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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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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수레바퀴 아래서> 는 헤세의 경험을 십분 보여주고 있는 자서전적 소설. 한스는 일반 직공이 될 아이들과는 달리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며 말하자면 출세길이 보장되는 길을 간다. 이런 한스에게는 모든 자유로운 활동이 제한되고, 공명심과 스스로의 부지런함으로 한스는 그런 제한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길을 간다.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다

여기서 한스가 공부를 하게끔 이끌어 주는 사람들, 그들은 단지 그가 모범생일 때에만 그에 합당한 애정을 표현한다. 결국 한스가 경멸하는 무식한 직능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교 교장과 목사님들이 더 속물은 아니었을까. 선생님들이 하는 말은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p.146).

수레바퀴 아래 깔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한스는 승승장구하며 친구보다는 공부를 하는 삶을 선택해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만난 친구 하일너를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그건 바로 자신 내면의 세계라 할만하다. 이제까지는 어린 아이로 주변 사람들의 보호 아래에서 길을 선택당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신학교 기숙사라는 특수한 상황이 그의 독립적인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아직 신학교 선생들의 보호아래 있긴 하지만. 보다 억압적인 신학교 내에서 소년 시인 하일너와의 교제를 통해, 그는 저항정신과 자기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에 부딪히고 저항하면 할 수록 그는 점점 수레 바퀴 아래로 몰려지고, 결국 "한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p. 207). 사실 이 문장은 한스가 이미 신경쇠약으로 고향집으로 돌아와 엠마라는 말괄량이 아가씨를 만나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곧 한스의 전체 생애를 말해주는 듯 하다. 특히 엠마에 기댔던 사랑이, 엠마에겐 그저 가벼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반부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그 비극성은 더 뚜렷해진다.

한스는 고공을 향해 가던 한 소년이 청년의 길로 접어들면서 소위 인생의 성공으로부터 멀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속에서 사회에 혼합되지 못한 자, 성공의 길에서 어긋난 자, 타락한 자가 수레바퀴 아래 깔린 자들이란 뜻이다.

헤세, 자신의 한 분신과의 결별 -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연관하여

이 소설은 다 읽고 나서도 내게 뭔가 착잡한 마음이 들게 했다. 결말부분의 뭔가 필연적이지 못한 죽음이 나를 심난하게 했던 것 같다. 한스는 물론 절친한 친구를 잃었고, 사랑에 농락당했으며, 가족이나 주변인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직능일을 배우면서 그 수레바퀴 아래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속의 삶을 끌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르테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거듭 반동을 이용해 상승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은 셈이다. 그런데, 튀어오르려는 찰나에 죽었다는 것은 독자로서 납득이 되지 않는 결말이었던 것.

이것은 이 작품이 헤세 초기 작이라는 것을 분명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작품이 헤세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한 점은, 헤세가 자신의 자아를 두 개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한스와 하일너. 이 둘은 모두 헤세의 분신일 터. 하일너는 그 답답한 수도원의 세계로부터 스스로 벗어난다. 보다 독립적으로. 저항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은 그 자체의 힘으로 떠나가 버리고, 무기력하고 보호받아야 할 다른 분신 한스는 남는다. 그러나 한스가 택하는 길도 역시 하일너와 같다. 다만 다른 점은, 한스의 경우 신경쇠약이란 증세에 의해 수동적으로 흐지부지하게 학교에서 탈출한다는 것이다. 한스는 아직 완전히 학교에 저항할 수 없고, 그런 교육 자체를 거부할 수도 없는 나약한, 달팽이와 같은 존재다.

헤세는 아직 한스에게 더 애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히려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스를 "줄기를 잘라낸 나무"(p.187)로 보고 있다. "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p.187)   한스가 바로 그 나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미 줄기를 잘라내 뭔가 새싹이 자라긴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될 수 없는 불구가 된 나무. 이러한 한스에 반해, 하일너는 학교를 떠난 후 그저 자취를 감출 뿐이다.

한스와 하일너의 관계는, 후에 <데미안>에서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중도에 데미안은 떠나가고, 싱클레어 역시 타락의 길을 가면서 헤매는 생활을 하던 중, 싱클레어는 에바부인과 데미안을 다시 만나면서, 극단에 있던 두 세계 -순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하나로 융합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데미안>에서는 적어도 두 분신의 관계, 즉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가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보완의 관계, 보호받는 자와 보호자의 관계처럼, 일종의 동일목적의 두 분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스와 하일너는 사실 보완 관계였음에도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하일너는 아직 데미안처럼 진지하게 세상을 알지 못하는 풋내기 괴짜일 뿐이다. 한스에게 배신당했다고 믿고,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 어린애일 뿐이다. 다만 하일너는 한스의 내면에 있는 경직된 세계와 자유로운 세계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데미안과 유사한 점일 뿐이다.

한스와 하일너 관계에 대한 보다 발전된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이다. 나르치스는 지적으로 비대한 사람. 성스럽고 고결한 수도자로 향해가는 정신의 고행자. 골드문트는 반대의 세계, 성과 사랑, 타락과 여행, 방랑 등으로 점철되어 세상을 겪어 나가는 행동하는 자. (보다 확대해 이들이 화해점을 갖는다면, 행동의 고행자라고나 할까? 이러한 고행의 의미가 한층 격양되어 화합으로 가는 소설이 <싯다르타>가 아니었는지...) 그런데, <수레바퀴 아래서>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서로 오른쪽과 왼쪽이 뒤바뀌어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한스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하일너는 떠나는 자로 중반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남겨진 나르치스는 초반과 결말에만 등장하고, 주로 떠나온 골드문트의 삶을 중심을 펼쳐진다. 말하자면, 떠나간 하일너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다른 후기 소설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수레바퀴 아래서>가 같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스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이 소설은 어쩌면 약간의 화해도 조장하지 않으며, 일종의 좌절, 비관주의로 막을 내린다. 한스는 죽음을 통해 끝까지 항거하고 있지만, 그 항거는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p.261) 흐지부지한 항거이다. 자살인지 실족사인지조차 뚜렷하지 않다. 사실 헤세는 흐지부지한 결말, 화해도 저항도 아닌 것같은 결말을 내버렸다. 그러나 한스의 죽음은 다른 소설과의 연장선에서, 헤세의 자아 하나, 즉 하나의 분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스가 죽음으로써, 이제 인생의 성공을 향해 가는 공명심에 가까운 소심한 자아의 말소를 이루었던 게 아닐까. 물론 완전한 말소는 아니었다. 그의 후기 소설들이 말해주듯이 헤세는 이 두 자아의 보다 발전적인 행방을 찾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분리된 두 자아의 합일을 꿈꾸었다.  이러한 꿈으로 가는 하나의 계기가 헤세 내부의 강했던 어린 시절의 자아(일종의 초자아), 즉 한스를 수레바퀴 아래로 내 몰고 죽임으로써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소설은 헤세의 어린시절에 대한 회고이자 작별이면서, 자아찾기를 새로이 시작하게끔 하는 전환점에 서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헤세는 이제 자신을 두 개의 자아로 분리하기 시작했고, 어떤 자아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그리고 분리된 자아의 합일을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H's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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