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글

 

      비평의 과정이 '구원의 한 형식'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비평 혹은 해석하는 자와 대상 텍스트가 만나서 본래의 자기를 지우고 하나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카프카와 만날 때 벤야민은 그 자신만이 카프카의 천재성과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프루스트와 만날 때 그는 그 자신의 잃어버린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을 찾아서 떠나며, 보들레르와 만날 때 그는 그 자신이 산책자가 되어 제2제정기의 파리를 배회한다. 그의 비평 작업은 자신 안에 있던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보들레르를 발견하는 것,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작가들, 작품들, 언어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한다. 그는 그것들을 자기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들에게로 '이동'시킴으로써 그 자신만의 내재적 표상과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 나간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1인칭의 표상 형식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작가 혹은 작품을 자신의 내재적 기준에 의해 표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벤야민이라는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나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글을 쓰는 자들은 '나'라는 작은 단어를 자신의 비상식량처럼 여기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라고. 그가 경계했던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자의식과 1인칭 속에 숨어 있는 무비판적 자기 확신이었다. 벤야민이 1인칭의 글쓰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무수한 인칭들과 대면한다. 그것들은 그가 만나는 작가와 작품, 그리고 세계 전체이다. 때문에 그의 문체는 매번 다른 것이 되고, '그들'의 문체가 된다. 그는 혼자 쓰지만 그의 글쓰기는 '집합적'이다.

_권용선,『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37~39쪽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_미셸 에켐 몽테뉴,『수상록』제 2권 I

__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_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책』

__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페소아는 페소아가 되었다가 카이에루나 소아르스가 되기도 하며 수많은 얼터에고를 전전하며 살았지만 어쨌든 매 순간, 그 순간의 자신을 인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페소아는 페소아의 글이 자기의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소아르스는 자기가 써서 페소아에게 전했으니『불안의 책』의 진짜 저자는 페소아가 아니라 자기라고 주장할 것이다. 페소아는 한 개의 붓놀림으로 n개의 획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인용문에 따르면 벤야민의 글은 매 순간 벤야민의 글이 아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또 어떤 누군가의 글이라 한다. 실제로 인용으로만 된 책을 벤야민은 꿈꾸었다. 지우개로 글을 쓰고 있다. 벤야민은 쓰면서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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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샘 2017-05-2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있는데 관련 글들을 찾아들어오다가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러 왔다가 벤야민을 만났네요. 벤야민에 대한 글을 읽으니 다시 보르헤스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읽고, 더 읽고 싶어 친구 신청하고 갑니다^^

syo 2017-05-29 07: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길샘님.
이 글에서 막상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제목밖에 못 보셨겠어요ㅎㅎㅎ 딱 한 페이지 읽고 멈춰버렸네요;: