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를 만나지도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뭐 특별한 것 먹지도 않고, 그저 침대에 책 서너 권 올려놓고 뒹구는 것. 읽고 싶을 때 읽고, 읽다 지치면 졸고, 졸다 깨면 기지개를 켰다,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네이버에 물어도 봤다 하면서 빈둥빈둥, 침대 위에서 하염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 밑줄을 치거나 귀퉁이를 접어가며 하루를 탕진하는 것. 매주 하루씩 뺄 수는 없었지만, 한 달에 두 번은 꼭 그렇게 별다른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을 가지는 것. 창 밖으로 잔잔히 빗방울 떨어져 똑똑똑 유리 두드리는 소리 들려 주기라도 하면 더할 나위 없는. 내가 오래 사랑해 온 나의 휴식은 대충 이런 야트막한 그림이다. 커피 맛 잘 알지는 못하지만 90도에서 25도로 차근차근 식어가는 사이에 숨어있는 모든 온도의 맛을 칭찬하는 마음을 배우고, 소소한 것들을 얻는 데 드는 기다림을 고마운 마음으로 덧칠하는 법도 배우고. 그러다보면 어쩐지 마음에 가득 힘이 생겨 오래도록 소홀했던 옛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해 보기도 하는. 어떻게 내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기특하고 예쁜 나의 휴식. 충분하면 그걸로 충분한 시간.

 

그 시간들이 다 어디로 갔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서너 권의 책과, 자꾸자꾸 식어가는 한 잔의 커피와, 거친 숨을 자주 내쉬는 고물 노트북과, 그 모든 것들이 올려져 있는 작은 내 침대와, 그 사이를 뒹굴고 있던, 뒹굴 수 있던 나는. 모두들 어디로 갔나. 

 

  

...... 용기를 내 침대 밖으로 나오기로 한다. 일상이 망가져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해서 일상이 망가진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침대에서 멀어지는 걸음걸음마다 나는 거듭해서 마음을 먹는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먹어야 하다니.

_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문장들』

 

 

 

2

 

처음 욕심을 가졌을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 욕심이 그려준 지도를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이미 그 길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과 저 앞에서 쉬지도 않고 걸어나가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발견하는 일이 있다. 기진맥진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 보면 저 아련하게 먼 곳, 더 높은 봉우리에 이미 깃발이 꽂혀 펄럭이고 있음을 깨닫고 벼락맞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마침내 그때는 모를 수 없게 된다. 세상에는 천재가 있음을. 천재가 나를 길 잃게 한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으므로 내가 갈 수 없을 곳에 이미 가 있는 이들의 존재가 내 삶을 박해한다. 내 의지를 굶긴다. 세계는 벌써 정복되었거나 정복되는 중이다. 자유를 욕심내는 사람만이 지금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고 분노하거나 슬퍼할 수 있듯, 나는 삶의 많은 국면에서 좌절할 자유를 얻었다. 천재를 인정하고 나의 둔재를 시인하는 것은 천천히 100년을 해야 하는 일이지만 120년을 지치는 일이다. 

 

   

성실하다는 말이 듣기 싫었던 건, 내가 천재들을 동경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게 너무 싫었나 보다. 뭐 어쨌든 이제는 내가 성실하다는 걸 알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마치 내게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_이유경,『독서공감, 사랑을 읽다』

 

엥겔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누가 어떻게 천재를 질투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능력은 너무나 특별한 것이기에,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것을 자신이 획득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것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가공할 정도로 속이 좁을 것이다.

_프랜시스 윈,『마르크스 평전』,『자본론 이펙트』

 

"아니요, 사라졌어요, 제리. 난 두 번 다시 예전처럼 할 수 없어요. 사람은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예요. 자유로워서 쌩쌩하게 실재하는 진짜 재능을 가졌거나 아무것도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요. 난 더는 자유롭지 않아요.

_필립 로스,『전락』

 

 

 

3

 

천재는 더 남길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겠지만, 범재는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다. 내가 죽은 오늘을 생각한다. 슬픔만이 남을 것이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므로 이내 슬펐다는 기억만이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일에만 나를 기억할 것이다. 기일은 남아있는 사람들이 추억할 만한 것을 달리 세상에 남겨 놓지 못하고 떠난 이들을 위해 관습이 제공하는 사회안전망 같은 것이므로. 나는 기일의 혜택을 입어 간신히 기억되다가, 남아 있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 결혼 기념일이나, 직장 상사의 생일이나 출신 학교처럼 기억해야 할 것들이 늘어남에 따라 천천히 사라질 것이다. 이미 가고 난 마당에 남아 있는 이들이 기억해 주는지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싶으면서도,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치명적인 욕심이다. 산다는 게 그런 것 아닐까? 잊히고 싶은 욕심과 기억되고 싶은 욕심 사이에서 하는 고무줄 놀이 같은 것.

 

그러나 우리에겐 너무나 슬프게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기억을 둘러싸고 징징거리는 것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해야 좋겠다.

 

   

페소아는 베개에다 뺨을 갖다 대며 피로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하는 안토니우 모라, 페르세포네가 자기 왕국에서 나를 원해요. 이제 떠날 시간이에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이미지들의 극장을 떠날 시간입니다. 내가 영혼의 안경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당신이 알까요. 나는 저 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오리온의 버팀대를 보았고, 이 지상의 발로 남십자성 위를 걸었고, 빛나는 혜성처럼 무수한 밤을 가로질러갔고, 별들 사이의 공간, 쾌락과 두려움을 가로질러갔고, 또한 나는 남자이자 여자, 노인,소녀였고, 서양 세계 수도들의 커다란 대로에 모인 군중이었고, 우리가 평온함과 지혜를 부러워하는 동양 세계의 온화한 부처였고,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들, 내가 될 수 있었던 모든 타자였고, 명예와 불명예, 열광과 쇠잔함을 알았고, 험준한 산들과 강들을 가로질러갔고, 평화로운 양떼를 보았고, 머리 위로 햇살과 비를 맞았고, 타오르는 여성이었고, 길에서 노니는 고양이였고, 태양이자 달이었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삶이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안토니우 모라. 내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무수한 삶을 사는 것과 같았어요. 이제 피곤해요. 내 촛불은 소진되었어요.

_ 안토니오 타부키,『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우리는 더 이상 '기억 속의 한국'에 머무를 수 없다. 어둡고 불편한 기억이 순서없이 등장하는 낯선 꿈처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풍경들과 얼굴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중심이 없는 풍경들과 익명의 얼굴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우린 속수무책으로 그 풍경을,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 풍경이, 얼굴이 전하려는 바는, 우리가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시간 속에 머무르길 바란다는 것이다.

_ 김은산,『기억극장』

 

우리에게는 공동의 빛이 있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빛은 우리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 살고, 죽고, 살고, 죽고, 살고,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담긴 빛이야. 그 모든 눈빛을 기억하는 빛이야. 푸른빛이 감도는 모닥불. 그 주위에 가득한 어둠. 어둠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 영원히 잠긴 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눈빛을 기억해

_윤해서,「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제7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행복의 과학』

 

11. 15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 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 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온다. 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 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 지루하고,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내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

_ 롤랑 바르트,『애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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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7-09-0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런 휴식... 정말이지 딱 하루만 누리고 싶네요. 흑흑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의 문장이 좋아 보관함에 담아 봅니다. 책장에 꽂혀만 있던 <불안의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syo 2017-09-04 07:13   좋아요 2 | URL
저도 불안의 책 꽂아놓기만 하고 하루하루 불안해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