이 법(?)에 입각해서 재판을 한다.도대체 법전만 파고 다닌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은 어떤가? 한 체제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고민은 합격하고 나서 하자고 작정한분들이.... 합격하고 나면 생각이나 해보시는지. (물론 법조계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다.특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보다는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해온 지사형 법조인들께 박수를 보낸다.) 어쨋거나 20-30대에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은 역시 검사들이다.검사들 앞에가면 높은 사람들도 다들 주눅든다는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큰 소리 한번만 치고 으르렁거리면 꼬리내리며 정신 놓아버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법조인들은 법의 객관성만을 내세워 자신들은 객관적인 법정신 아래서 일한다고 말한다.하여간 아전인수격으로사용되는 '객관성,중립성,불편부당' 이런 단어들은 사전에서 다시 용어정리 해야한다. 언론도 그렇고 법조계도 그렇고 이 용어들의 성 속으로 쏙 숨어 버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들에게 '객관성,중립성,불편부당'을 독점할 권한을 주었는지...  요즘은 판사님들의 오버 시즌이다. 노 대통령의 형이 뇌물문제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나보다.집행유예인지 무혐의인지 하여간 풀려났다.재판부에서 노건평씨에게 대통령의 친인척으로써 행동에 주의하길 바란다는 멋진 말을 남겼단다. 언론에서는 다들 감동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 했다.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아니 법적으로 문제가 되면 대통령이든 뭐든 법대로 하면 되고 아님 풀어주면 되는 거지 재판부가 그런 충고를 할 권한이 있는가?  재판부의 오버다. 

 김교수의 두번째 이야기는 헌법정신에 대한 부분이다.우리나라의 헌법이 명문으로 만 지켜지고 현실에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헌법의 정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관용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독실한 기독교인인 김교수는 관용의 정신이 부족한 보수적 기독교의 양심적병역거부 문제에 대해서도 헌법정신을 들이 밀며 비판한다. 표현의 자유문제나 정치적 자유문제에 있어서도 관용의 정신을 주장한다.하지만 정작 현실은 아직도 색깔론이 정치권에서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주요언론들은 이를 지원해주고 있으니 전부 헌법정신에 위배된 작당들이다.그러면서도 그들의 수장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국가 문을 닫아야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위대한 정신은 헌법의 정신이 아니라 반공의 정신인 듯하다. 차라지 정권을 잡으면 헌법 1장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말을 삭제하고 '대한민국은 전세계 최고의 반공국가이다 '라는 말을 넣던지.(진짜 그러기만 해봐라.웅 흥분을 가라앉히자..)

이 책에는 그 외에도 헌법에 보장된 권리들이 잘못 적용되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묵비권'  즉 '말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신문에 난 주요 사건들을 예로 들며 친절하게 보여준다. 검사가 '임의조사'를 할 경우 대답하기 싫으면 "저 인제 좀 지겹거든요.갈께요.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도 준법적이란 거다.과연 실제로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또 피의자의 인권측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어떻게 경찰과 언론의 담합으로 무너지는지 구체적 사례들이 등장한다. 힘없는 피의자는(그 죄의 경중을 떠나)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고 힘있거나 좀 귀찮게 할 피의자들은 완벽하게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잘못된 사례들이 인상적이다. 물론 여기에 언론은 알권리 운운하며 맞서겠지만 굳이 헌법정신을 위배해가면서 까지 경찰서에서 고개 푹숙이고 있는 피의자들을 보여줄 필요는 또 뭐있겠는가.다 똑같은 그림이던데....

