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의 괴로움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처음 이 책이 발매되고 도서관에 입고되었을 때, 한동안 서가에 꽂힐 새가 없을 정도로 불티나게 대출되더라. 처음에 나는 좀 놀랐다. 세상에, 장서의 괴로움을 공감할만큼의 고수들이 이렇게나 많단 말인가? 아니 잠깐, 그런 사람들은 책을 빌리는 게 아니라 사서 볼 텐데, 아니 잠깐잠깐, 그럼,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이 빌려 보기로 마음먹을만큼 이 책이 별로라는 말인가? 뭐 대충 이런 식의 되먹지 못한 논리의 흐름에 휩쓸려 그만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정리했던 것 같다. 3년 전이다.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 소재(최소한 의욕적인 알라디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공산이 크다)로 쓴 책을 막상 읽어보니 그저 소소했을 때, 리뷰어는 난감하다. 칭찬하기도 부끄럽고 욕하기도 뻘쭘하고, 칭찬거리가 오히려 단점을 부각시키고 마는 희한한 상황. 게다가 남의 나라 남의 책 이야기라서 한층 더 재미없다. 문장은 더 문제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고, 쓰기도 한다는 사람의 글 치고 어쩐지 문장에 매력이 없고 재미도 없다. 몇 군데 오자를 발견하는 바람에 혹시 이게 번역가와 편집자의 문제는 아닐까 싶은 의심도 든다. 무엇도 확실하지는 않다.

 

내용의 절반이 책이 너무 무거워 집 무너지거나 무너질 뻔한 이야기인데, 나는 저런 막장까지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과 그러나 저런 막장 인생이라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킨다.

 

다른 책들도 떠오른다. 윤성근의 책은 재미 면에서 이 책이 지닌 단점들을 모두 극복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은 스케일 면에서 이 책은 물론 독자까지 압도하는 데가 있다.

 

 

 

 

 

길 위의 인생 / 글로리아 스타이넘 / 고정아 옮김 / 학고재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양 극단의 두 우물이 있다고 치자. 한 번은 이쪽 우물에서 빨간 물을, 또 한 번은 저쪽 우물에서 파란 물을 길어야 한다면 얼마나 난망할까. 그런데 이 책은 또 그걸 한다. 그 양쪽 우물에서 빨간 물과 파란 물을 동시에 길어내는, 우리가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책들 중 하나다.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길 위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의 주옥같은 이야기들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결코 얻을 수 없었을 특수성의 보석이다. 또한,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 그들과의 교감과 충돌로 빚어진다는 보편적인 지혜도 들려준다.    

 

나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집에 올 수 있으므로. 나는 집에 올 수 있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므로. 존재의 모든 방식은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가치가 더 빛난다. 캠프 치기와 계절 따르기 사이의 이 균형은 아주 오래된 동시에 아주 새롭다. 우리 모두 두 가지 다 필요하다.

 

아버지는 오로지 길의 기쁨을 위해 혼자 죽는 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집을 갖기 위해 자신만의 여정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다. (414-415)

 

앞으로 50년이 더 지나, 내가 걸어온 길, 만나온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때, 내가 이 책의 절반, 혹은 그 절반의 가치라도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꼼꼼히 듣고, 자세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브누아 시마, 뱅상 코 / 권지현 옮김, 류동민 감수 / 휴머니스트 

 

 나는 비꼬는 책을 싫어한다. 그러나 제대로 비꼬는 책은 사랑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지식의 교수대가 있다면, 가장 먼저 마셜의 머리를 건 다음 파레토, 발라, 제번스 등 신고전학파 일당 전체에게 벌을 줄 것이다. 당시에도 이미 낡았던 가설(오늘날에는 오죽하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실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경제의 균형, 이를테면 공급이 수요에 다가가거나 수요가 공급에 다가가면서 추는 배꼽춤이라고 믿었다.

 

이 책을 통해 지식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는지가 채점기준이 된다면 득점에는 독자의 수준과 입장에 따라 논쟁이 붙겠지만, 일단 재밌다! 나보다 6살이나 어린 친구가 그렸다는 만화는 정말 뭐라고 칭찬해야 할지 말을 못 고를 지경이다.『자본』의 귀퉁이에 조그맣게 스마일을 그려넣고 있는 맑스의 저 표정을 좀 보라지! 그림은자본』이 그야말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제대로 비꼬고 있다. 만화 속 맑스는 예언자다! 그의 염려대로자본』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만 실은 출간된 후 150년 동안 진짜로 읽은 사람은 전 세계를 탈탈 털어도 열두 명, 좋게 봐줘도 열 세명 뿐이며 향후 10년 안에 읽기만 하면 그 사람이 곧바로 열 네번째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추측되는 비운의 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저러나,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어쩐지 나는 맑스를 그린 그림에 페티시가 좀 있는 것 같다. 저 지맘대로 수염 하며, 저 결코 가려지지 않는 배 하며. 하악하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 권김현영 외 / 교양인 

   

이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서 찾아냈다. 노동자의 임금 또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이라고 하면, 그 노동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들의 노동시간의 총량을 임금으로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 불렀고, 노동자가 노동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물적, 정신적, 교육적 여건들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본 것이다. 근데 이때, 아내가 제공하는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즉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가사노동의 가치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임금 전체가 낮게 책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놈의 여편네가 집에서 빈둥빈둥 하는 것도 없으면서 서방이 왔는데 밥도 안 내놔, 라는 개소리를 할 권리가 있다는 지독한 오해를 획득한 대신 임금의 일부에 손실을 보게 된 제 발 찍기식 실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오독일 수 있다. 거친 결론일 수도 있다. 깊이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이 없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친구놈에게 말했다. 친구놈은 주류경제학의 입장에서, 가사노동은 딱히 그 가치를 측정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측정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측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놈은 그렇다면 책정된 가사노동의 대가는 누가 지급해야 하냐고 말했다. 나는 임금 자체가 가사노동을 배제하여 부족하게 책정되어 있으므로 임금 상승이 수반되어야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가사노동이라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놈은 그렇다면 그것이 돈이 오가는 계약관계랑 다를 것이 무엇이냐며, 가족이란, 결혼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 부셔야 할 것이 곳곳에 있다. 낭만적 결혼에 대한 가부장적 환상. 사랑은 대가가 없는 것이므로 돈이 오가면 오염된 것이라고 보는 맹목적인 헌신의 사랑관. 정신차려야 한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인간이 만든 모든 관습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관습으로 고정될 이유가 없다. 관습이 전통이 되었다는 것은 보편성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통제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이다. 전통이 문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정해주어야 할 절대적인 가치가 발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통제력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들을 감추는 투명망토가 되었다는 뜻이다. 많이 읽어야 한다. 날카롭게 보아야 한다.  

 

    

근육을 사용해야 걷거나 달릴 수 있듯이, 이론이 있어야 우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현실의 중력에 대항해서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다른 것이야 말로 '새로운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기 위한 힘, 이것이 바로 근육의 쓸모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론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관점을 뜻하기도 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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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0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정말 좋은데 좋다고 표현하는 일이 어려워요. 책을 읽다보면 좋다고 느끼게 되는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도 있어요. 좋으면 그냥 좋은거죠.. ㅎㅎㅎ

syo 2017-09-03 09:18   좋아요 0 | URL
전 이유 여하에 상관없이 책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대놓고 표현하는 편인데, 문제되는 지점은 아무래도 한 책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할 때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