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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강남 선생님은 글을 알기쉽게 잘 쓰신다. 전에 [장자]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 기독교 책을 읽는다. 제목이 꽤 도발적이지만 원래 영어제목이 더 와 닿는다.[No  Such Jesus : Reading Christiannity Inside Out]! 감히 번역을 해 본다면 [그런 예수는 없다 : 기독교 신앙을 속이 드러나도록 까뒤집어본다] 이다. 책의 그림 도안이 예수님이 거꾸로 되어있고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고 박혀있는 것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까 뒤집는다는 것은 거꾸로 매달고 비꼬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바닥부터 고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Reading Christiannity  straight  from Jesus' Heart]=' 예수의 심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본다' 정도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맨 앞에서 적으셨듯이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뜻은 다음과 같다. 최근에 영국 BBS방송국에서는 실제 예수의 모습을 법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조금 당혹스럽게 되었다. 예수는 우리들 집에 걸려있는 푸른눈의 창백한 서양인이 아니라 곱슬머리의 못생기고 건강한 농사꾼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예수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관성적으로 노르웨이 사람 같은 예수를 머리 속에 그려왔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림 뿐일까? 우리의 신앙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관성적인 신앙인거 아닐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즉, 우리는 당연하게 우리 머리 속의 예수가 참으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영혼 속에 스민 우상타파! 그런 비판적 신앙을 통한 기독교의 재발견, 새 만남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쓰라린 대목이 많은데, 특히 이런 대목은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런 근본주의자의 숫자가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전체 기독교인의 20 내지 40 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90퍼센트 내지 95퍼센트 절대다수의 개신교 기독교인이 여기에 속한다 보아도 된다. "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네 신자들은 "그래, 이제 하나님의 참 뜻을 가장 잘 섬기는 나라가 우리야. 이제 타락한 미국이나 유럽의 영혼을 우리가 구해야 돼. 선교사를 파송해야겠어."라고 생각하신다는 걸 난 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야말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에 딱 맞는 분들이 아닐까? 서양인들은 타락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2000년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역사적 실험과 실존적 결단을 기독교와 함께 했고 현재의 모습은 그런 고뇌에 찬 여정이 이루어놓은 결과인 것이다. 이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80쪽에 그려진 유태인 대량학살 쇼아를 겪었던 엘리 위젤의 말을 들어보라고 외치고 싶다.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유럽의 기독교 신앙이 왜 구태의연한 답습만으로 20세기를 버틸수 없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씀드리겠다. 사람이 사춘기를 겪고 성년이 되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오줌 똥은 가린다. 다시 퇴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인은 우리만 멀쩡하고 서양인들이 모두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오줌 똥을 못가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년전쯤 우연히 읽게 된 지그 지글러의 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날 지그는 아내가 쏘세지 덩어리의 양쪽 끝을 잘라서 버리고 중간만 요리에 쓴다는 걸 알게 된다. "여보, 우리 어머니는 다 쓰는데 당신은 왠일이오?" 그의 아내가 "사실 전 잘 몰라요.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요리하시고 저도 따라 하는 거예요." 지그는 그의 장모님께 그걸 묻게 되는데, 백발의 장모는 호호 웃으시면서 글쎄 이랬다는 거다. " 그땐 냄비가 적어서 쏘세지를 한꺼번에 요리 할 수가 없었네. 끄트머리를 내가 버렸다고? 아니라네.잘라낸 끄트머리도 따로 담아놨다가 다 썼다네." 어쩌면 오강남 선생님이 누누이 호소하시는 말씀이 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의미한 오래된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는 거다. 왜 이 개명한 21세기에도 기원전의 부족신관으로 사느냐는 거다.

이 책은 무척 다양한 신학적 논쟁을 알기쉽게 찬찬히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요약하기 버거움을 느낀다. 책 자체가 '이렇다 저렇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런 이유때문이다.'가 중요시 되기때문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찬찬한 논리전개가 아니고서야 또 다시 끝없는 감정싸움, 다람쥐 쳇바퀴도는 신앙논쟁 밖에 더 되지도 않을 것이다. 경우 자기와 다른 사람은 사탄이요 불신자로 모는 근본주의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예수는 신화다] 꼴로 스러지고 말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선생님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신다.  정말 상식에 호소하고 보편적인 논리에 호소하신다.