우리나라의 지난 50년은 독재와 반독재 투쟁의 시기였다.그나마 이제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형식적 민주화란 절차적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민주화가 진정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현재 헌법에 보장 받고 있는 권리들이 실제적으로 지켜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가능하다.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세력들에 의해 독점된 법해석이나 특정시대에 만들어진 법해석등을 과감히 재해석하고 비판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또한 악법도 법이라고 지킬 것만 강요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악법이면 고쳐서 개인의 양심과 자유가 실제적으로 보장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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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재밌게 읽은 만큼 칭찬할 수 있는 보기드문 소설
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말이다. 나는 여성 작가들이 쓴 글을 아주 좋아한다. 쉽게 읽히는데다 재밌고 감성도 풍부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을때는 페이지 페이지 침 발라가며 재미나게 읽었으면서 리뷰를 쓸때는 언제나 삐딱한 자세가 되곤 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이다. 아무리 재밌으면 모든걸 용서하는 나 이지만 그래도 일기장 소설은 좀 심했다고. 적어도 작가라면 상상을 하던가 아니면 발로 뛰면서 자료를 좀 모은다음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무언가를 근사하게 써 낼 줄 알아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이다. (예전에 읽었던 별로 재미없는 소설에 많은 점수를 주었던 이유는 그 작가가 책의 배경이 되는 이국땅에 가서 이미 다 사라진 자료를 고생고생해서 찾아가며 썼다는 말에 그만 감동을 먹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요 근래에 보기 드물게 내가 재밌게 읽은 만큼. 그대로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작가를 만났다면 바로 심윤경이다. 아무리 재밌었던 책들도 일단 리뷰를 쓰는 순간만 되면 나에게 일기장 소설이며 침대소설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었는데 이 작가의 책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정말로 노력을 해서 썼으며 작가적 상상력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재밌기까지 하다. 즉 남의 일기장을 들추는 듯한 느낌을 없이도 내게 재미라는 것을 준 보기 드문 여성 작가인 것이다.

심윤경이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우선 극중 주인공이 남자라는 것에 있다. 알다시피 극중 주인공이나 화자는 나이가 많건 적건 직업이 뭐건 간에 우선 작가와 기본적으로 같은 성별을 책정해 놓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다. 아무래도 다른 성별로 지정을 해 놓으면 자기와 동일한 성별일때 보다는 신경이 쓰이며 더 나아가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해서 작품을 망처버릴 확률이 농후하다. 그리고 작가들 대부분은 성별 뿐 아니라 주인공의 직업을 자신과 동일한 소설가나 기자 등등 아무튼 글쟁이로 설정을 해 둔다. 주인공의 직업마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직업을 설정 해 둠으로 인해 골치아파질 것을 우려한 안일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내가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 직업은 소설가가 단연 1위였다. 2위가 기자임은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심윤경은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했으며 별 무리없이 잘 그려내었다. 약간 오바한 나머지 남성미가 지나치게 풀풀 풍기는 남자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몸만 남자지 여자의 감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남자도 아닌 그냥 남자를 그려냈다.

다음으로는 좀처럼 소설 속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옛 언찰(諺札)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국문학을 들고 판 사람이 아니라면 언문 같은걸 일일이 찾아내어서 언찰로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심윤경은 국문학이나 사학을 전공한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힘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집어넣은 언찰은 나처럼 무슨 말인지 모르면 귀찮아서 읽지 않고 건너뛰는 인간에게 조차 주석을 보고 해석을 하는 기특함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물론 사가에서 손녀와 할머니 사이에서 주고받능 언찰이라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덕도 있다.)

이 소설은 현대가 배경이긴 하지만 주인공이 속한 공간이나 살아가는 방식은 현대라기 보다는 양반 상놈이 존재하던 시대나 다름이 없다. 종손으로 태어난 주인공은 비록 대학을 다니고 가끔 서울을 가기도 하지만 그의 삶의 대부분은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효계당에서 이뤄진다.

어떻게 보면 이건 사랑 얘기일수도 있고 한 맺힌 원혼들 때문에 풀려도 더럽게 풀리는 집안사에 관한 얘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자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이라는게 어디 정해놓은 공식이 있는것도 아닌만큼 나는 분명 주인공이 사랑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 비록 좀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간만에 아주 재밌는 소설책을 읽었고 또 읽을때의 느낌과 마찬가지로 칭찬을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살면서 이런 소설가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라고까지 여겨질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주문을 해 두었다. 작가 말처럼 요즘 소설처럼 쿨하지 않고 실제의 삶이 그런것 처럼 다소 구차하고 남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질척거리며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 작가의 기량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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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세 권을 빌렸는데 어쩌다 보니 두 권을 읽어 버렸다.  나머지 한 권도 읽으련다.  김승옥의 소설집 <한밤중의 작은 풍경>은 부담이 없어 보인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승옥 전집을 읽고 <르네상스인 김승옥>까지 읽어야지...  늘 그렇듯이 리뷰를 써야 하는데.

예전에는 양장본 A5신 규격의 책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은 점점 양장본 B6 규격의 책이 더 좋다.  자그만해서 가지고 다니기 좋아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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