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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나는 꽤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내 시간의 일부를 교회에서 보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함과 불완전함에 유난히도 일찍 눈을 뜬 덕(?)에, '혹시나 종교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던 것 같다. 두터운 외투를 뚫고 매섭게 들이닥치는 겨울철의 찬바람도 내 존재의 영원함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때론 세상 사람들을 잠들게 만드는 어둠마저 헤칠 정도로, 무릎 꿇고 작은 두 손 모은 체 보내는 나의 시간은 끝이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기도는 나를 바꾸지 못했고, 세상 역시 변화를 몰랐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몹쓸 일 앞에서도 '강함을 위해 시련을 예비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면의 상처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내 귓가를 맴돌던 웅장한 찬양도, 뜻은 몰라도 습관 마냥 읽어나가던 성경 구절도 어느 순간 헛된 것으로 돌변해 버렸다.
시간이 내 머리를 크게 만들면서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만 내게 들렸다. 이전엔 알지 못했던 남성 중심적인 목소리가 설교 중간중간 느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도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나의 회의적인 생각이 극대화되었던 가장 큰 일은 바로 세례를 앞두고 발생했다. 세례를 위한 어떠한 과정도 밟지 않았고 교회도 드문드문 나가던 내게 어머니는 세례를 권하셨다. 내가 과연 세례를 받을 만큼 진실된 믿음을 소유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다음 기회에 제대로 된 준비과정을 거친 후 받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때 나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데, 왜 거절하는거니? 그렇게 지옥에 가고 싶어?"라는 어처구니없는 응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내겐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거부는 더더욱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세례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세례를 받았지만, 난 아직도 내 믿음에 대한 어떠한 확신성도 가지지 못했다. 여전히 교회는 어쩌다 한 번 나가고 있으며, 기도 한 번 안 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어버렸다. 세례는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
임레 케르테스라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가 있다.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가져다 준 <운명>, <좌절>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자신의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미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15살 때 자신을 덮친 그 기억들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나갔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는 상처 가득 들어선 고름을 짜냈을 것이다. 그의 글은 고통스럽게 내뱉은 신음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를 떠올리는 까닭은 이 책의 작가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임레 케르테스는 작가는 지난 경험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이 책의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 역시 끝없이 자신의 경험을 파헤침으로써 종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를 부정적으로만 평할 순 없을 것이다. 책의 제목에 걸맞게도, 그녀의 마음은 이 책을 써나가면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진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7년 동안의 수녀원 생활은 그녀 스스로 자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택한 것이라 하여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이었을 1960년대, 평등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맴돌기 시작할 그 무렵 그녀의 눈과 귀는 완전히 닫힐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녀에겐 알 권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온 마음을 바쳐 기도를 해야만 했다. 정해진 규칙을 엄수해야만 했고, 그 틀을 벗어날 때마다 부족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 신체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도 무시해야만 했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자각마저도 어쩌면 버려야 했다.
수녀원을 벗어나 대학에 진학했을 때, 세상 어느 곳에도 자신이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느꼈다. '전직수녀'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과대 포장되었고, 어느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마초적 시각에 의해 평가될 뿐이었다. 그 어떤 아름다운 시에도 반응할 줄 몰랐던 그녀의 마음은 정해진 원칙에 입각한 논리성은 보여줄 수 있었으나 창의적인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긴장했다.
그녀의 삶은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된 듯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지만 불안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렇게 끝났더라면 특정 종교에 자신을 바치려다 실패한 이의 무용담으로 이 책은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모든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을 얻었다. 어이없이 박사학위를 상실하고 간질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그녀가 살기 위해 버둥거리면서 접한 또 다른 종교들이 그녀를 크게 만들었다. 의식에 얽매여 자기 안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었던, 신앙이라는 믿음으로 모든 욕구를 붙들어 매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유대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통해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폐와 간질, 자기 안에만 갇혀 지내는 제이콥이 보여준 믿음이야말로 진실된 믿음이 아닐까?
그녀의 글은 그녀의 삶을 담고 있다. 억지로 공감대를 이끌어내려 들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녀의 깨달음까지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순 없다. 마음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니 말이다.
세상은 여느 때보다도 혼란스럽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일부는 종교의 이름을 빌어 폭력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짓밟아야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것처럼...
내가 믿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면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이까지 구원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제대로 된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종교로 타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걷고 있고, 그 방향은 아마도 좋은 쪽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녀가 그렇게 믿고 지금도 걷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