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 - 김훈태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

- 저의 꿈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군문초등학교

교사 김훈태



1.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는 아이들과의 생활 속에서 교육의 목적이 평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게는 평화주의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제게 가르쳐준 삶의 자세입니다. 남을 미워하지 말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모두를 사랑할 것. 미워하는 마음에서 폭력은 시작됩니다. 제 뜻대로 아이들이 따라 주지 않을 때, 저는 화가 나고 미워지고 폭력을 사용하고 싶음을 느꼈습니다. 상대방을 자기보다 낮게 깔보고 모욕적으로 낙인찍으며 미워하지 않는 이상 폭력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평화를 가능케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받기 원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것은 폭력의 두려움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어느 누구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할 것. 저는 제 자신이 다치거나 상처받고, 심지어 죽는다 해도 다른 이를 해칠 수 없다는 신념이 있기에 집총을 거부합니다.


2.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면 세상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집총거부를 마음먹기 전부터 채식을 했습니다. 고기를 몹시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고기가 저처럼 기쁨과 슬픔, 아픔을 느끼는 생명의 죽은 몸이라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뒤로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소, 돼지, 닭과 같은 육고기를, 나중에는 생선과 우유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군사훈련과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사훈련은 저와 똑같은 사람임이 분명한 ‘적’을 빠르고 정확하게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전쟁은 곧 대량살육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말들 속에 숨어있는 증오와 폭력을 오랫동안 생각했고, 결국 총을 들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저는 아이들이 좋습니다. 교육대학 시절 이 길이 진정 나의 길인지 고민에 빠졌을 때 저에게 길을 보여준 것은 아이들이었습니다. 3학년 첫 실습 때 만났던 아이들의 환한 웃음과 꾸밈없는 사랑은 제 모든 것을 교직에 걸게끔 이끌어 주었습니다. 서툴고 부족한 교생 선생을 아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였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감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2학년이었던 아이들은 제 주위로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었고, 자기들끼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왔습니다. 발령을 받아 만나게 된 우리 아이들 역시 기쁨과 사랑으로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또 그만큼 여려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거나 억울할 때는 처절하게 울곤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금세 잊고 다시 웃으며 어울려 지금을 삽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저는 참 좋습니다.


4. 저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군대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라면, 제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평화주의의 신념을 갖게 되었음에도 저는 오래도록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도저히 총을 들 수 없다고 결심한 뒤에도 번민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신념과 현실 사이의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로 교단에 선지 5년째가 됩니다. 이제 조금쯤 수업에도 자신감이 생기고 나름의 교육철학도 갖게 된 지금 아이들 곁을 떠난다는 것은 큰 아픔이자 슬픔입니다. 그러나 제가 굳이 신념에 제 삶을 거는 것은 평생 평교사로 지내시다가 일찍 세상을 뜨신 아버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제 아버님은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 학생들과의 생활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셨고, 말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하실 정도로 진보적인 분이셨습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님은 당시 교육대학 졸업을 앞두던 저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대로 살아라. 아버님은 당신의 삶을 후회하셨습니다. 더욱 치열하고 더욱 용기 있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제 미래였고, 당신의 죽음은 제게 적당히 타협하며 비겁하게 사는 삶을 단호히 뿌리칠 수 있는 태도를 갖게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쉰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가족과 동료와 수많은 제자들의 눈물 속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5. 고백하자면, 저는 평화라는 이름 앞에서 결코 떳떳할 수 없습니다. 초임 시절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거친 말을 하거나 매를 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서 꿀밤이라며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바닥에 내리치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폭력은 쉬운 선택이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아이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고 편하다 해도 가르치는 도구로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역시 저와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상황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을 수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코 체벌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한 뒤 비폭력의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비폭력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극복이었습니다. 끊임없는 탐구였습니다. 제 모든 마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협동을 바탕으로 한 학급운영이었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불안을 내려놓으며 관심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조금씩 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저 자신도 교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회와 수행의 연속이었습니다.