그럼, 난 137쪽의 [잔인하신 하나님-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인용하여 여러분께 오강남 선생님의 빼어난 글쓰기와 진정어린 고민을 전하려 한다. 다음은 책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약간의 팁을 드린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교리와는 달리 무척 호전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잔인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을, 성서의 [출애굽기]의 사건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찬찬히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걸 본다면 오강남 선생님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현재 느끼는 모순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의미를 찾아보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강남 선생님이 추구하는 기독교를 뒤집어본다는 의미라고 본다. 즉, 도대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모순이 던져주는 실존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이렇게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은 일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시내 광야에서 40년간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게 된다. 이 정복 과정에서 이 땅은 젖과 꿀이 아니라 피가 넘쳐흐르는땅이 된다.

정복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주신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다.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요단강 너머 여리고 성이 정복의 첫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을 돌아 그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안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죽여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고 결국은 그 성마저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아이 성을 칠 차례였다. 여리고 성을 치고난 후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음에도, 아간이라는 자가 외투 한 벌과 얼마간의 은과 금을 착복햇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한다. 특별한 방법으로 아간을 찾아내서 아간은 물론 "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이제 화가 풀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일러준다. 이스라엘 군대 중 일부는 성 뒤에 매복하고 일부는 성 앞으로 가서 아이 성 사람을 성밖으로 유인해 낸 후 성 뒤에 숨었던 군대가 진입해서 불을 지른 다음 양면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작전이 성공해서 성 밖으로 나왔던 아이 성 사람을 모두 전멸시키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성에 있던 사람까지 완전히 지멸시키니 그 날에 죽은 사람이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고 했다.

......(한단락 생략)

도대체 이보다 더 잔인한 전쟁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인간이 하는 전쟁이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겟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진두지휘하셨다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현대전에서처럼 폭탄이나 총에 맞을 경우 금방 죽어버리지만, 이와는 달리 창이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은 며칠씩 고통 속을 헤매다가 죽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이 이기기만 하면 이런 참혹한 꼴을 보고도 좋아하신 하나님이라니 이런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욕하고 깍아 내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주 아주 중요한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면, 이렇게 한 민족만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맹활약하시는 잔인하고 옹졸한 하나님 이상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간단락 생략,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생략하는게 안타깝다. 생략의 이유는 인간적으로 베끼는 게 너무 피곤해서이다.이해해 주시길!)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다시 한번 강조한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일을 직접 일기처럼 적어놓으셨다가 나중 선지자에게 불러주시고 그것을 받아적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을 도왔다고 믿은 바를 적어 놓은 신앙고백 기록이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 그 신관에 비친 하나님일 뿐이다.

몇 천년전 당시 부족사회에서는 어느 부족이든 그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 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을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은 무엇보다 전쟁에 능한 신, "만군의 주", 전투 사령관 이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신이 자기들 편이라 생각하고 그 신에게서 용기와 확신을 얻4고 거기에 힘입어 이웃 부족을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신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나라는 무조건 다 미워하는 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이 자기들만의 신이라고 보는 신관을 "부족신"의 신관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던 이런 부족신관을 그대로 채받아 거기에 목줄을 매고 살 필요가 있겠는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보편적 사랑이나 정의하고는 사돈의 팔촌도 안되는 이런 신을 받들며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구를 판판한 것으로 보던 그들의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듯, 신을 이렇게 자기들만의 신으로 보던 그들의 부족신관도 우리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런 부족신관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 자체 내에서마저 바빌론 포로와 함께 의미 없는 신관으로 취급되어 대부분 방기된 신관이다. 제 2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런 한 민족만을 위한 전투적이고 무자비한 신은 사라지고 만국을 통치하는 보편 신의 생각이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은 '무찌르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미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부족신관을 거부하고 자비의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런 부족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이런 부족신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부족신의 망령이다. (이상137-142쪽,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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