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히노 에이타로 지음, 이소담 옮김, 양경수 그림 / 오우아 / 2016


테헤란로에 면한 고시원 작은 방에서 살던 시절, 새벽 2시 부엌에 물을 마시러 들어갔다가 창문 너머로 길 건너편 거대한 빌딩 아직도 불 켜져 있는 사무실들을 마주한 채 꽤 긴 시간 멍하니 섰던 기억이 있다. 아, 나도 야근하고 싶다. 아무리 기다려도 불이 꺼지지 않는 밝은 방들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으로 몇 가지 짧은 생각이나 조각난 감정들만 머릿속에서 애꿎게 켰다 껐다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일하는 사람의 공간이 새벽 2시까지 밝듯이, 어느 일하지 않는 사람의 작은 방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차이라면, 누군가는 그 빛을 떳떳하게 세상 바깥으로 쏟아내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방에는 창문이 없어 그 연약한 빛조차 안으로만 갈무리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밖으로 새어나가는 빛이 앞으로도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안으로 고여 눅눅한 syo의 빛 역시, 아무리 오래 오래 씹어 삼켜도 결코 꺼질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직업이 있는 사람들과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공간에서 매일 새벽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그 빛을 아무리 그러모아도 세상은 한 뼘도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빛이 셀수록, 밤은 비웃듯 더욱 깊었다.


지금도 그때와 같아 syo는 여전히 한 움큼도 가진 게 없이 좁은 방에서 새벽을 태우는 처지지만, 기나긴 이 백수 생활 가운데서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가짐 하나는 있다. 노동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되, 야근 당하는 그들의 불만에 배 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혀를 차지 않는 것. 배가 고파도, 자본이 나를 쳐다보기도 전에 알아서 훌훌 벗고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윈주의 좌파

피터 싱어 지음, 최정규 옮김 / 이음 / 2011


자연스러운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자연주의의 오류'는 웬만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초저녁에 타파되어서 이제 자연스러운 섭리 운운하는 말은 syo의 귀에는 "제가 이렇게나 무지몽매한 인간입니다. 아시겠어요?" 하는 말로 자동번역되어 들리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syo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그 '이것'이 못마땅하거나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뿐,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주장 자체에 대해 조금의 거부감도 갖고 있지 않다. 빨갱이 syo에게 스스로 올바른 행동의 방향을 정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다.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과정에서 인간 본성을 무시한 데 따른 부작용은 경계해야겠으나, 문화와 제도가 도착해야 할 올바른 목적지를 설정하는 데 인간의 본성이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가야할 자리가 어디인지는 그렇게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설령 여성의 본성이 남성에 비해 육아나 양육에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그것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양육과 육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다. 사실이 아무리 축적되어도, 그것이 가치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데는 그저 '효율적인'이나 '자연적인' 따위의 허접한 형용사로 범벅된 것 이상의 근거가 필요하다. 양육과 육아에 관한 본성이 어찌되었건, 그것은 곧바로 여성의 사회진출 비중을 남성에 비해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일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행여 그 사실을 가지고 현재의 이 불균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이 불균형이 올바르거나 타파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할 수는 없다. 원래 그래. 본성이니까 그래. 세상에 그만큼 허망한 말은 없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인간 본성의 정의가 변화되어 온 긴긴 역사를 보자. 노동이 노예의 본성이라고 말한 사람은 2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최고의 철학자지만 오늘 우리는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최소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오늘의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의한 물건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후에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다고 확신에 차서 원래와 본성을 말할 수 있는지. 귀납적 학문은 언제나 위태롭다. 굳기로 따지면 세상 단단할 것처럼 보이는 물리학도 왕왕 판이 뒤집어진다. 진화심리학은 반짝반짝하기는 한데, 아직 예금 보유량이 많지 않은 자그마한 신생 은행처럼 보인다. 가치 판단의 영역에 자금을 대출해주기보다, 오히려 다양한 영역으로부터 자본을 확보할 필요가 있지 않나.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사실 문제'와 '가치 문제'를 구분하는 것은 이제 어디서나 기본적인 자세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syo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면 그걸 개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치 기준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들을 다 잘라내는 일은 더욱 말도 안 된다. 결국은 0 초과 100 미만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자체가 가치투쟁이고 관점투쟁이며 헤게모니의 다툼일 뿐, 어느 한쪽이 객관적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다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비유에서,


