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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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점점 더 자유로워지지만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양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 그토록 신봉하던 자유는 결국 인간을 구속할 것이고,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진정 자유롭게 살아가진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요즘 들어 점점 더 나의 내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무역에 있어서의 장벽이 사라지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이 되어버릴지라도, 결국 무역에서 이득을 보는 쪽은 부유한 국가일 것이고, 하나의 문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강대국이 사용하는 영어일 것이라는 사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어쩌면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비관적인 관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인류는 진보에 대해 낙관을 하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는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해왔으니 말이다. 조지 오웰은 아마도 후자에 속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혁명의 기운이 지구를 감싸고 돌던, 인류가 창출한 어쩌면 가장 역동적인 시기를 살아간 인물, 하지만 그는 그 역동에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두 눈으로 톡톡히 보았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희망보다는 절망으로, 환희보다는 역설로 점철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1984> 역시 그러한 종류의 글이다. 이 글은 1949년,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탄생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관적 시각이 잘 묻어나는 글이다. 당시 전체주의는 결코 인간의 상상 속에 존재하던 체제가 아니었다. 1945년 이후 스탈린 정권은 자신에 대한 반대세력을 숙청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강성함은 냉전으로 이어졌고, 1950년 아니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끊이지 않는 전쟁,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을 죽여야만 했고,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서는 그 괴로움이 타인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인간에겐 양심이 존재할 수 없었다. 사랑은 부질없는 것이었고,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역시 헛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글은 이러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모든 인간이 살고 있는 방식을 담고 있었다. 넘쳐나는 일거리로 하루가 구성되고, 어느 곳에나 자신을 감시하는 세력이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이렇듯 불확실함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모두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해야만 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믿어야 했고 말이다.

윈스턴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대해 무작정 믿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빅 브라더에 대한 증오, 이를 자기 안에 얌전히 잠재워만 두었어도 그의 삶은 그토록 피폐하게까지 전개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빌어 교묘하게 기사들을 정정하고 사실이 아닌 것들을 사실로 창조하는 그의 삶은 과거에 대한 그의 궁금증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만들었다. 맹목적인 그의 삶엔 의미가 없었다. 이미 9년 혹은 그 이상 되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의 이별, 그 이별이 아팠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살아가는 사회에 사랑이라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모든 것은 통제 하에 놓여있었다. 아이를 낳는 것 역시 사랑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당을 위한 일종의 봉사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실이 끔찍했다. 당에 너무도 충실했던 그녀와의 관계가 파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의무적으로 살아야만 했던 관계의 인위성 때문이었다. 그의 메마른 마음이 다시금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기간을 필요로 했다. 줄리아와의 만남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망을 피할지라도 그들을 위한 절대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남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만남의 의미는 사랑 이상이었다. 그 만남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에 대한 반항이었다. 언젠가 지금의 끔찍한 현실은 종결을 고할 것이다, 그 언젠가가 언제인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죄였지만, 그 사랑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만 같았다.

오브라이언에게 철저히 무릎을 꿇는 윈스턴의 모습은 전체주의가 그리 쉽게 깨어지진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브라이언의 존재는 너무도 오묘해 쉽게 정의가 되지 않는다.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상에 대한 온갖 불만의 근원지인 듯한 그의 모습은 철저히 왜곡된 것이었다.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조금의 미심쩍음도 허락지 않는, 그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감시자이며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질서였다. 우리가 품고 있는 단 한 올의 양심조차도 배반토록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나태. 그 유혹은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나를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우리 모두를 버린 윈스턴에게 남은 것은 추악함 뿐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은 그를 지배해버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2 더하기 2가 3이 될 수도, 5가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딱히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단 한 가지의 길을 강요받는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잘 해야 하고, 학생신분을 벗어나서는 부자가 되어야 하고, 결혼을 해서는 자신의 지위를 혹은 자신보다 나은 삶을 자녀에게 물려주어야만 하는... 비록 직접적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존재가 없다 할지라도,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감, 남들보다 나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전체주의가 아닐까. 조지 오웰에게는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졌던 1984년의 모습이 그보다 무려 21년이나 지난 2005년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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