6. 위아래가 분명한 유교적 문화에 오랜 일제 식민지 경험, 그 군국주의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독재정권의 병영문화와 이러한 악습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민주화 시대를 거친 현실에서 학교는 근본적으로 그 교육철학이 바뀌지 않는 한 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군사주의와 국가주의는 아직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월요일이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국기에 대해 맹세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차렷과 열중쉬어의 부동자세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이열종대로 교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과 발전을 당연시하고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며 비장애인과 이성애자를 정상인으로 여기게 하는 교과서도 성찰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가치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사회의 억압 구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인격체이며 내가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똑같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살피고 이해하는 평화 정신과 그 실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준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 앞에 적은 없다’라는 불가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저는 전쟁과 군대를 생각합니다.


7. 군대의 목적이 평화를 지키는 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청년이 국방의 의무를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것 역시 가족과 이웃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병제가 시행되지 않는 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도 그 의무는 피할 수 없는 길이고 피해서도 안 됨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방법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저는 집총을 거부할 뿐이지 ‘병역’ 그 자체를 기피하거나 거부할 뜻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공익근무요원, 공중보건의, 의무소방, 의무경찰, 해양경찰, 상근예비역과 같은 대체복무가 있으며, 이를 통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이도 20여만 명입니다. 제가 이와 같은 대체복무를 마다하는 이유는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판단에서 ‘그깟 4주 훈련’은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으나 저를 비롯한 많은 집총거부자에게 그 4주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총검술을 배우고 사람을 대신한 과녁에 사격을 하는 일련의 훈련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생명을 해치진 않겠다는 평화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 기간은 신념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현역병의 그것과 비교하기는 힘들겠으나 만일 더 어렵고 더 위험하며 더 긴 조건의 대체복무라 해도 신념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군사훈련만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감옥에 가야한다 해도 당당하게 가겠지만, 그보다 더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8. 제 꿈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배운 평화와 사랑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며 성장해 가고 싶습니다. 제게는 평화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 신념은 비겁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닌, 깨어있는 마음과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온화하고 너그러우나 분명하고 단호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이들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이 행동이 진정한 의미의 죄(true crime)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아이들 앞에 설 수 있음을 확신하므로 마음은 어둡지 않습니다. 제 작은 행동을 통해 이 땅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평화와 신념의 의미를 되새기고 어떤 물음을 갖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신념을 갖고 꿈을 키워갑니다. 군인이 되겠다는 아이도 있고 종교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신념과 꿈에 간섭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마다의 신념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이의 신념 역시 존중하며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9. 한 남자가 오래된 온천을 촛불을 밝힌 채 건너고 있습니다. 천장에서는 물이 쉼없이 쏟아지고 촛불은 금세 꺼질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남자는 손우산으로 촛불을 소중히 가리며 조심스레 걷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온천을 무사히 건넙니다. 그리고 혼절하고 맙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요근래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본래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구원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되지만 저는 그것이 깨어있음에 관한 은유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저마다 촛불을 한 자루씩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환하게 타오르던 촛불은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한 일상의 황폐 속에서 시나브로 사그라지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문득, 꺼진 촛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멍한 눈동자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틱낫한 스님의 시를 한 편 소개하며 두서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의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그리고 이 밝고 따스한 빛을 나눌 수 있기를.’


10. 권  유  - 틱낫한

약속하세요, 약속하세요.

지금 이 순간 내게 약속하세요.

하늘 한가운데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동안

내게 약속하세요.


누군가 태산 같은 증오와 폭력으로

당신을 산산이 부수더라도

한 마리 벌레를 대하듯

당신의 삶을 짓밟더라도

당신의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형제여, 기억하세요.

그 사람은 당신의 적이 아니란 걸.

오로지 당신의 사랑과 자비만이

스러지지 않고

멸함이 없으니

증오로는 결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홀로 잔악함과 마주할 때

당신의 불굴의 용기와

사랑으로 가득한 고요한 눈동자와

크나큰 고통을 이기고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은 당신의 미소를

아무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과 죽음을 거듭하면서

여전히 당신을 지켜볼 것입니다.

또 다시 혼자되어

당신의 사랑이 영원함을 기억하며

나는 머리를 숙인 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난할지라도

내 발걸음을 비춰 주는 해와 달은

여전히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2006년 03월 22일

 

>>아,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양심적 병역거부 어떻게 생각하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매 등 누군가의 소개를 받는 만남은 이유 없이 거부하게 된다. 운명의 상대라면 되도록이면 우연히 마주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많고 많은 비행기 중에 우리는 같은 비행기를 탔으며, 그녀는 나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린 운명일지 모른다. 162,245분의 1 이라는 확률을 뚫고 그녀가 다시 나의 옆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진정 나의 운명의 상대로 여겨졌다. 그 확률적 숫자의 노예가 되어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너무도 쉽게 내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이 아닌가 한다. 사랑하는 그 순간 행복하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무조건적인 행복만을 약속하지는 않는 듯 하다. 그 순간부터 책임져야 하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뒤따르는 듯 하다.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었을 때 보장되는 행복이라는 것 역시도 유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하며, 또 실제로 사랑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완벽하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녀만이 지닌 독특함에 빠져들며,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완벽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다가가는 그 순간의 발걸음은 너무도 조심스러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방은 이렇게 할 것이다 라는 계산이 깔리기도 하지만, 그 계산은 그다지 철저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칼날은 심히 무딘 상태이곤 하다. 나의 마음을 열고 상대가 들어오길 기다리다가 때론 그 기다림에 지쳐 내가 먼저 상대방의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때론 억지로 문을 뜯고 들어가기도 하면서,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이 사랑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상대방이 완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때로는 서로 갈등하며 그 갈등으로 인해 남이 되기도 하는 게 인간사가 아닐까 한다. 그렇기에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겨나기도 하고, 이전에 사랑했던 누군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가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어쩌면 상대방의 단점에 대해 이제서야 비로소 눈을 떴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상대방에 의해 나의 영역을 잃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그녀 때문에 나에게 최고의 것이라며 거짓말 하던 지난 날과 달리 나는 그녀에게 지쳤으며 나의 그녀를 향한 감정이 예전의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녀가 윌과 함께 잠자리를 한 것이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식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전부터 식어가고 있던 나의 사랑을 급속도로 사망에 이르게 한 촉매제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미워지는 내 자신에 대한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나는 너무도 많은 시간 동은 금욕주의를 꿈꾸며 살아야만 했다. 모든 것을 부인하던 나의 생활은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한 부인과 무시로 이어졌고 서서히 나는 그렇게 그녀의 기억들을 지워나갔다. 하지만 그 기억들의 지움이 자아의 상실은 아니었으며, 작가는 그렇게 또 다른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사람에게서 물러남과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시작하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을 듯 하다. 추상적인 용어만의 나열을 통해서는 아무리 그 감정이 짜릿할지라도 독자들의 고개를 떨구게 만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려함 보다는 진실성을 택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잊어가는 과정을 진실되게 엿볼 수 있다. 그 진실성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플라시보 > 그가 클로이에게서 레이첼로 건너가기 까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여름. 나는 알라딘에서 경제쪽의 리뷰를 많이 쓰시는 어떤 분으로 부터 내가 분명히 재밌어할 책이라며 이 책을 추천받았었다. 나는 책을 8월 중순에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고 다 읽은 날짜는 어제. 즉 2004년 5월 9일이었다. 이 책을 다 읽는데 거의 10개월이 걸린 것이다. 내가 이 책에 별 다섯을 주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 책을 다 읽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로인한 약간의 스트레스 때문에 별 한개를 빼 버린 것이지 절대 책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책은 아주 훌륭하고도 재밌다. 더구나 나처럼 철학은 어려워 라는 생각으로 프로이드건 비트겐슈타인이건 그 밖의 누구건간에 손을 들어버린 인간에게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책을 다 읽는데 10개월이라는 기간이 걸렸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오래 읽었으며 보통 이정도로 속도가 나가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데 또 어째서 그 긴 시간이 걸림에도 끝까지 읽어치웠는지도 알 수 없다.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금 더 깊게 생각을 해 보면 단순히 사랑해가 아니라 왜라는 물음에서 약간의 고민을 엿볼수도 있다. 그냥 너무 사랑해라던가 정말 사랑하는구나가 아닌 왜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문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그 문제에 관한 생각. 즉 철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한 남자이다. 미혼이며 직장이 있고 혼자 살고 있는 꽤 평범한 남자이다. 그는 어느날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클로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다 그녀와 만남을 가지게 되고 당연하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에 빠진 다음 단계가 계속해서 빠지는 것이면 좋겠지만 실제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바로 원하던 것을 얻게된 자의 오만. 즉 상대의맘에 안드는 구석이나 단점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따라온다. 그리고 그 단점들은 어느순간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저 단점들을 내가 다 알았더라도 나는 사랑을 시작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만큼.

그리고 그 다음 단계. 그런 단점들로 인해 사랑이 끝장 나 버리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느새 정이라는게 생기고 익숙함이 생기며 함께지낸 시간들이 쌓여서 남들은 모르는 둘만의 암호같은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랑은 더더욱 영글어가는 듯 보인다. 이제 남자는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으며, 어쩌면 클로이라는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 혹은 클로이와 자신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은 그 익숙함 만으로 지속되게 가만있지 않는다. 광고에도 나왔다시피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움직이므로.

어느날 그는 클로이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하지만 인정하지는 않는다. 의심은 들지만 의식적으로 그 의심을 누른다. 하지만 자신을 속일수는 있어도 변한 상대방의 행동은 속일수가 없다. 클로이는 점점 변해간다. 시큰둥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짜증과 싸움이 늘어간다. 그러다가 만난지 1주년이 되는 날. 역시 둘이 처음 만났던 장소인 비행기 안에서 클로이는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는 받아들인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나면 남은 사람이 할 일은 딱 한가지이다. 슬퍼하기. 혹은 괴로워하기. 뭐라 불러도 상관없을 마음의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했던 일들을 하나 하나 떠 올리고 사람은 가고 없지만 함께 했던 모든 사소한 일들을 부여잡고 그 기억들과 함께 산다. 그러다 마침내 남자는 클로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 시도는 시도로 끝나고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클로이를 미워한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자기가 버림받을 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것과 달리 이제는 자기를 버린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모든 원망과 미움을 다 보낸다. 그리고 다음 단계. 서서히 잊어간다. 억지로 떠 올려야 생각이 날 만큼. 그리고 가끔은 그렇게 잊었다는 것에 스스로 감상적인 슬픔에 젖을 만큼 말이다.

남자는 클로이를 잊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여자 레이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어렴풋이 자기가 클로이를 만났을때와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 하고 있음을.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다짐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자. 또 다시 빌어먹을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의 심리상태에 의존하여 전개 해 나간다. 다행스럽게도 남자의 심리상태는 시간 순서에 따라 흐르므로 따라잡기가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큰 사건 없이 한 남자의 내면. 그것도 오직 사랑이라는 것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은 마치 조그만 구멍이 하나밖에 나 있지 않은 상자에 갖혀 있는 것 처럼 답답증을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야 책에서 흔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인생의 전체랄지, 아니 한 토막이라 하더라도 갖가지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도 여러가지 사랑이 아닌 클로이라는 여자를 향한 단 하나의 사랑만을 집요하게 이야기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는데 내가 난독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은 답답함에 숨구멍을 터주기 위해서 읽는 중간중간 쉬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한페이지를 읽고 하루를 쉬었고 때로는 한줄을 읽고 한달을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내 기억력 나쁜 머리에서 일어난 일 치고는 가히 기적적으로 한달전에 읽은 책의 앞장과 현재 읽고 있는 뒷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혹시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을 만나고 사귀기로 하고 남들에게도 애인이라고 소개를 하면서도 나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해 마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게 사랑이 아닐까? 뭐 맞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단순했다면. 나의 학습 능력 만큼이나 내가 사랑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생략했더라면 나는 사랑을 조금 더 쉽게 해 볼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남자 주인공에게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랑을 하면서 지나치게 생각이 많았다. 허나 따지고 보면 누구나 사랑을 하면서 그 정도의 생각은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머리속으로 해서 그 분량을 알 수 없을 뿐. 그 모든 과정을 글로 옮겨놓는다면 알랭 드 보통 보다 한 수 더 뜰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는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글귀가 인용되어 있다.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은 정도의 인용이라 괜찮다. 가끔은 단순한 선으로 이뤄진 그림이나 도표등이 등장하긴 하나 역시 어렵지 않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한 남자의 내면을 오래도록 질기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사람들에게 권할 생각이다. 나처럼 그 압박감에 못이겨 읽는데 10개월이 걸리건 1년이 걸리건 꼭 한번은 읽어 봐야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지 재밌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생에 한번 이상은 꼭 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행위 혹은 마음에 대해 한번쯤은 이렇게 착잡할정도로 차곡차곡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하이드 > 나 징하게 연애한판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첫눈에 반했고, 사랑에 빠졌고, 권태기를 겪었고, 버림 받았고,좌절했고, 자살했고( 비록 털어넣은 약이 나중에 비타민제로 밝혀지긴 했지만) , 그리고 그 사람을 잊었다. ...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눈에 쏘옥- 들어와버리는 첫문장 : 1.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이라, 소시적부터 '소개팅'이나 '미팅', 그리고 나이 먹을만치 먹어서는 '선' 이라는 이름하의 모든 만남을 다 어색해하고, 지루해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가는 것은 처음 한 두번. 아무것도 모를때 대략. 대학교 1학년 1학기때. 그리고나면 점점 ' 역시나' 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이제는 집에서 몰릴대로 몰려서, 옷 사러, 혹은 머리 하러, 혹은 백화점 상품권 따위의 떡고물을 기대하며 아주 가아끔 나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혹은 점심 먹고 들어와서 나른하니 일이 손에 안 잡힐때 운명적 만남을 꿈꾼다. 그러나. 꿈꿀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운명적 만남인 것이니.