조각공예가에게 나무 한 토막을 건네주고 그것으로 나무그릇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보라. 그가 나무토막을 보지도 않고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디자인에 따라 나무토막을 깎고 다듬기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게 될 재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재료의 나뭇결과 재질에 걸맞도록 디자인을 수정한다. 정치 사상가들이나 혁명가들 혹은 이들을 추종하는 사회개혁가들은 너무 쉽게 이상 사회의 상을 만들어내는 반면, 정작 그렇게 만들어질 이상 사회에서 일하고 살아나가며, 또 그 이상 사회를 향한 계획을 추진해나갈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다. (69)


피터 싱어의 지적은 정론이다. 그가 비판할만큼 정치 사상가들이나 혁명가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안이하게 생각했던 측면이 있다. 0과 100은 옳지 않다. 그러나 저 비유 자체가 결국 이상 사회의 상을 만들 때 인간의 본성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점 투쟁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공예가가 나무그릇을 만들 때, 그는 나뭇결과 재질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무를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이나 탄소 원자들의 결합 구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논점은 인간의 본성을 '나뭇결과 재질'로 보느냐 '분자나 탄소 원자'로 보느냐, 즉 본성의 위치가 어디이며, 어느 정도로 고려해야 하느냐 하는 정량적인, 그러나 동시에 정성적인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쓰고 나니까 마치 피터 싱어가 무슨 망발이라도 한 것처럼 읽히지만,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 책은 syo에게 상당히 좋은 책이었고, 피터 싱어는 이 책에서 어떤 기록할만한 망발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소소한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했을 뿐, 전체적으로 열심히 끄덕거리며 독서를 마쳤다. 요약을 덧붙이지 않으면 syo의 똥글이 이 책에 대한 오해를 만들까봐, 피터 싱어가 주장하는 다윈주의 좌파의 강령을 덧붙인다.


다윈주의 좌파는 

- 인간의 본성을 부정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무한히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 정치적 혁명에 의해서든 사회적 변화에 의해서든 혹은 보다 나은 교육에 의해서든,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모든 불평등이 차별, 편견, 억압 혹은 사회적 조건들로부터만 기인한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불평등의 일부는 이들로부터 유래했겠지만 모든 경우에 그럴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윈주의 좌파는

-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책을 제시할 때에는 그 정책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제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어떤 것이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식의 추론을 거부해야 한다.

- 어떤 사회적/경제적 시스템 아래에서 살든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친족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 경쟁보다는 협조를 촉진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경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착취해도 된다는 새악은 사람과 동물 간의 간극을 과장하는 다윈주의 이전의 유산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들의 도덕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 약자, 빈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섬으로써 좌파가 가졌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곰곰이 연구해야 한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5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1-26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8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1-2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는 2017년...

syo 2020-01-24 11:3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때사서 아직 안 읽음 ㅋㅋㅋㅋ

공쟝쟝 2020-01-24 11:45   좋아요 0 | URL
그 글을 이제서 읽고 댓글다는 나 ㅋㅋㅋㅋ 근데 이글 슬퍼요 ㅠㅠㅠㅠㅠㅠㅠ

syo 2020-01-24 12:03   좋아요 1 | URL
슬픔이여 안녕. 백수의 슬픔은 끝났고 이제는 노동자의 슬픔대열에 동참합니다....

공쟝쟝 2020-01-24 12:12   좋아요 0 | URL
백수보다는 좀 덜 슬퍼요! 월급이라는 기쁨! (찰나의) 잘 하실 거잖아요, 게다가 고용주가 국가라니..(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