책 속의 ' 나' 와 클로이처럼 빠리발 런던행 비행기안에서 '우연히' 만나서 '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진다' 는 것은 참. 그야말로 책 속에 나오는 말이다.  책 끝까지 읽기 전에는 나름 이번 빠리 여행때 런던으로 유로스타 타고 가려고 했는데, 비행기로 바꿔봐? 궁리하긴 했지만서도,

과거의 몇번의 비행기 여행, 혹은 기차여행, 혹은 버스여행이라도 떠올려볼 때 내 옆에 남자가 앉을 확률, 나와 사랑에 빠질 남자가 앉을 확률( 나'와' 가 아니라 나'만'이라도!) 은 ... 없다고 봐야지. 음. 없다고 봐야지. 맘 편하게. ( 이 순간 나는 벌써 책의 마지막 장의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가 극히 미미한 확률로 Mr./Ms. Perfect를 만나게 된다면, '금욕주의' 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더 빨리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 에 ' 빠져버리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대게는 무의식적인]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 2단계에 불과하다.'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고, 그 느낌에 놀라서 상대를 밀어내기도 하지만, 이미 서로간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버린 두 사람이 떨어지기란 불가능하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앉은 것처럼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색한' 순간들마저 다 지나가게 되고, 그/그녀를 가지게 되면, 욕망이  한 순간사그러들게 될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댄다. '욕망은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이라고.

그 단계를 잘 겪어낸다면,

이제 진정 그/그녀를 '*마시멜로'하게 될 것이다.

* '사랑'은 이미 너무나 많은 손을 거쳤다. '사랑'은 계속되는 사랑 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 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마음의 언어의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된다. 20세기 말 어느 날 밤 서구의 중국 식당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남자와 여자. 연인들의 모습을 하고, '사랑한다'는 닳고 닳은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그녀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본다. 의미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겠지만,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은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가족보다도 더 친밀해진다.  꿈꾸던 사랑이 이루어졌음에 '너무' 행복해져버린다. 그토록 바라던 미래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 을 느낄정도로.

'너무 ' 행복해진 다음에는?  무슨일이?

사랑을 과장하고, 의무감에 사랑하고, 사랑을 배신하고, 배신당한 사랑에 좌절하고, 괴로워서 죽을것 같고, 그러나 잊고,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왜 나는 이 책을 발렌타인데이에 다 읽어버린걸까? 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마늘빵 > 사랑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 사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진작 이 책을 보지 않았던가?!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처음 들어본 스위스 출신의 철학자가 늘어놓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 사유는 정말이지 나를 '깜딱' 놀라게 했다. 너무 다 까발린거 아냐? 라는 반응과 함께.

 1995년에 이미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어쩐일인지 금새 절판이 되었나보다. 이 책은 결국 2002년에 청미래 출판사를 통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재탄생했다. 아마도 제목이 주는 딱딱함과 지루함 때문에 먼저번 것이 절판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청미래는 제목을 바꿈으로써 표지를 이쁘게 디자인함으로써 다시 독자의 눈길을 끌었고 이 책은 꽤 잘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역자 정영목씨에 대해서 말하자면, 요전에 내가 읽은 <극단의 형벌>이라는 책의 역자이기도 했다. 참 익숙한 이름이다 싶어 최근 읽은 책들을 살펴봤더니 일치했다. 자신이 번역할 책을 고르는데 재주를 가진 듯 하다. <극단의 형벌> 역시 베스트셀러라고까지는 말 할 수 없지만 꽤 인기있는 사회과학 서적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 이 전혀 보통사람같지 않은 보통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책을 25살 무렵에 썼다고 하니 어이쿠 이런 지금의 내나이보다 어리지 않은가? 어린놈(?)이 사랑과 연애, 이별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거 아냐? 라는 약간의 시기심과 질투심을 섞어 보통을 부러워하는 나.

 엄연히 '소설'이라고는 하나 역시 보통 소설과는 확연히 다르다. 대개 소설에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이라는 구성이 있는데 이 구성들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높낮이를 조절하며 관객을 사로잡기도 하고 잠시 풀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의 형식을 무시하고 있다. 물론 보통의 소설에도 형식은 있고, 스토리도 있다. 두 연인이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기까지의 줄거리가 있으니깐 없다고는 말 못한다. 그런데 그 비중이 지극히 낮다. 보통의 소설에서 스토리가 아닌 다른 부분을 제외하고 나면 스토리는 남는 게 없다. 그럼 스토리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뭐냐? 사유다.

 보통은 사랑에 대한 사유와 분석을 적용함으로써 소설을 풀어나간다. 소설의 원동력이 줄거리가 아니라 사유인 셈이다. 누가 철학자 아니랠까봐 그는 소설 속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마르크스, 칸트 등을 끌어들이고 조지오웰과 알베르 카뮈 등의 작가들까지 전방에 포진시킨다. 마치 자신의 현학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 또 여기서 그 나이대의 그의 현학에 시기심과 부러움을 다시 한번 보낸다.

 자신의 경험담일까? 아니면 순수한 허구일까? 소설이라 했으니 허구라고 해야겠지만 모든 작가들의 자신의 경험담을 비롯해 주변의 경험담을  토대로 삼아 소설을 풀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혀 백지상태에서는 소설을 전개해나갈 수는 없다. 더군다나 사랑에 대해서라면 나의 경험담이 필수다. 보통의 이 소설은 아마도 추측하건대 보통의 젊은날의 사랑의 경험담을 녹여 이것저것 붙여놓음으로써 완성하지 않았나 싶다.

 나의 지난 사랑을 돌이켜보건대 나는 많이 서툴렀다. 사랑에. 사랑은 그저 마음만으로 하는 것인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물음의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대사처럼 사랑은 변하는 것이 맞고, 사랑은 영원하지도 않으며, 사랑은 마음만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었다. 그리고 지금 비록 그 때 이후로 내게 사랑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보다는 좀더 낫겠지라고 내게 속삭인다.

 보통은 사랑의 싹틈에서 사랑의 진행, 다툼, 갈등, 그리고 이별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자기사유를 통해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그가 그 모든 과정을 철저하게 '까발리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뭘 생각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생각해야 할 바 이상으로 그가 더 까발려줘서 나는 그의 까발림을 통해 배우고 있다. 그런데 그의 사유과 분석을 읽고 다 기억해낸다 하더라도 실전에 부딪혀 내가 경험하지 않는 한 난 그의 사유를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지는 못할 듯 싶다. 그렇담 남은 과제는 내게 사랑이 오는 것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